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취약계층 X파일
‘알바생’이 아니라 ‘노동자’라구요
생애 첫 노동이 남긴 흔적, 아르바이트 청소년의 노동인권 실태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하루에 열두 시간 이상씩 일한 것 같아요. 물론 제가 원한 것은 아니죠. 금요일까지 일하고 토요일도 2시인가 출근해서 새벽 1~2시까지 일해야 했으니까. 주유소라는 곳이 진짜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해요. 일한 만큼 돈을 준다면 한 달에 200만원은 줘야 돼요.”
“뜨거운 불판을 떨어뜨려 손을 뎄어요. 근데 비싼 거 그랬다고 ‘야! 너 오늘 알바비 없다’ 그래요. 너무 서럽잖아요. 손도 다치고 돈도 못 받고….”
2003년 노동부 표본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소년 다섯 명 중 한 명은 아르바이트 경험을 갖고 있다. 엄마·아빠 돈 버느라 고생하는데 용돈 달라고 손 내밀기가 너무 죄송해서, 눈치 안 보고 사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 공부하는 데도 돈 드니까 차비라도 벌어서 보태려고, 독립 자금 모으느라고….
성인들이 품을 팔러 나오는 사연이 다양하듯, 10대들이 노동시장에 나오는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일하는 곳도 더 다양해지고 있다. 생애 첫 노동, 아르바이트 현장에 나선 10대들은 무얼 경험하고 있을까. 품을 팔면서도 노동자보다는 ‘알바생’으로 주로 불리는 청소년 노동자들. 그들의 몸과 마음엔 어떤 흔적이 아로새겨질까.
부리기 쉬운 헐값 노동력, 청소년
많은 청소년들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초저임 상태에서 일을 한다. 13살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6년째 온갖 일을 다 해 본 세현이는 지금까지 한 번도 최저임금을 받아본 일이 없다고 한다. 지금 일하는 편의점에서 받는 시급도 3천원. 청소년 노동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대표적 사업장인 신림동 순대촌의 경우는 더 열악하다. 첫 시급이 2천원에서 2천500원 정도. 얼마마다 몇 백원씩 올려 줄지는 업주들 마음대로다.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 아르바이트 경험이 있는 청소년 1천458명에게 물어보니 52.3%가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한 채 일한다고 답했다. 그 중 4분의 1 정도는 야간노동 경험을 가졌는데, 야간에 일하고서도 초과수당을 받지 못한 청소년이 다시 절반을 넘어선다.
“최저임금이 3천770원이면 지금 시급이 3천원이니까 하루 다섯 시간 일한다고 치면 한 시간은 공짜로 부려먹고 착취를 하고 있는 건데…. 너무 화가 나요. 내 한 시간 시급은 어디로 간 거지?”
업주들이 청소년을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청소년들이 최저임금제도도 잘 모를뿐더러 적은 임금을 주고서도 막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은 단가 안 맞아서 안 쓴다’는 한 업주의 말은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필요한 시간만큼 이 일 저 일 함부로 시켜도 괜찮고, 실수를 했거나 중간에 일을 그만뒀다는 이유로 임금을 떼먹어도 별다른 항의가 돌아오지 않는다. 일하는 게 맘에 들지 않으면 윽박지르고 때리기도 한다. 자기가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직원을 쪼면 그 직원이 다시 아르바이트 청소년의 군기를 잡는 중층 규율 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청소년들 쓰면 아르바이트 시간도 잘 안 지키고 중간에 쉽게 그만둔다고 업주들은 엄살을 피우지만, 실제로는 규율을 잡기 위한 다양한 불법장치들이 가동되고 있다. 아르바이트 시간에 늦거나 일하기로 한 시간을 바꾸면 시급의 수십 배에 달하는 벌금을 매기는 곳도 있다. 옷이 지저분하거나 실수를 했을 때 벌점을 매겨 두었다가 한 시간씩 무급으로 일을 하도록 아예 규칙을 정해놓기도 한다. 일을 시작할 때 몇 개월 이상 일하고 후임을 구할 때까진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요구하는 업주도 있다.
아찔한 ‘컨베이어벨트’ 노동, 흔들리는 건강
장시간 중노동은 청소년의 일자리도 비켜가지 않는다. 이번 조사에 따르면 학기 중 평일에 4시간 이상 일하는 청소년이 70% 가까이 이르렀고 6시간 이상 일한다는 청소년도 30%에 육박했다. 수업이 끝나고 밤늦게까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일하다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가는 이들이 이처럼 많다. 아르바이트에 나서는 청소년 수가 확 불어나는 방학기간에는 아침 일찍부터 중노동이 시작된다. 청소년들도 워낙 시급이 낮기 때문에 ‘이왕 돈 벌러 나선 김에…’라는 생각으로 장시간 노동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하루 노동시간을 7시간, 연장할 경우에도 최대 8시간으로 제한하는 근로기준법은 현실에서 발을 디딜 틈이 없다. 화장실 가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하고, 밥 먹는 시간 30분이 유일하게 앉아있을 수 있는 시간이다 보니 만성 피로와 근육통에 시달리는 이들도 많다.
