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3천볼트 고압선 만지는 ‘전력예술가’
추락·감전·날씨와 싸우는 전기원 노동자…언제 사고 날지 몰라 가족애 남달라
매일노동뉴스 조현미 기자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온몸의 털이 ‘쭈뼛’ 선다는 2만2천900볼트의 고압선이 흐르는 14미터 상공.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엔 그늘 한 점 없고, 한겨울엔 칼바람을 피할 수 없는 전봇대.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심 한가운데부터 인적 드문 산골 오지까지…. 모두가 전기원 노동자들의 일터다.
14미터 상공에서 볼트 하나라도 떨어질까,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찰나에 추락하기도 하고, 고압전류에 감전되는 대형사고까지 발생한다. 때문에 전기원 노동자들은 이른바 ‘뺀찌(펜치)’를 드는 순간부터 긴장의 연속이다.
30년 간 전선을 만진 베테랑도 언제 어디서 무슨 사고를 당할지 모른다. 50미터 간격으로 늘어서 있는 전국의 전봇대치고 이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 ‘살아있는 전선’을 만지는 그들은 스스로를 ‘일렉트로닉 파워 아티스트'(전력예술가)라고 부른다. 가 지난 19일 전기원 노동자들을 동행취재했다.
전봇대마다 고유 명찰 있어
“현장에 일찍 도착해 자는 한이 있어도 아침 일찍 출발해요. 차가 밀려 늦게 도착하면 큰일이죠.”
오전 6시30분. 건설노조 인천건설지부 전기분과 조합원들이 인천시 부평구 부개2동 주택가에 자리 잡은 조합 사무실에 모였다. 함께 차를 타고 현장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다. 1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곳은 인천 서구의 한 기계 임대업체.
이곳에서 ‘절연버킷 트럭’을 몰고 다시 김포현장으로 가야 한다. 절연버킷 트럭은 전기원 노동자들이 전봇대에서 작업을 하기 위해 타고 올라가는 필수장비다. 30분을 달리니 노랗게 익은 벼가 보인다. 한쪽엔 공장 건물을 짓는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비포장 길이 시작되면서 먼지가 뿌옇게 날렸다. 골목길에 들어서자 거무튀튀한 전봇대와 말끔한 전봇대가 나란히 서 있다.
“신도시가 들어설 예정이라 전기가 많이 모자랍니다. 전봇대를 교체하면서 전선을 늘리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석원희(42) 건설노조 인천건설지부 전기분과장의 말이다.
그런데 이런 시골 길에서 어떻게 현장을 일일이 찾아갈까.
“전봇대에도 주소가 있다는 사실 모르셨죠? 전봇대마다 고유 명찰이 있어요. 전기원 노동자들은 길에 전봇대가 없으면 불안해 해요.”
그러고보니 전봇대마다 ‘양촌 26’ 이런 식으로 명찰이 달려 있다.
‘땅 파기’부터 시작되는 장주작업
전선은 없고 전봇대만 덩그러니 세워진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허전한 것이, 뭔가 홀딱 벗은 느낌이다.
“농사짓는 게 싫어 전기일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처음에 삽질부터 시키더라고요.”
전봇대를 세우려면 우선 땅을 파야 한다. 보통 전봇대의 6분의 1을 땅에 묻는다. 새 전봇대를 심으면 헌 전봇대는 뽑아내야 하는 법. 이때 ‘오가 크레인’이라는 장비를 사용한다. 땅을 파는 기초작업을 잘해야 다음 공정을 배울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30년차 베테랑 이상철(46)씨가 14미터 전봇대 꼭대기에 매달려 있다. 안전장치라곤, 안전허리띠와 안전모가 유일하다. 전봇대에 꼽는 20여개의 발판 볼트와 장비주머니를 허리에 감고 볼트를 하나씩 끼우면서 위로 올라간다. 발판 볼트를 다 꼽으면 14미터 상공에 철구조물을 설치해야 한다.
