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파업’ 비정규직 “차라리 노숙인이라면…”
이랜드·코스콤·KTX 조합원의 35.9%가 “죽고 싶다”

2008-08-05 오후 6:50:56

어쩌면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결과였다. 그래서 누구도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지나쳤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이 “일반인보다 무려 8배나 정신질환 의심자의 비율이 높고, 외환위기 직후 크나큰 충격과 실의에 거리로 나온 서울역 노숙인보다 더 심각한 수준의 정신 건강 상태를 갖고 있다”는 새삼스런 진실은 ‘그렇구나’ 고개 끄덕이고 넘어갈 만큼 사소한 일은 아니었다.

바로 이랜드, 코스콤, KTX·새마을호 승무원의 얘기다. 이들은 모두 짧게는 300일에서 길게는 900일 가까이 오랜 시간, 파업을 벌이고 있다.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업장의 울타리에 관계없이, 남녀에 관계없이, 그 나이에 관계없이 이들은 모두 “자주 우울하거나”, “아무 것도 아닌 일에 화가 치밀어 오르거나”, “샤워를 하다가도 울컥 눈물이 난다”고 했다.

노동건강연대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5일 발표한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 정신건강 실태조사’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참담했다.”

치료 필요한 ‘질환의심군’ 18.3%…주의 필요한 ‘관리대상군’ 35%

노동건강연대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는 이날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이랜드일반노조, 코스콤비정규직지부, KTX·새마을호 승무원 등 파업 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를 상대로 한 정신건강 상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대상은 120명, 조사 기간은 지난 7월 21일부터 25일까지였다.

장기 파업 중인 노동자의 정신건강을 조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조사에는 당초 파업 1000일을 넘긴 기륭전자 여성 노동자들도 대상에 포함시키려했으나, 조사 기간 중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단식을 벌이고 있어 불가피하게 대상에서 제외됐다.

조사 결과 전체 조사대상자 가운데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어 관리가 필요한 것으로 판단된, ‘관리대상군’의 비율은 35%에 달했다. 일반인에 비해 2.2배가 높았다. 그보다 더 심각한, 정신과 전문의의 진료가 필요한 ‘질환의심군’ 비율은 18.3%로 일반인보다 무려 7.3배가 많았다.

이는 이들 단체가 지난 1999년 외환위기 직후 명예퇴직 등으로 거리로 쫓겨 나온 서울역 노숙인을 상대로 한 정신건강 조사보다 심각한 결과였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사무국장(산업의학 전문의)은 “현재의 장애 수준 혹은 심도를 나타내는 지수인 GSI(Global Severity Index, 전체심도지수)를 보면 조사 대상자 평균은 55.8로 서울역 노숙인 평균인 54.7보다 높았다”며 “사회적 배제와 차별 속에 심각한 소외감을 느꼈던 노숙인보다 장기 파업 비정규직의 정신건강이 더 안 좋다”고 말했다.

노동조합별로는 가장 오래 파업을 벌인 KTX·새마을호 승무원들이 제일 심각했다. 전체의 21.9%가 진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코스콤 비정규직(19.5%), 이랜드 비정규직(14.9%)도 응답한 조합원의 15~20%가 치료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죽고 싶다” 전체의 35.9%…일반인의 2배

구체적으로는 우울증, 강박증, 적대감, 신체화 증상이 일반인에 비해 유독 높았다. 응답자의 96.6%가 “매사에 걱정이 많다”고 대답했고,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안 되고 막히는 기분”이라는 사람도 93.1%나 됐다. KTX열차승무지부 오미선 지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파업이 길어지면 사업장은 달라도 하는 일은 다 비슷하다. 점거, 단식 아니면 어디에 올라가고…. 몇 일을 굶느냐, 어디를 점거하느냐만 다를 뿐이다. 3년간 몇 차례나 다 해 봤던 일이다. 그런데 안 됐다. 또 하자고 하면 조합원들 반응은 ‘그거 해서 정말 되는 거야? 안 되면?’이다. 울고 싶어도 마땅히 울 공간도 없다. 화내고 싶어도 화 낼 사람이 없다. 자다가도 문득 생각이 나면 울고, 샤워하다가도 눈물이 난다.”

“죽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응답한 이들도 전체의 35.9%나 됐다. 이상윤 사무국장은 “일반인의 자살충동 평균치가 19%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일반인보다 2배 가량 높은 것이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나는” 적대감 증상도 전체의 95.8%에서 나타났다.

마음의 병이 몸으로 옮겨가는 신체화 증상도 도드라졌다. 응답자 대부분이 머리가 아프거나(85.6%), 근육통 또는 신경통에 시달렸고(82.5%), 허리가 아프다고 느꼈으며(82.3%), 어지럽거나 현기증을 호소하는 사람(77.6%)도 많았다.

특히 코스콤 비정규직지부 조합원들에서는 신체화와 대인예민성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는 이날로 파업 329일 째인 이들이 그 시간 내내 서울 여의도 증권선물거래소 앞에서 노숙 농성을 한 것이 원인으로 분석됐다. 이상윤 국장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여의도 한 복판에서 장기간 노숙 생활로 인해 주위의 시선에 신경을 쓰게 되거나 몸이 아프고, 분노, 공격성, 울분 등이 쌓이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어느 날, 돌아보니 6살 아들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내가 있었다”

이날 사례 증언을 위해 나온 김경욱 이랜드일반노조 위원장의 말은 이들이 겪고 있는 내부의 고통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김 위원장은 “우울증 진단을 받고 현재 3주째 치료를 받고 있다”고 털어놨다.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우울증인 것 같다”고 얘기하기 시작한 것은 몇 달 전부터였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주위에서 치료를 권할 때마다 ‘내가 냉정함을 유지하고 통제하고 있는데 왜’라며 한 귀로 듣고 흘렸다”고 말했다. 그러던 그에게도 ‘자각 증상’이 나타났다.

