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면피해자 속출하는데 구제방안은 오리무중
근로복지공단, 제일화학 석면피해자 17명 중 1명만 ‘산재’ 판정
매일노동뉴스 김미영 기자 08-07-16
쉽게 불에 타지 않고 단열효과도 뛰어나 ‘기적의 물질’로 불렸던 석면이 산업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30여년이 흘렀다.
석면은 사문암이나 각섬석에서 추출한 극히 미세한 섬유형태의 광물질이다. 부식과 마모에 강하고, 단열효과가 탁월해 단열재 등 건축자재에서 배관용 파이프 피복재·방음재·방화복·자동차 브레이크 패드·램프 심지까지 수천 가지 용도로 사용돼 왔다. 미세한 석면섬유는 먼지 형태로 공기 중에 떠다니다 인체에 흡입되면 빠져나가지 않고 장기간의 잠복기를 거쳐 암을 유발한다. 석면을 다루는 직업에 20년 이상 종사한 경우 폐암발병률이 일반인의 10배나 높아진다. 석면먼지가 늑막이나 복막을 뚫고 침투해 생기는 중피종은 대개 발병 1년 내 사망에 이르게 한다. 석면먼지를 오랜 기간 많이 들이마시게 되면 진폐증처럼 폐가 서서히 굳어져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석면폐증’이 나타나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석면은 ‘인체에 암을 일으키는 것이 확실한’ 1급 발암물질로 분류돼 있다.
석면 피해자 27년 후 1만명 넘어설 것
국내에서도 석면의 공포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서울지하철에서 수십년간 역무원으로 일했던 노동자가 석면폐암으로 잇따라 사망했다. 자동차 브레이크를 제조하고 있는 대구의 상심브레이크에서도 석면피해자가 나타나고 있다. 70~80년대 국내 최대 석면방직공장이었던 제일화학에서는 일가족 모두가 석면폐암과 악성중피종으로 줄줄이 사망하는 등 그 피해가 날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27년 후인 오는 2015년께는 석면으로 인한 악성중피종 환자가 1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석면관리 중장기종합대책을 수립해 내년부터 모든 석면함유 제품의 취급과 사용을 금지된다. 석면피해의 확산을 막겠다는 의지는 확고하다. 문제는 석면피해자에 대한 구제방안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라는 점이다. 석면에 노출돼 각종 암을 앓고 있는 노동자들을 ‘나몰라라’하고 있다는 지적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15일 석면피해자와 가족들은 서울 세종로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석면특별법을 제정하고 석면구제기금을 마련하라고 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근로복지공단, 제일화학 석면피해자 17명 중 1명만 ‘산재’
제일화학이 지난 69년 부산 연산동에서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몇 명의 노동자가 근무했는지 공개되지 않았다. 제일화학 석면 피해자모임에서 수소문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69~82년 사이 180명의 근무자 명단이 파악됐다. 이 가운데 29명은 이미 사망했는데 사인이 확인된 21명 중 3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면 때문이었다. 악성중피종(7명)·폐암(3명)·석면폐증(4명)·폐질환(5명) 등이다. 이들 19명의 사망자 가운데 산재로 인정된 노동자는 3명에 불과하다. 대다수는 왜 암에 걸렸는지조차 모른 채 운명을 달리했다.
아내를 중피종으로 잃고 본인도 석면폐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박영구 전국석면피해자·가족협회장은 “피해자모임이 결성되지 않았다면 지금도 이유를 모르고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협회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현재 생존해 있는 제일화학 노동자 가운데 26명이 석면과 관련된 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일화학 석면 피해자 17명은 올초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요양을 신청했다. 이에 공단측은 1명만 산재로 인정하고 6명에게는 불승인 판정을, 1명에게는 재심사할 것을 결정해 파장이 일고 있다. 나머지 10명에게는 휴업급여가 지급되는 산재요양이 아닌 장해판정을 내리겠다는 방침이다.
협회측은 “석면의 위해성을 알면서도 사용을 허가했던 정부가 석면피해자를 양산한 주범”이라며 “열심히 일한 죄로 고통받고 있는 처지도 억울한데 피해보상마저 외면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제일화학 노동자뿐만 아니다. 산업안전공단에서 작성한 ‘석면에 의한 건강장해예방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06년까지 매년 20여명의 악성중피종 환자가 발생하고 있고, 직업력에서 석면노출이 확인된 노동자만 21명에 이른다. 하지만 같은기간 산재로 인정받은 노동자는 11명에 불과했다. 영세사업장에서 석면에 노출되거나 건설현장에서 고용된 기록을 찾기 어려운 일용직 노동자들은 대다수는직업병임에도 불구하고 산재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노동부는 “진폐와 달리 석면은 별도 규정이 없다”며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규정에 따라 처리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노동부는 또 “환경부에서 석면관련 피해대책을 마련 중”이라며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지난해 5월 환경부는 환경성질환 예방과 보상 등의 내용을 담은 환경보건법을 제정했지만 이 법안에서도 구체적인 석면피해자 구제 방안은 빠져 있다. 환경성질환 예방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환경성질환 발생 후 사후처리와 관련한 의료적·법적 대응은 누락돼 있거나 간략하게 언급돼 있어 피해자들에게는 ‘사후약방문’에 불과한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