“아침 9시부터 일해서 밤 10시까지. 아침에 가면 캘리포니아 롤을 계속 만들어야 해요. 수십 개나. 팥빙수도 계속 만들고 만두 계속 찌고 손님들이 심부름 시키면 갖다 주고…. 부엌에서도 일하고 홀 서빙도 하고…. 진짜 다리 아팠어요. 힘들었어요. 손님이 진짜 많았어요.”
일을 빨리 처리하라는 재촉을 계속 받다보니 몸을 돌볼 여유도 없어지고 그만큼 재해 위험도 높아진다. 노동환경이 건강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미리 알려주고 조심하라고 얘기하는 건 고사하고, 청소년이 알아서 보호장비를 착용하는 것마저 금지하는 경우가 있다. 업주들에겐 일하는 청소년의 건강보다 일의 속도와 고객 서비스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특히 주유소에서 일한 청소년들은 두통이나 피부 질환에 시달린 경험을 대다수 갖고 있다. 패스트푸드 주방이나 뜨거운 음식이나 조리 기구를 날라야 하는 음식점에서는 화상의 위험이 높다.
“일 끝나고 나서 코를 풀면 휴지가 까매요. 좀 지나고 나면 후유증이 생겨요. 그거랑 비슷한 냄새 맡으면 뒷골이 쫙 당겨요. 휘발유 흘려갖고 신발에 들어가고 그러니까…. 일 끝날 때쯤 내 발톱에 기형이 온 걸 알았어요. 기름이 사람 몸에 진짜 독해요. 냄새가 워낙 심해서 마스크를 써도 되냐고 물어봤는데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원래 장갑을 끼고 주유를 하는 건데 안 쓰고 일할 때가 더 많았어요. 바쁠 때는 그냥 맨손으로 하는 거예요. 일 끝나고 가면요 여기(손등을 가리키며)가 다 벗겨져요.”
특히 청소녀는 여성노동자들에게 가장 일반적인 산업재해라 볼 수 있는 성폭력 위험에도 노출되어 있다. 서비스 산업에서 10대 여성을 주로 고용하는 이유는 그녀들의 성적 매력 때문인데, 한발 더 나아가 업주나 남성 직원에 의해 직접적인 성희롱이 일어나기도 한다. 생애 처음으로 고용관계에 놓이고 노동강도로 정신적 압박도 심한 상태에서 경험하게 되는 수치심과 모멸감은 청소녀의 자아상에 큰 생채기를 내지 않을 수 없다.
학교에서 노동인권의 기본 가르쳐야
청소년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노동조건을 보장받으면서 일할 수 있으려면, 먼저 청소년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바로세울 필요가 있다. 공부해야 할 나이에 왜 굳이 일을 해서 괜한 매를 버느냐는 시각, 나이도 어린데 성인들과 똑같은 임금을 받는 건 좀 그렇지 않느냐는 시각, 청소년들의 노동은 온전한 게 아니라 보조적인 것이라는 시각 등은 초저임 구조 아래 비틀거리는 청소년들의 노동 현실을 둔감하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인식 장벽이 되고 있다. 더 이상 아르바이트 청소년을 ‘알바생’이 아닌 ‘노동자’로 바로 보면서 노동인권의 일반 원칙을 청소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도록 요구해 나가야 한다.
근로감독 강화를 비롯해 청소년 고용 사업장의 상습적인 법 위반 행위를 중단시킬 수 있는 실질 대책도 마련돼야 한다. 노동부는 방학기간 동안 청소년 고용 사업장의 지도·점검에 나서지만, 대상 사업장이 워낙 제한적인데다 실제 근로감독 절차가 당사자와의 면담 조사도 없는 형식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법 위반이 드러나더라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 지도·점검시 근로기준법 위반 사항뿐 아니라 성폭력이나 노동안전 점검 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물론이다. 청소년들이 주로 소규모 사업장에 고용된 만큼 근로기준법을 5인 미만 사업장까지 전면 확대하는 일도 시급하다.
최저임금 액수를 포함하여 실제 청소년이 누려야 할 기본 노동인권 내용을 사업장에 직접 배포, 게시하도록 하거나 학교현장에서 교육하는 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프랑스처럼 지역별 청소년 노동 모니터 기구를 구성하여 노동부 근로감독의 한계를 보완하는 한편 청소년 노동인권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는 과제를 지속적으로 찾아내게끔 하는 일은 어떨까.
이 많은 과제를 단시간 내에 달성하기란 쉽지 않다.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는 실태 보고를 계기로 불붙은 관심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도록 노동부와 교육부‧국가인권위 등 관련기관들이 적극적 역할을 할 수 있게끔 견인하는 한편 그 무엇보다 청소년 당사자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반을 닦아나가고자 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싼 값으로 부림당하는 이들의 존엄을 위하여 다른 사회운동의 적극적인 관심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