그런데 개당 무게가 자그마치 17킬로그램이다. 이걸 14미터 높이에서 끌어올린다. 순간적으로 엄청난 힘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작업량이 많은 날엔 한 사람이 최대 3톤 정도의 철구조물을 끌어올려야 한다. 구조물을 설치하면서 볼트를 조일 때마다 힘을 쓰느라 이상철씨의 몸이 한쪽으로 쏠린다. 그때마다 전봇대가 한쪽으로 휘청한다. 손에 땀이 나는 순간이다. 밑에선 팀의 막내 이용노(25)씨가 보조를 맞추고 있다. 밑에서 4~5년은 일을 배워야 비로소 전봇대에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전봇대를 세우는 ‘장주’ 현장엔 항상 추락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위에서 떨어지면 착지를 잘한다 해도 무릎이 갈비뼈를 쳐 폐를 관통하게 돼요. 아스팔트 위에서 하는 작업이 대부분이라 충격이 심하죠.”
‘살아있는 전기’를 만지는 활선작업
오전 10시45분. 전봇대의 명찰을 보고 30분 남짓 달려 활선작업 현장에 도착했다. ‘살아있는 전기’를 만지는 고난이도 기술이 필요한 곳이다. 현장마다 7~8명이 한 팀을 이뤄 일을 하고 있다. 한쪽 차선이 막힌 상태라 길 양쪽에서 신호수들이 차량의 흐름을 통제하고 있다. 현장을 관리하는 업체 소장과 감리사가 취재진을 바라보는 눈이 매섭다. 자칫 노동자들의 주의가 흐트러지면, 곧바로 사고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기존의 전봇대에서 새 전봇대로 전선을 옮겨 가설하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14미터 전봇대를 16미터짜리로 교체하면서 전선도 증설하고 있어요.”
모두 5대의 절연버킷 트럭에 나눠 탄 노동자들이 절연고무장갑을 끼고, 양쪽 어깨부터 팔을 감싸는 절연복을 입고 있다. 전봇대에는 맨 위에 낙뢰를 방지하는 선과 2만2천900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굵은 고압선, 220볼트 또는 380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저압선이 차례차례 연결돼 있다. 그 밑에 있는 굵직한 선은 케이블선이다.
전기원 노동자들이 버킷을 직접 조종하면서 9개가 넘는 전선 사이사이를 올라가는 모습이 아슬아슬하다. 전선에 닿는 순간 바로 사고다. 버킷에 들어가보니 밑바닥이 푹신한 고무로 돼 있다. 앞쪽에 조종장치가 있고 안쪽에 온갖 장비들이 걸려 있다. 성인 허리 높이의 버킷에는 최대 두 사람까지 들어갈 수 있다.
“계속 서서 작업을 하다보니 허리에 무리가 많이 가거든요. 그래서 바닥이 고무재질로 돼 있어야 해요.”
전기원 노동자들이 끼는 고무로 된 안전장갑은 보기에도 묵직해보였다. 작업하는 것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손가락 부분이 굵다.
“이걸 끼고 작은 볼트까지 조여야 합니다. 고무재질이라 여름엔 너무 뜨거워 장갑을 끼고 손을 들면 물이 쏟아지기도 하죠. 한겨울엔 손끝이 끊어질 것처럼 아려요.”
겨울엔 손가락이 너무 시려 목장갑을 세 켤레정도 끼고 작업을 한다. 그래도 대부분 동상 때문에 고생한다.
활선작업은 자격증을 보유한 숙련공만이 할 수 있다. 전기일을 시작한지 적어도 12~14년은 돼야 전류가 흐르는 전선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
“기술은 계속 진화하잖아요. 항상 처음부터 다시 배운다는 마음으로 일을 해요.”
전기원이 된지 18년 됐다는 황기만(42)씨는 “경력이 많아도 작업할 때 긴장되는 것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선글라스도 플라스틱 재질만 가능
석원희 분과장이 현장관리자에게 휴식시간을 요청했다.
“전원 일시 작업 중단하시고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전봇대 아래에 있는 작업자와 상공에서 일하는 작업자가 무전기로 얘기를 주고받는다. 아래로 내려온 노동자들을 둘러보니 모두가 시계 하나 착용하지 않았다.
“몸에 감는 물체는 위험해요. 선글라스도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만 껴야 합니다.”
