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 위에 선 비정규직 정신건강
해고와 장기농성으로 분노·우울증·대인기피 증상 높아
매일노동뉴스 김미영 기자
김경욱 이랜드일반노조 위원장은 3주전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김 위원장은 이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혹여나 사용자에게 ‘정신적으로 문제있는 노조위원장’이라고 빌미를 줄까봐 동료들은 만류했다. 하지만 300일, 1천일을 비닐천막 안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비정규노동자에게 정신과 치료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입을 열었다. 5일 노동건강연대 주최로 열린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 노동자 정신건강 실태조사 결과 발표회’ 자리에서다.
김경욱 위원장은 병원에서 폭발장애와 우울증상 진단을 받았다. 그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 지경에 이른 것이 개인적인 성격 탓도 있겠지만, 불확실한 전망·수십명의 해고와 수배 및 구속·수백억에 달하는 손해배상가압류 등을 감당하기에 벅찬 것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한다. “노조위원장이니까 책임져야한다는 사명감으로 버티다 보니 아이들한테도 폭력적인 아빠로 비춰지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35%가 정신질환 의심
비단 김경욱 위원장만의 문제는 아니다. 노동건강연대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300일 이상 투쟁중인 이랜드일반노조·KTX와 새마을호 여승무원·코스콤비정규직지부 조합원 120명을 상대로 정신건강 실태를 조사했다. 그 결과 35%가 정신건강에 대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또 18.3%는 즉시 정신과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사무국장(산업의학의)은 “일반인구집단보다 무려 7.3배나 높은 수치”라며 “서울역 노숙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보다도 결과가 심각했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증상을 보면 10명 중 6명에게 △기분이 울적하다 △허무한 느낌이 든다는 우울증상이 나타났다. ‘죽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응답도 35.9%나 나왔다.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안되고 막히는 기분이다 △쓸데없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강박증도 56.3%에 달했다. 자신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울화가 터진다는 적대감 55.9%, 신체화 (정신적 스트레스가 유발하는 신체적 불편감. 실제 질환이 없어도 만성적 고통을 호소)증상도 55.8%나 됐다.
최악의 경우 ‘인간성 말살’…정신질환 원인 해소돼야
이날 토론회에서 이영문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는 “아직도 우리 주위에서 정신질환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어 비정규직 정신건강 조사결과가 악용될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러나 이들이 최악의 상황에 이르기 전에 이 문제를 꺼내놓고 사회적 해결책을 찾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보면 사회계층 간의 갈등·빈곤·직접적인 스트레스·상실의 문제는 정신질환 발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번 조사대상자들에게는 4가지 문제를 모두 갖고 있습니다. 정신질환은 ‘상태’의 개념이기 때문에 회복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치료를 하는데 만성적인 스트레스가 계속 지속된다면, 즉 정신건강을 헤치는 직접적인 원인이 사라지지 않는 한 완쾌는 불가능합니다.”
이 교수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사소한 일에 대한 분노와 우울증상·무력감·수치심 등이 발전해서 무감각·무반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날카로운 것에 찔려도 반응이 없는 상태, 슬퍼도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악화돼 끝내는 인간성이 말살될 수도 있다. 장기간 투쟁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도 회복이 안 될 가능성이 높다.
이 교수는 “약물치료같은 정신과 치료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장기농성 중인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 사회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조사는 정신과 영역에서 타당성이 입증된 Symptom checklist-90-revision, SCL-90-R)을 도구로 사용했다.
사업장마다 정신질환 증상은 제각각
비정규 노동자 정신건강 실태조사에서 이랜드·코스콤·KTX 새마을호 여승무원들의 정신증상은 조금씩 차이를 보였다. 40대 여성이 많은 이랜드일반노조의 경우 상대적으로 정신건강 상태는 양호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다른 사업장에 비해 가장 높았지만 관리대상군 31.9%, 질환의심군 14.9%으로 나타났다. 주로 30대 기혼과 20대 미혼 남성들로 구성된 코스콤비정규직지부(41.5%, 19.5%)보다는 건강했다. 코스콤 비정규직은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투쟁 결과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가 강했다. 반면 20대 미혼 여성들인 KTX승무원은 경제적 어려움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상급단체에 대한 불만영역에서 스트레스 반응이 높았다.
증상별로는 이랜드일반노조의 경우 적대감과 우울·불안이 많았다. 코스콤비정규직지부는 대인예민성과 신체화·편집증상이 두드러졌다. 여승무원지부는 우울증과 강박증상이 많았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사무국장은 “이랜드일반노조의 경우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삶의 활력이 많이 저하된 상태로 보이고, 코스콤비정규직지부는 장기간 노숙생활로 대인예민성이 높아진 것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KTX새마을호 여승무원지부의 경우 우울이나 불안 같은 전형적인 스트레스반응이 많았고 투쟁승리에 대한 강박증상이 눈에 띄게 높았다고 설명했다. 조사대상자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3년) 투쟁을 하고 있는 여승무원들은 즉시 정신과진료가 필요한 질환의심군 비율이 21.9%로 가장 높았다.
한편 이영문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는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의 경우 기혼자가 많고 고령인 점 때문에 스트레스에 대해 상대적으로 강한 것으로 분석된다”며 “결혼이 만성적 스트레스의 방어벽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