“어느 날, 아파서 하루 연락 없이 못 나온 노조 간부에게 ‘이번 기회에 정리하고 떠나라’며 화를 내는 나를 봤다. 촛불시위에서 노조 재정 사업을 위해 생수를 파는데 ‘너무 힘들다’며 오늘은 그만하자는 한 조합원에게 ‘내가 다 할 테니 집에 가라’며 신경질을 낸 적도 있었다.”

일상적인 일에서 거칠게 화를 표출하는 것 외에도 집안 가구 배치를 수시로 바꾸는 증상도 나타났다.

“작은 원룸에 살고 있는데 3일에 한 번씩 온 집을 뒤집어 가구 배치를 다시 하곤 한다. 작은 물건들도 완벽하게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일을 하다 문득 돌아보면 온 집안이 난장판이 돼 있었다.”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6살 난 아들에게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발시킨 일이었다. 김 위원장은 “그 순간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는 정신과 전문의로부터 폭발장애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했다.

김 위원장은 “투쟁의 전망은 날이 갈수록 불확실한 듯 보이고, 수십 명이 해고되고, 수십 명이 수배를 당하거나 체포되고 수백억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걸려 있었다”며 “아내까지 이혼을 얘기하며 가족마저도 안 도와준다 싶으니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다”고 증언했다.

‘마음의 병’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과 ‘결과에 대한 불안감’

이들이 앓고 있는 마음의 병의 가장 큰 원인은 노동조합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역시 경제적 어려움이었다. 전체 응답자의 41.7%가 본인이 받고 있는 스트레스의 가장 큰 이유로 경제난을 꼽았다.

조합원의 1명을 제외하고 모두 남성으로 한 가정의 가장도 상당수인 코스콤 비정규직과 40~50대 여성이 대다수인 이랜드 비정규직은 특히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고통 호소가 눈에 띄게 높았다. 각각 39%와 66% 수준이었다.

“조합원들 가운데 경제적 문제로 인해 이혼을 당하거나 아내가 갑자기 집을 나간 사람도 많다. 애초에 비정규직이었으니 저축해 놓은 돈도 별로 없었지만, 대출 이자를 갚지 못해 전세를 월세로 돌리고 20평 아파트를 10평 남짓으로 줄여가면서 울었다는 얘기도 많이 듣는다.”

이렇게 말하며 코스콤비정규직지부 정인열 부지부장은 울컥 쏟아지는 눈물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스트레스를 느끼는 영역 2위는 파업의 결과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27.1%가 지금 이 순간에도 ‘이 파업의 끝이 과연 장밋빛일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이 이들을 지치게 하고 있는 것이다. “3년이 됐든, 5년이 됐든 이길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이라는 정인열 부지부장의 말은 그런 고통에 대한 토로였다.

3위로 나타난 것도 비슷했다. 그것이 복직이든, 포기이든 파업이 종료된 뒤 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전체 응답자의 16.2%가 두려워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KTX 승무원으로 사회에 첫 발을 디뎌 2년 반을 일하고 3년 파업 중인” KTX 승무원은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하는 불안감이 43.8%로 가장 컸다.

주위의 시선도 이들이 털어놓은 고통의 원인 가운데 하나다. 현재 서울역에서 농성 중인 오미선 KTX승무지부 지부장은 “농성장 부근에서 혹여 대학 동기나 친구를 만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혹 아는 사람을 만나면 수치스러워하는 조합원이 많다”고 말했다.

“개인적 원인 아닌 사회적 요인으로 인한 질병…해법도 그로부터”

이 두 단체는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도움이 필요한 해당 비정규직에게 정신과 전문의의 면담 및 상담, 치료까지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물론 당장 나타나는 증상의 치료도 시급하지만, 그보다 이들의 ‘마음의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때문에 “사회적 해법의 모색”이 강조됐다.

또 이날 드러난 결과는 비단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현재 1년 이상 장기 파업을 벌이고 있는 소위 ‘장기 투쟁 사업장’은 60여 곳에 이른다. 더욱이 전체 노동자 가운데 비정규직 비율은 이미 850만 명 시대다.

이들 가운데 또 다른 누군가가 대규모 계약해지와 외주화 등에 맞서 또 다른 곳에서 파업을 시작하고, 장기간 좀처럼 해법을 찾지 못하면서 또 마음의 병을 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역시 이상한 사람이었구나 생각해선 안 된다”

이날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한 이상윤 사무국장은 조심스러워했다. “정신건강이 나쁘다”고 하면 곧 “미쳤다”로 인식되는 우리 사회의 의식 수준 때문이었다.

혹여 이번 조사 결과가 “저 사람들은 역시 이상한 사람들이라서 저렇게 오랫동안 파업하는 거였구나”라는 시선이 돌아올까 걱정스럽다고 했다.

이 국장은 “그것은 원인과 결과가 오도되는 반응”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처음부터 ‘병자’였던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극한 상황에 처하면 나타나는 변화라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사실 이번 조사 대상에 포함된 3곳의 사업장은 이 국장의 말대로 “그나마 상대적으로 여론에 많이 알려진 곳”들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들의 ‘행위’ 내면에 숨겨진 날 것의 ‘삶 자체’에 대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관심을 가지는지 돌이켜보고 공감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 이번 조사의 목적이었다고 했다.

여정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