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간 일해야 한다’는 통념을 버려
일과 가족생활 양립…영국의 직장문화 개선사례
[여성주의 저널 일다] 조이여울
한국의 직장문화는 야근이 일상화되어 있으며, 평균 근무시간도 OECD가입국 31개 국가 중 가장 높다. 장시간 일하는 노동환경은 특히 간병이나 양육, 가사일을 병행해야 하는 직장인들에게 힘든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그 중 다수가 여성들이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한국을 방문한 영국의 미들섹스대학 수잔 루이스 교수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신봉하고 있는 ‘종일 일해야 한다’는 생각, 또한 ‘장시간 근로해야 이상적인 노동자다’라는 믿음을 깨야 한다고 제언했다.
루이스씨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 달 25~26일, “일과 가족의 양립”을 주제로 각국의 정책을 소개하고 논의하기 위해 마련한 국제학술심포지엄 자리에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사람들이 일과 가족생활을 양립할 수 있으려면 정부의 정책과 기금이 “필수적”이지만, 체계적인 변화를 위해선 모든 노동자가 포함되는 참여적인 접근방식과 경영진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수잔 루이스씨는 “이상적인 근로자는 장시간 일하고 육아를 위해 업무를 중단하지 않는다”라는 기존의 신념들을 변화시킴으로써 노동자와 경영진, 그리고 고객들의 만족을 함께 높인 몇몇 기업들의 사례를 소개했다.
상사에게 보여주기 위해 장시간 근무하는 ‘비효율적’ 문화
▲ 비효율적인 야근문화와 ‘장시간 일해야 한다’는 이상적 노동자 상(像)이 변해야 한다. © 박희정
공인회계 회사인 프로팜(Proffirm)은 젊은 직원들의 이직을 막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발전시킨 사례로 꼽힌다. ‘훌륭한 전문직 노동자라면 장시간의 주어진 노동시간에 업무를 할 수 있어야 하며, 가족이나 다른 의무들이 회사업무를 방해하도록 해선 안 된다’는 인식에서 변화를 꾀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과정에서, 기존의 직장문화 속에 ‘상사에게 보여주기 위해 장시간 근무하는 문화’가 존재하며 특별한 일없이 퇴근을 늦추는 현상이 발견됐다는 점이다. 또 어떤 이들은 짧은 시간 일하더라도 효율적으로 일하고, 어떤 이들은 장시간 일할 필요가 없는데도 비효율적으로 시간을 사용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장시간 근무하는 문화, 사생활을 희생해야만 훌륭한 노동자로 인정받는 직장문화는 국가가 정책적으로 추진하는 ‘일과 가족생활 양립지원’ 효과를 저해하는 업무관행이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이들, 특히 젊은 여성들이 계속해서 직장을 떠나고 있었다. 프로팜(Proffirm)은 노동시간과 효율성에 대한 기존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이를 변화시켜나감으로써, 직원과 고객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보다 효율적인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직원들이 다양한 업무 배우고 업무시간 조정해
보다 개혁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을 택한 곳은 프린트코(Printco)라는 회사로, 프린트 관련 사업을 하는 중소기업이다. 10년 연속 적자를 겪은 이 회사는 살아남기 위해 변화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회사 내 모든 직원들이 참여하고 협력하는 방안이었다.
회사의 경영진은 현재 경영상태와 변화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고, 직원들은 자신의 업무에 대해 이야기하고 일반적인 생활에 대해서도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프린트코(Printco)는 직원들이 다양한 업무를 소화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도록 장려했고, 누군가 잠시 업무를 떠난 사이에 동료가 그 업무를 대신할 수 있게 했다.
또한 다양한 업무 패턴을 발전시켰는데 지금까지 잘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압축업무주간, 학교방학시즌 휴무, 재택근무와 다양한 방식의 시간제근무, 점심시간 연장 등이 그것이다.
직원들은 입사 면접 때부터 자신들에게 필요한 근무형식을 이야기하고, 업무시간을 조정하기 원하는 직원들은 직접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안하고 동료와 논의할 수 있도록 장려 받았다. 중요한 것은, 탄력근무를 요청할 수 있는 이유는 비단 가족문제에 한정되지 않으며, 또한 보육을 위해서 여성노동자만이 탄력근무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방식은 직원들의 소속감을 더 높였고, 직원들은 이전보다 평등하다고 느꼈으며, 서로 협력하는 문화가 만들어졌다. 일에 대한 고정관념에 얽매여있기보다는 창조적인 사고를 이끌어냈으며, 회사는 재정문제에서 벗어나 엄청난 이익을 낼 수 있었다.
인간다운 삶과 노동하는 삶의 조화…노사 모두의 노력필요
이들 회사의 사례는 경직된 직장문화를 가진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 크다.
정부가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일과 가족의 양립’을 지원하는 정책을 내놓고는 있지만 아주 미미한 단계에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출산과 직장일과의 사이에서 큰 갈등을 겪고 있다.
20여 년간이나 국가적으로 일과 가족 양립 지원정책을 펴온 영국에서도 아직 변화를 끌어내기엔 역부족이며 성별분업을 깨기도 어렵다고 평가하는 수잔 루이스 교수는, 실제 노동현장에서 “지속 가능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이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다운 삶과 노동하는 삶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선 노사 모두가 적극적으로 직장문화를 바꾸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