금속재질인 반지·목걸이·시계 등을 착용하는 것은 특히 피해야 한다. 전선 주위에 유도 전류가 흐르기 때문이다.
활선작업 현장에선 현장 관리자와 작업자 모두 신경을 곤두세운다. 잠시 딴 생각이라도 했다간 대형사고를 막기 힘들다. 전선을 잡고 있을 때는 옆에 있는 동료와 몸이 닿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전선을 잡고 있을 때 서로 성질이 다른 것이 부딪히면 전기가 발생한다.
“다치는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2만2천900볼트가 사람 몸에 흐른다고 생각해보세요. 바로 터지는 겁니다.”
때문에 전기원 노동자들은 육체적 스트레스 못지않게 정신적 스트레스와도 싸워야 한다.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그만큼 비용이 늘기 때문에 협력업체도 안전사고 방지를 위해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러던 중, 강규현(62) 현장감리사가 기자일행에게 다가와 철수를 요청했다.
“이제 그만 가주셨으면 합니다. 위에서 작업하는 노동자들이 아래서 누가 쳐다보는 것을 계속 의식하다보면 작업에 집중하기 힘듭니다.”
오전 피로 풀어주는 낮잠은 ‘꿀맛’
오전 11시50분. 노동자들이 가장 기다리는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나절 동안 햇볕 아래서 작업을 하다보면 어느새 안전화에는 질퍽할 정도로 땀이 찬다.
“한 여름엔 1.8리터 물병 5병을 비워도 모자라요. 작업하고 내려오면 옷을 빨래하듯 짭니다. 물이 쏟아지죠.”
오전 작업만으로도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한여름엔 탈진을 방지하기 위해 정제염(소금)을 입에 털어넣기도 한단다.
점심은 근처 식당에서 해결한다. 이날 메뉴는 멧돼지 고기 김치찌개. 식사를 마치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휴식시간이다. 마침 식당 주변에 그늘막이 쳐진 평상이 있었다. 이마저도 없을 땐 버킷 트럭 아래든 나무 아래든 그늘을 찾아 잠을 잔다. 땡볕에서 하루종일 작업을 하다보면 일하는 도중 쓰러지는 작업자가 적지 않다. 전기원 노동자들에게 휴식시간은 안전을 위해서라도 필수다.
지난해 파업 이후 인천지역 전기원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 노동을 하고 있다. 오전 8시에 작업을 시작해 오후 6시에 작업을 마친다. 낮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점심과 휴식시간이다.
팀워크 중요한 ‘전선연결’ 현장
오후 2시. 오침 시간이 끝나고 찾아간 곳은 전선을 연결하는 현장이다. 새로 설치한 전봇대에 고압선을 연결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다른 공정에 비해 팀워크가 중요한 작업이다.
세 명의 노동자가 각자 버킷 트럭을 타고 전봇대(A·B·C)에 올라가 있었다. 규정상 전선이 바닥에 끌리지 않게 작업해야 한다. A전봇대에 올라간 작업자가 오른편 바닥으로 루프를 던진다. B전봇대 위에 있는 노동자가 다시 왼편으로 루프를 던지면 아래 작업자가 두 개를 연결한다.
이런식으로 루프가 C전봇대 위의 노동자에게까지 전달된다.(A→B→C) C전봇대의 오른쪽에는 고압선(ACSR AW-OC 160㎟·알루미늄 피복강심 절연전선)을 감은 드럼을 실은 트럭이 대기 중이다. 루프를 전달받아 고압선에 연결하고 다시 C→B→A로 고압선을 이동시켜 연결한다. 세 명의 작업자는 트럭 위에서 전선이 땅에 끌리지 않게 드럼의 속도를 조절한다.
“동료가 다른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제가 이어서 해야 할 작업을 준비합니다. 서로 손짓만 해도 어떤 의미인지 다 알아요. 믿음이 없으면 함께 작업하기 힘들죠.”
전선연결작업에서 필요한 것이 또 있다. 바로 ‘예술적 감각’이다.
“전선 사이사이를 일정하게 맞추는 것도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전선을 어떻게 매듭짓느냐에 따라 보기에도 다르죠. 우리끼리 ‘일레스트릭 파워 아티스트’라고 부릅니다.”
