** 전근대적 가부장제를 빼닮은 급진적 페미니즘을 타격하는 **
평등연대 (http://cafe.daum.net/gendersolidarity ) 제공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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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진보진영이여! 급진페미니즘을 ‘남녀 분리주의’라 부르자
“베티 프리단과 엘리자베트 바댕테르가 급진적 여성주의를 버렸을 때 그를 따르던 여성주의자들의 황당함이란 아마도 포레스트 검프를 따르던 일단의 군중들과는 비교가 안되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 작고한 베티 프리단, 95년 베이징 대회에서 ‘남녀 통합노선’ 주장
시몬드 보부아르의 영향을 받아 활발하게 여성주의운동에 매진하던 미국의 저명한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심리학자인 베티 프리단이 지난 4일 향년 85세를 일기로 별세한 소식을 여성신문 등 모든 언론들은 대서특필했지만 그에 대한 심도있는 재해석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프리단은 미국 최대의 여성운동단체 전미 여성기구(NOW), 전미 낙태권행동리그(NARA), 전미 여성정치회의(NWP)를 발족시킨 바 있다. 그는 60∼70년대 활발히 여성운동을 전개한 주류여성계 인사로 84년 제럴딘 페라로 여성 부통령 후보 지명과 민주당 대통령 지명 후보대회 당시 여성 50% 할당 요구를 위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여성정치세력화 운동의 대모다.
그러나 프리단은 95년 9월 베이징(北京) 제4차 유엔 세계여성회의를 기점으로 여성정체성에 주안점을 둔 전투적 페미니즘보다 ‘남녀 통합노선’으로 선회함으로써 당시 급진적 경향의 페미니즘을 고수하던 기존 여성계와 작별을 고하는 충격적인 사태가 발생한다.
프리단은 “여성과 남성, 노인과 청년으로 사회계층을 분리하는 것 자체가 양극화를 초래하며,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여성과 남성 둘 다 희생될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이 주도하던 “제2의 ‘인형의 집’ 혁명”을 상당부분 포기한 셈이 되었다.
–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여성들은 ‘할당제’에서 보호받을 정도의 약자 아니다
‘잘못된 길’(도서출판 중심)의 저자인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올 62세로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프랑스 철학자이다. 그도 베티 프리단처럼 시몬드 보부아르의 저서 ‘제2의 성’을 읽으면서 페미니스트가 되었고 지난 30여 년간 여성주의에 몸 담아왔다.
바댕테르는 “페미니즘의 희생자주의”가 가져오는 폐해에 주목했다. 그가 보기에 여성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결코 남성들의 희생자가 아니며, 남성와 여성의 차이는 이 둘의 유사점보다 더 크지 않다. 따라서 여성들은 할당제라는 요새에서 보호받을 정도로 약한 종족이 아니니 제발 불쌍한 이미지를 벗어버리라는 것이다.
바댕테르는 “많은 남성들이 자신들의 제국이 무너진 원인을 보았고, 여성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하고 있다.”면서 “많은 여성들이 남성/여성의 경계선 재건을 위해 새로운 도덕적 질서를 세움으로써 남성에게 응수하려는 유혹에 빠져 있”는 것은 “절대 피해야 할 함정”이라고 경고했다. 이를 일컬어 그는 “우리의 자유를 잃고, 평등으로 가는 행진에 제동이 걸리고, 남녀 분리주의와 결합하게 되는 바로 그 함정이다.”라고 지적했다.
바댕테르는 이러한 지배 담론들이 “여성의 조건을 발전시킬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고 “오히려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다”며 특히 1990년 이후 분리주의로 나아가고 있는 급진적 여성운동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했다.
– 정희진, 페미니즘 만능론과 급진주의 페미니즘 주장으로 스스로 모순에 갇히다
여성학 소장학자로 잘 알려진 정희진씨(서강대). 그는 엘리자베트 바댕테르가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정면으로 비판한 책 ‘잘못된 길’ 에 대해 “저자가 ‘변절’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실망스럽다.”(한국일보 책과 세상 2005. 9. 30)며 그의 주장을 비난하며 간단하게 평가절하했다.
정희진은 “여성의 폭력성”을 남성폭력과 더불어 객관적으로 서술한 바댕테르에게 “여성도 폭력적”이지만 “그러나 이를 남성의 폭력과 질적, 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며 “남편이 아내를 때려 죽이면 ‘과실 치사’지만, 아내가 폭력 남편을 정당방위 차원에서 죽이면 ‘살인’이 된다.”고 폭력이 남성우월적임을 강조했다.
