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 산업 뒤에 죽어가는 노동자들
아시아, ‘전자산업’ 노동자의 건강에 주목한다

변정필 기자 bipana@jinbo.net / 2008년09월28일 0시56분

‘클린(clean) 산업’이라고 알려진 IT, 전자 산업은 과연 ‘클린’하고 안전할까? 아시아 노동자들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9월 27일 부터 3일간 필리핀 마닐라의 펄 가든 호텔에서 열린 ‘아시아 노동재해 피해자 권리를 위한 네트워크(안로브, ANROAV) 2008년 연례회의’ 참가자들은 한국의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백혈병 사례 발표에 귀를 기울였다. ‘안로브(ANROAV)’는 석면, 규폐증 등 아시아 지역 산재 문제 등 노동자 건강에 대한 모색을 해온 단체들간의 네트워크다.

‘안로브(ANROAV)’가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유해물질 노출에 따른 치명적 암 등의 발생에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5-6년 전. 아시아에서도 점점 전자 산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치명적 암 발병 등의 사례가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아로 간 ‘반올림’

올해는 한국의 ‘반올림’이 초청을 받았다. ‘반올림’은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으로 ‘삼성 백혈병 공대위’를 이어 받았다.

연구집단 건강과 대안 이상윤 안로브(ANROAV) 한국지부 간사는 “현재 한국의 대기업이 아시아지역에서 노동착취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IT와 전자산업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이상윤 간사는 또 “여기에 대해 아시아에서 운동을 하는 공동의 문제의식 있으며 ‘반올림’이 각 나라 운동에 시사점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올림’의 공유정옥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는 같은 라인에서 1명이 유산하고 그 자리에 대신 들어왔던 황유미씨와 이숙영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하는 등 삼성반도체 생산 공장 노동자들의 사례를 보고했다. 아울러 한국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한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활동을 소개했다.

역시 ‘반올림’의 정애정씨도 발표자로 나섰다. 정애정씨는 “라인에 온갖 화학약품냄새가 진동 하고, 높은 기압으로 현장 노동자들의 몸의 피로도가 높아지면서 각종 부작용을 낳고, 면역체계 또한 무너지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며 “이런 유해한 환경과 강도 높은 노동을 착취당하면서 면역력이 약해진 몸은 충분히 백혈병 등 각종 질환에 노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삼성 반도체 공장 실태를 발표한 정애정씨는 10여 년 간의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생산직 노동자로 일했다. 또, 97년 같은 공장에 입사해, 2004년 급성 림프모구성 백혈병을 진단받았고 항암 치료 중 사망한 고 황민웅씨의 동료이자 아내이기도 하다.

발표가 끝난 후 필리핀 전자산업 노동자 등 이들을 찾아오는 발길이 빈번했다. 자기가 다니고 있는 전자제품 공장에서 쓰는 유해 물질들이 향후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여기에 대한 대응은 어떻게 할 것인지 질문과 토론들이 이어졌다.

지구화되는 IT, 전자 산업, 지구화되는 투쟁들

이번 회의에 참가한 ‘실리콘밸리 독성물질 방지연합(SVTC)’ 테드 스미스는 “하이 테크(high-tech) 산업이 지구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자산업이 전 세계로 확장하면서, 미국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유해 화학 물질은 그대로 또 다시 아시아 지역 노동자들에게로 확산된다.

‘실리콘밸리 독성물질 방지연합(SVTC)’은 IBM과 제임스 무어, 알리다 에르난데스 등 암으로 사망한 전직 IBM노동자들 사이의 소송을 통해 IBM 노동자들의 건강과 환경 문제를 세상에 알리는 데 노력해온 단체다.

테드 스미스는 전자제품 제조공장인 대만 알씨에이(RCA) 노동자들의 투쟁, 1년 전 태국에서 진행된 반도체 노동자들의 투쟁, 뉴 마이애미의 인텔 사에서의 투쟁, AXT 캘리포니아 등 전 세계에서 반도체 노동자들의 저항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테드 스미스는 또 한편으로 “회사의 생존에 직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자산업은 고유하게 노조를 억압하는 정책을 취해왔다”이라며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집단적 대응이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있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했다.

‘안로브(ANROAV)’의 산지프 판디타 아시아모니터센터(AMRC) 소장도 이점에 공감했다. “첫 번째 문제는 노조를 만들어도 깨지기 일쑤고,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서도 긴 투쟁을 해야 하는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판디타 소장은 “전자산업은 ‘클린 산업’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실제로 노동자들이 치명적인 유해 화학물질에 노출 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사실 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현재 상황을 진단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공장 내에서 사용하고 있는 유해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에 접근도 거의 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기업 비밀’을 이유로 노동자들이 유해물질에 대한 정보접근권이 보장되지 않는 것은 미국의 IBM노동자들의 암발병에 대한 진상규명 과정에서나 한국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백혈병 발병 원인을 밝히는 과정에서 공히 드러나고 있는 문제다.

미 캘리포니아 대학 노동자건강센터의 베티 수디는 “노동자들이 어떤 유해 물질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반드시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며, 또 알아야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이테크 산업의 쓰레기장, 아시아

IT, 전자산업이 아시아에 낳고 있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바로 아시아가 하이테크 산업의 ‘쓰레기장’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유럽 등 먼저 반도체 등 전자산업이 발달한 국가의 노후화된 설비는 다시 아시아지역으로 유입된다. 전자제품 폐기물의 최종종착지도 아시아다.

그린피스에 따르면 영국이 2003년 2만3천 톤의 전자산업 폐기물을 인도, 아프리카 중국 등지로 수출했고, 미국도 수집한 재활용 전자제품의 50-80퍼센트를 아시아 지역으로 수출한다. 한편, 인도 델리에만 25,000명이 쓰레기 야적장에 고용되어 연간 1-2만 톤을 처리하고 있으며 이중 25퍼센트가 컴퓨터다.

아시아 노동자들은 이 폐기물을 분해해 재활용하는 작업을 한다. 그러나 유해 화학 물질에 대한 정보는 물론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어 전자제품을 분해하고 재조립해, 작업 과정에서 나오는 유해화학 물질을 그대로 몸에 흡수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 대해서 일부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아직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안로브는 석면, 규폐증 등의 문제와 함께 전자산업 노동자의 건강 문제에 대해 운동을 지속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클린’하고 ‘안전’하다고 이야기 되고 있지만, 그 안에서 생명을 담보로 일을 하는 아시아 노동자들의 이후 행보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