길을 가다 유심히 전봇대를 살펴보면 전선들이 제각각 다른 모양으로 매듭지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길거리의 모든 전봇대와 전선은 전기원 노동자들의 ‘작품’인 셈이다.
고객·사업주 만족시켜야 하는 ‘서비스직’
노동력을 제공하는 전기일은 서비스직이기도 하다. 계약기간 동안 사업주를 만족시켜야 재계약이 가능하다. 특히 일용직은 어느 파트에서든 작업을 능숙하게 소화할 수 있도록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요즘 특별히 강조되는 것이 또 있다. 바로 ‘고객 서비스’다. 작업 특성상 길을 막고 일을 하다보니 가끔 지나가는 주민들이 불만을 나타내기도 한다. ‘집값 떨어진다’며 자기집 바로 앞에 전봇대를 세우는 것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적지 않다.
“예전엔 ‘전기 나가요~’ 한번 외치고 작업했죠. 그런데 요즘은 ‘한전의 어느 협력업체에서 일하는 아무개입니다’라고 정식으로 얘기를 합니다. 이 전봇대는 여기 세워야만 고객님 댁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고 양해를 구하기도 하고요.”
자칫 불친절한 모습을 보였다간 바로 인터넷에 불만이 접수된다. 이미호(37)씨는 주민들에게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가끔 전선작업을 하고 있는데 바로 아래로 무심코 지나가는 주민들이 있어요. 작은 볼트 하나라도 14미터 상공에서 떨어지면 큰 사고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작업 중엔 조금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어요.”
직업 특성상 자연스럽게 봉사까지
이날은 세 번째 찾아간 팀이 가장 먼저 작업을 종료했다. 버킷 트럭을 주차하기 위해 다시 인천의 기계 임대업체로 돌아왔다. 평소보다 빠른 오후 5시30분쯤 차량 3대가 들어왔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피로감과 함께 안도감이 밀려온다.
“사고 없이 무사히 끝나는 게 최고로 좋죠. 하루 일당을 벌어서 뿌듯하기도 하고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씻고 저녁 먹을 때까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어요.”
계약기간이라도 매일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날그날 작업에 필요한 인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돈이 급하게 필요했던 94년에 전기일을 시작했다는 홍복기(39)씨는 “전기일은 매력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사실 흔한 직업은 아니잖아요.”
예상외로 대답은 간단했다. 가끔 전기원과 전기검침원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기검침원은 직접 가정이나 업소를 방문해 전력사용량을 검침하고 계량기의 가동상태를 확인하는 일을 하는 노동자를 말한다. 반면에 전기원들은 전봇대 설치와 보수작업을 담당한다.
종종 전기분과에는 장기투쟁 사업장 노조에서 전화가 걸려온다. 전기를 수리해달라는 요청이다.
“웬만한 장투 사업장치고 우리들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을 거예요.”
전기원 노동자들은 군부대와 섬, 심지어 휴전선 안 비무장지대까지 전국이 일터다. 인적이 드문 산골오지 마을에선 이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한번은 시골에 할머니 혼자 사시는 집에 갔는데 부엌이 컴컴하더라고요. 전구가 나갔는데 전기가 무서워서 전구를 못 바꾸신 거예요.”
전구를 교체해준 것만으로 할머니는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이런 시골마을에 가면 전기 콘센트에서 마을 가로등까지 이것저것 고쳐달라는 요청이 많다. ‘자연스럽게’ 봉사할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업체에서 요구하는 작업량 때문에 일일이 다 손봐줄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14미터 상공에서 2만2천900볼트의 고압선을 만지는 전기원 노동자. 그래서인지 그들은 가족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항상 높은 곳에 올라가 고압선을 만지는 위험한 작업이잖아요. 베테랑들도 언제 사고가 나지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해요. 경력이 쌓일수록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애틋해질 수밖에 없어요.”
노조가 신경쓰는 것은 ‘안전’
-석원희 건설노조 인천건설지부 전기분과장-
“가장 가슴 아픈 일이 현장에서 사고를 당하는 거예요. 노조도 산업안전문제에 가장 신경을 쓰고 있죠.”
