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오전 일도 기억이 안 난다”
장기투쟁 비정규직, 18.3% 정신질환 의심… 사회적 배제·차별이 원인

선대식 (sundaisik)

“정신과 치료를 받은 지 3주째입니다.”

5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4층 소회의실. 김경욱 이랜드일반노조 위원장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고백했다. 계속되는 그의 이야기에 20여명의 청중들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김 위원장은 “6살 아들이 최근에 소화정신장애 진단을 받고 장애인 복지관에서 언어·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며 “의사가 ‘3~4년간 부모 없이 방치된 아이와 똑같다’고 말했을 때, 제가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가족끼리 교회에 가서 목사님과 밥을 먹다가 아들이 밥을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그 순간 폭발했다”며 “식탁을 손으로 ‘꽝’ 하고 내리쳤다, 아들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는데 순간 기억이 사라졌다, 나중에 그 얘길 듣고 후회했다”고 전했다.

병원에서 그는 우울증·폭발장애 진단을 받고 약을 먹고 있다. 하지만 그가 처한 상황은 녹록치 않다. 지난해 서울 상암동 홈에버 월드컴몰점 점거로 구속됐을 때, 아내의 “헤어지자”는 말에 홧김에 동의했다. 현재는 13.2㎡(4평)짜리 원룸에 혼자 살고 있다.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 노동자 정신건강 실태조사 결과’가 발표된 이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사연이 회의실에 퍼져나갈 때마다, 곳곳에서 안타까움과 한숨이 새어나왔다.

장기 투쟁 비정규직 노동자의 35.9% “죽고 싶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신건강은 IMF 사태 직후 서울역 노숙인보다 좋지 않습니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사무국장(산업의학 전문의)이 밝힌 실태조사 결과는 명확했다. 그는 “사회적 배제·차별·사회로부터의 동떨어진 느낌 등이 정신건강을 악화시킨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이랜드일반노조, 코스콤 비정규지부, KTX·새마을호 승무지부의 비정규직 노동자 120명을 대상으로 간이정신진단검사(SCR-90-R)를 한 결과, 정신질환이 의심돼 전문의의 진료가 필요한 ‘질환의심군’이 전체의 18.3%였다. 이는 일반인구집단(2.5%)에 비해 7.3배 높은 것이다. 또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어 관리가 필요한 ‘관리대상군’은 35.0%로 일반인구집단(16%)에 비해 2.2배 많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앓고 있는 증상은 우울·강박증·적대감·신체화(신체적 기능 이상) 순으로 많았다. 우울 증상으로는 “매사에 걱정이 많다”(전체의 96.6%), “기운이 없고 침체된 느낌이다”(89.9%) 등을 호소한 이들이 많았고, 특히 조사 대상의 35.9%가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답했다.

강박증으로는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안 되고 막히는 기분이다”(93.1%)고 응답한 노동자들이 많았다. 또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난다”(95.8%), “걷잡을 수 없이 울화가 터진다”(76.5%) 등 적대감 증상을 호소한 이들도 많았다.

노조별로 보면, 이랜드일반노조의 경우, 우울과 적대감을 증상을 보인 조합원들이 많았다. 김경욱 위원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현재 세 가지 증상을 느끼고 있다. 홈에버 매장을 지날 때마다, 유리창을 다 박살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그런 장비들을 구입했다. 주위 사람들한테 화를 많이 낸다. 오래 같이 투쟁한 이들에게 그만두라고 한다. 또한 3일마다 원룸에 있는 가구들의 위치를 바꾸느라 밤을 샌다. 마지막으로 오전에 있었던 기억을 못할 정도로 기억력이 급속도로 감퇴되고 있다.”

“참담하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고통이 덜할 텐데”

조사 결과,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대인예민성(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불편감 및 열등감), 신체화, 강박증 증상을 많이 호소했다.

정인열 증권노조 코스콤 비정규지부 부지부장은 “대인 예민성이 높게 나온 것은 우리가 노숙농성 하고 있는 곳이 와이셔츠에 넥타이 매고 정장 입는 노동자들이 많은 여의도 증권가 앞이라 그런 것 같다, 그들의 시선에 많이 예민하다”고 밝혔다.

정 지부장은 이어 “329일째 농성을 하고 있는데, 그 곳은 쥐들과 친구가 되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곳이다, 또한 어깨를 움츠려야 누울 수 있는 매우 좁은 곳이기도 하다, 비라도 오면 물이 새서 잠을 제대로 못 잔다, 너무 참담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침에 1000원짜리 김밥 먹고, 점심엔 밑반찬 몇 개로 배식 받는다, 그리고 저녁엔 3000원짜리 밥을 먹는데, 요즘 3000원짜리 밥이 어디 있나? 다들 영양상태가 안 좋다”며 “또 경찰과 용역 폭력이 일상이라 안 다친 조합원이 없다”고 전했다.

그는 “30만~50만원으로 1년 버텼는데, 이혼당한 조합원에 부모님 간병 포기한 사람도 있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겨우 눈물을 추스른 그는 “갑자기 화를 내고, 저처럼 갑자기 눈물이 나요, 이길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고통이 덜할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많은 조합원들이 강박증과 우울 증상을 보인 철도노조 KTX 승무지부의 오미선 대표는 “대학 4년을 갓 졸업하고 이 곳에 취업한 조합원들에게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주는 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고 밝혔다.

그는 “지금 서울역에서 농성하는데 행여 친구들이나 친척들을 만날까봐 힘들고 수치심이 든다, 또 우리를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며 “내가 ‘속상하고 창피하다’는 부모님에게 몹쓸 짓하는 것 같아 힘들다”고 담담하게 전했다. 그는 많이 아프단다.

“위염에 가끔 심한 두통이 난다. 잠을 자다가 혼자 분에 못 이겨서 눈물 흘리기도 하고, 샤워하면서도 그렇다. 화를 내고 울 장소가 필요한데, 그렇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 문제 해결 위해 사회적 해법 필요

이날 자리를 함께 한 전문가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한 것은 개인적 요인이 아니라, 사회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며 “이들의 건강 수준과 삶의 질 저하를 막기 위해 사회적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상윤 사무국장은 “이번 결과로 이상한 사람이니까 끈질기게 투쟁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그런 상황에 처하면 나올 수 있는 정상적인 반응”이라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증상은) 극한 상황에 처한 것과 같은 심각한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또 그는 “단식을 하고 있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사하지 못했다, 단식 56일째인 이들에게 정신건강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들은 진짜 죽음을 각오한 것 같다, 사회적 해법이 필요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2008.08.05 21:13 ⓒ 2008 Oh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