또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쉽게 받아들여진 덕분에 아직도 강간과 가정 폭력이 그토록 횡행하는가?” 라고 되묻고 “5,000년의 가부장제가 그리 만만할까? 내가 생각하기에 특히, 한국 사회에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잘못된 길’이 아니라 ‘아직 가지 않은 길’”이라며 현시기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정희진은 바댕테르가 말한 “페미니즘의 희생자주의”와 관련, 아이러니하게도 “(아마도 저자가 파악하지 못한) 페미니즘 사상의 발달은 이미 이러한 이분법을 뛰어넘었고 이 진부한 논쟁을 ‘해결’하였다.”고 페미니즘의 만능성을 홍보하면서 “많은 남성들과 여성들이, ‘피해자 논쟁’을 떠나 양성평등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 시대에 아직도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왜 필요한지 스스로 모순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 포레스트 검프 그리고 붕괴되는 지배담론 “급진여성주의” 성채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한 장면. 검프(톰 행크스 분)가 자신의 유일한 여자친구인 제니(로빈 라이트 분)를 떠나보내고 실의에 빠지자 무작정 마라톤에 나섰는데, 오랫동안 달리다 지친 그가 어느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달리기를 문득 멈췄을 때 모습이다. 이때 그의 뒤에는 검프를 영웅으로 인식(여기서도 언론의 영향력이 결정적이다)해 뒤를 따르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떠나가는 검프를 보며 영문도 모른 채 “아! 이제 우린 어떡하라고” 라며 탄식한다.
베티 프리단과 엘리자베트 바댕테르가 급진적 여성주의를 버렸을 때 그를 따르던 여성주의자들의 황당함이란 아마도 검프를 따르던 일단의 군중들과는 비교가 안되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검프처럼 그냥 홀연히 사라지면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자신들의 리더격인 프리단과 바댕테르가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정도로 급진적 페미니즘 이론에 날카로운 매스를 들이댐으로써, 오늘까지 이 논리에 기대어 생존하고 있던 많은 여성주의자들로 하여금 정체성에서 큰 혼란에 빠지게 했으니 말이다.
그 황당함이란, 95년 베이징대회 한 참가자가 프리단의 발언을 듣고 “지난 30년간 남성들의 가부장적 태도에 맞설 자매애를 강조하는 분위기에 익숙해 왔는데, 갑자기 이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리는 듯한 새 패러다임을 제시하다니 당혹스럽다”고 한데서도 잘 나타난다. 프리단의 ‘남녀 통합노선’ 관련 한 마디에 그 막강해보이던 ‘자매애’ 의 실체가 ‘오리무중’이 돼버린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 반민중, 비민중적인 행태를 예외없이 타격하자. 사회구조악을 향한 민중들의 함성으로
진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부숴야 한다는 불가의 논리나 아내와 자식, 부모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미워해야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본디 기독교의 논리는, 본질상 두 개의 규정이 함께 부정되면서 함께 살아나 통일되는 사회과학적 논리인 변증법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만년에 접어든 프리단과 바댕테르가 급진적 여성주의를 비판하며 논리를 재정립한 것은 깊은 성찰에서 나온 자기부정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페미니즘의 성채에서 누릴 수 있는 기득권에 안주했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물론 프리단이 레즈비어니즘을 인정하지 않는 등 논리가 미완성이라 해도 그들이 단지 “남녀 분리주의”를 적극 반대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만한 가치는 충분할 것이다.
우리가 만약 그들 논리를 인정할 수 있다면, 지배담론에 매몰돼 있는 오늘 한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오류에 더 이상 침묵하면 안된다. 조직이나 사적인 인연에 얽매여 표현을 유보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나름대로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이미 진보가 아니다. 계급과 계층 앞에서의 ‘형제애’ 처럼 ‘자매애’의 본질을 직시하자.
진보진영은 정치적인 계산만 하는 모리배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다. 당신은 정녕 진보인가. 그렇다면, 극빈자인 성노동자들까지 정치판의 제물로 삼으려 성매매 특별법을 만든 저 부르주아 급진여성주의자들의 음모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의 반민중, 비민중적인 행태를 예외없이 타격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회구조악을 향해 외치는 민중들의 함성으로.
최덕효(한국인권뉴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