석원희(42) 건설노조 인천건설지부 전기분과장은 90년에 겪은 동료의 산재사고를 잊을 수가 없다. 당시 고압 스위치 오작동으로 감전된 동료는 결국 양팔과 한쪽 다리를 잘라내야 했다.
84년부터 전기일을 시작한 그는 그때 처음으로 ‘전기일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사고 직후 수시로 감전되는 악몽에 시달린 것은 물론이다. 사고가 난지 20년이 다 돼가지만 그는 아직도 “당시 현장에서 맡은 냄새가 기억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인천건설지부 전기분과가 지난해 전기업체들과 처음으로 단체협약을 체결하면서 거둔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는 산업안전문제가 개선된 것이다. 올해 전기분과의 경우 안전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노조는 단체협약 외에 공사기간 동안만 계약을 할 경우 노사기본합의서를 체결한다. 그 조항에 빠지지 않는 것이 산업안전조항이다. 합의서에 따라 조합원들은 안전에 이상이 있다고 판단돼 불안을 느낄 경우나 작업 지시자가 부당한 작업을 강제할 경우 작업을 거부할 수 있다. 노조 집행부도 현장을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안전상황을 수시로 점검하고 있다.
석원희 분과장을 비롯한 상근자는 조직부장과 사무장 등 3명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일을 하지 않고, 현장 조직사업과 관리, 일자리 창출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다. 조합원들을 살피는 동안 분과간부들은 무보수 생활을 해야 한다.
“아내가 소신을 인정해주지 않았다면 결코 노조활동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아내의 내조 덕분에 이렇게 활동을 할 수 있는거죠.”
건설노조 인천건설지부 전기분과
지난해 10월 전기원 노동자 한 명이 분신을 했다. 노조는 주 44시간 보장과 노조 인정·단체협약 체결을 요구했지만 파업 4개월이 넘도록 업체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인천건설지부 전기분과 고 정해진(당시 46세) 조합원은 집회 도중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생을 마감했다.
산재사고를 당하고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고, 하루 12~13시간 중노동에 시달렸던 그는 15년의 전기원 삶을 그렇게 마감했다. 다음달 27일은 그의 1주기가 되는 날이다.
건설노조 인천건설지부 전기분과는 지난해 인천지역 전기업체 27곳 중 11곳과 임금·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이달부터는 주 5일제를 실시하고 있다. 1년 전 주 44시간과 임단협 체결을 요구하며 150일가량 파업을 한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다.
인천전기분과 조합원들은 동료를 잃은 슬픔을 딛고 강한 노조를 만들어 보답하고 있다. 일이 없는 조합원들은 오전에 현장을 돌아다니며 업체들의 불법시공 여부를 적발한다. 일용직 조합원들은 매월 셋째주 목요일마다 조합 운영에 관한 전체 회의를 연다. 집회나 회의 등 조합 활동을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일자리가 먼저 주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석원희 분과장은 “전국 어느 조합보다도 모범적으로 운영되는 곳이라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늘어나는 ‘지중화’, 줄어드는 ‘일자리’
국내의 전력 관리업무는 한국전력공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전봇대 건설과 보수 등 전반적인 현장업무는 한전의 협력업체가 고용하는 전기원 노동자들이 담당한다.
전기원 노동자들은 크게 상용직와 일용직으로 나뉜다. 상용직은 협력업체에 고용돼 있고, 일용직은 공사 계약기간에만 일한다. 한전은 협력업체와 2년에 한 번 입찰계약을 맺기 때문에 상용직 역시 2년마다 고용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최근 한국전력공사는 지방자치단체들과 전선 지중화 협약을 속속 체결하고 있다. 전봇대를 뽑아내고 전선을 땅속에 묻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 전기원 노동자들의 시름이 커지고 있다. 일당은 14년째 아직도 그대로다.
지중화사업은 전봇대를 세워 전기를 공급하는 가공방식이 불가능하고 유지보수가 곤란한 지역에서 시작됐다. 그런데 최근에는 도시 미관 등의 이유로 점차 확산되고 있다. 한전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국의 지중화율은 12.7%. 서울지역은 51.3%, 인천지역은 29.5%에 달했다. 전기원 노동자들의 고민이 깊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