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걷기 거뜬 … 한국 안 미워요”
[그 후 1년] 하반신 마비 태국 근로자 재입국
노말헥산 중독 말끔히 씻고 물리치료
“돈 더 벌고 싶은데…”비자 없어 출국해야
(2005년 1월) 노말헥산에 의한 다발성 신경장애로 하반신이 마비된 태국 여성 근로자들이 지난해 1월 17일 치료를 받기 위해 재입국 했다.
(2005년 11월) 이들은 안산 중앙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으며 그해 11월 차도를 보여 근육강화 운동을 했다.
(2006년 1월) 올 1월 통원 치료를 받은 여성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병원 계단을 걸어내려오고 있다. NPOOL=경인일보 임열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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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걷기 거뜬 … 한국 안 미워요”
“외국인 노동자 고충 많아…”
“이제 걸을 수 있어요. 아직 아프긴 하지만 많이 좋아졌어요.”
22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지난해 1월 노말헥산에 노출돼 ‘다발성 신경장애'(일명 앉은뱅이병) 증상을 보였던 8명의 태국 여성노동자들이 환한 표정으로 센터를 찾았다. 이들은 하반신이 마비돼 휠체어 신세까지 졌으나 지금은 모두 걸어다닐 수 있을 만큼 상태가 호전됐다. 몸이 아파 의자에 앉지도 못했던 시리난(38)도 “더디지만 걸을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이들은 2003년 9월 한국에 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코리안 드림’을 안고 입국했다. 직장은 경기도 화성의 LCD부품 생산공장인 D사.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유기용제 노말헥산으로 하루 12시간 이상 전자부품을 세척했다. 세 살 난 딸을 친정 어머니에게 맡기고 멀리 떠나온 왈라폰(37)은 한 달에 40여만원을 받으면서 악착같이 일했다.
이들에게 노말 헥산 중독증세가 나타난 것은 2004년 11월. 하반신이 뻣뻣해졌고 일부는 작업 도중 쓰러지기도 했다.
그러나 산재 대상이 되는 줄도 몰랐는데다 의료보험 혜택도 받지 못해 치료받을 길이 막막했다. 사라피(31)는 “많이 아파 ‘병원 가고 싶다’고 아무리 말해도 ‘시간없어. 바빠’라며 못 가게 했던 사장님이 너무너무 미워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는 수 없이 시리난 등 세 명은 같은해 12월 11일 태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한국에 남은 동료들이 외국인노동자센터에 이 같은 사실을 알리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노동자센터를 운영하는 박천응(44) 목사는 귀국하지 않고 남은 노동자 5명을 입원시킨 뒤 태국을 방문해 3명의 노동자를 지난해 1월 다시 한국으로 데려왔다.
당시 사라피의 어머니는 하반신이 마비된 딸이 한국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한국 사람들 못 믿겠다고, 가지 말랬어요. 그러나 태국엔 약도 치료법도 없다고 설득해서 왔어요.”
이들은 산업재해 대상자임이 확인돼 치료비 걱정 없이 수술을 받았다. 그 뒤에도 안산중앙병원을 오가며 1년째 약물치료.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경기도는 이들이 완치될 때까지 지낼 아파트와 월 생활비 30만원씩을 지원했다. 태국에서도 우라이완 티엔통 노동부 장관과 이들의 가족이 방한했다. 사라피는 “이제 한국은 안 미워요. 몸도 많이 나아져서 괜찮아요. 고마워요”라며 웃었다.
이들의 몸은 많이 나아졌으나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취업비자를 받아 입국한 사람들은 비자 기한이 끝났고, 치료를 위해 재입국한 이들은 취업비자가 없다. 3월께 치료가 끝나면 모두 태국으로 돌아가야 할 형편이다. 시리난은 “돈을 더 모아야 집에 갈 수 있다.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왈라폰도 “내가 돈을 벌어가야 딸과 어머니 등 세 식구가 살 집도 마련하고, 딸도 교육시킬 수 있다”고 했다.
박천응 목사는 “이들은 한국에 남아서 합법적으로 일하고 싶어 하며,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직업교육이라도 받고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실상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노동부 등은 노말헥산 취급 사업장 300여 곳, 외국인을 고용하고 있는 유해물질 취급 사업장 1200여 곳을 점검했다. 당시 D사 대표는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종업원 50여 명이 일하던 이 공장은 문을 닫았고 대신 그 자리에는 플라스틱 공장이 들어섰다.
◆ 외국에선 어떻게 하나=한국에서도 불법체류자의 경우 산재 혜택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치료가 끝나면 귀국해야 하기 때문에 신고하는 것을 꺼린다. 불법체류자가 병에 걸리면 의료보험 혜택이 없기 때문에 치료비 부담이 크다. 미국의 경우 무비자 외국인도 사보험에 가입할 수 있으며, 불법체류자의 자녀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의료 혜택을 받는다.
안산=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 노말헥산은=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거나 자동차 등을 움직이기 위해 가솔린을 태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색무취의 액체 물질이다. 주로 공업용 세척제나 접착제 등의 소재로 사용된다. 노말헥산은 대개 공기 중에서 3일 정도의 반감기를 가지고 분해되며, 이론적으로는 먹이사슬 등을 통해 최종 포식자에게 집적된다. 일상 생활에서 노말헥산의 농도는 미미해 인체에 별 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농도가 높거나 장기간 노출되면 현기증.두통.근육경련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심하면 사지 근육이 마비되는 신경장애가 생길 수 있다.
2006.01.24 05:14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