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호 특집은 6월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한국과 해외의 지역정치의 사례를 조망하고 평가하는 과정에서 대안을 모색한다.
특집 제목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시대의 지역과 풀뿌리 정치”이다.
1970년대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자 앙리 르페브르는 좌파가 ‘공간 속에서 계급투쟁을 활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공간은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어 자본축적의 중요한 계기를 형성한다. 르페브르가 자주관리(autogestion) 개념을 통해 설명하려고 했듯이 풀뿌리 저항운동은 이러한 공간의 지배적 정의에 대해 저항하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공간정치로부터 생겨난다. 더 이상 작업장에만 국한되지 않는, 삶이 영위되는 도처에서 투쟁의 계기들과 조우하게 된다. 마뉴엘 카스텔은 이러한 계기들을 도시정치와 연결시키면서 주택, 전기, 교통, 교육, 상하수도, 의료 등의 ‘집합적 소비’를 둘러싼 신사회운동이 융기하는 곳으로 이론화했다. 물론 집합적 소비의 영역은 ‘공간적 조정’(spatial fix)이라는 자본의 축적 전략의 확장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제 자본과 민중 모두에게 공간은 이미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개입에 의해 변형되고 구성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공간은 정치의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세종시 건설, 4대강 정비사업, 한반도 남단 곳곳을 폭격 맞은 것처럼 들쑤셔 놓고 있는 개발 사업을 둘러싼 정치적 소동과 논쟁은 공간의 정의와 구성을 둘러싼 투쟁에 다름 아니다. 그뿐 아니다. 도시계획과 건물의 배치, 그에 따른 교통체계의 정비 또한 공간의 정치다. 광우병 쇠고기에 의해 촉발된 2008년 여름의 촛불시위는 자본에 의해 구성된 식품생산과 유통의 공간적 배치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로컬푸드와 슬로우푸드 운동은 먹을거리 생산과 유통의 공간적 차원을 민중의 필요에 따라 재정의하고 구성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간의 정의와 구성은 그것을 수행하는 주체들의 공동체적 경험을 축적하고 수동적 소비자로부터 능동적 참여자로 정체성을 변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공간의 정치를 지역정치로 경험한다. 지구적 차원의 자본, 노동, 정보의 이동은 수도권과 지방, 도시와 농촌이라는 공간적 차이와 겹쳐져서 경험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적 차이를 관리하고 이로부터 생겨나는 기득권을 유지하는 제도정치의 형식은 지방자치제도로 드러난다. 6월의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정치에 대한 특집을 기획했음에도 ‘지방자치제도’가 아니라 ‘풀뿌리 지역정치의 경험’에 초점을 맞춘 것은 지역정치를 제도정치 안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정치로 보려는 진보진영의 인식 때문이다. 한국의 지역정치를 다루는 모든 저자들이 공히 인정하고 있듯이 제도정치로서의 지역정치의 현재 조건은 실망스럽다. 소위 성장연합을 구성하는 지역토호, 관료, 개발업자, 지역언론의 결속은 공고한 반면 이에 저항하는 진보적 풀뿌리 정치의 역량은 미약하거나 분산되어 있다. 더욱 큰 문제는 그나마 존재하던 지역운동의 근간이 제도정치로 흡입되면서 제도화되는 경로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관적 조건에서도 제도정치 바깥의 저항적 지역정치의 가능성은 존재한다. 자본과 국가의 힘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좀 더 강하게 말하면 그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관료적인 권력과 이윤추구의 논리를 벗어난 대안적 삶에 대한 열망은 더욱 강렬해진다. 생활협동조합, 공동육아, 대안화폐, 마을만들기 등의 경험, 그리고 때때로 부안투쟁과 촛불시위처럼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생하는 폭발적 경험은 이러한 열망이 공유되고 모아지는 계기들을 마련한다.
풀뿌리 지역정치에 대한 ‘의지의 낙관’(optimism of the will)이 우리가 처한 어려운 조건을 부정하는 관념적 낙관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대안적 삶의 열망과 이에 기반한 실험들조차 자본의 논리에 굴복하게 하는 구조적 힘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립된 실험들과 분산된 투쟁만으로는 이러한 구조적 힘을 넘어서기 어렵다고 하겠다. 최병두와 김현우의 글은 진보적 지역정치가 구조적 힘을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전략의 중요성을 제기한다. 장석준이 보여주고 있는 역사적 사례들은 정치적 전략을 구성하고 풀뿌리 정치의 급진성을 모아낼 수 있는 매개로, 좌파 정당과 지역차원의 노동자 연대체를 제시한다. 다양한 지역운동의 네트워크가 모이는 결절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질서 안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투쟁과 저항, 지배적 이데올로기 안에서 그것을 넘쳐서 흐르는 저항투쟁은 항상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자본의 착취, 이윤의 논리, 시장의 논리를 벗어난 새로운 사회, 즉 이윤이 아닌 필요의 원리에 기초한, 시장의 논리가 아닌 민주적 토론과 협의에 기초한 사회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상상력은 현실의 제도적 틀 안에서 보장되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고 기획하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해야하는 것은 상상력으로부터 나온 저항과 기획이 ‘현실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제도의 현실적 목적은 노동으로부터 파생되고 노동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인간답게’ 생존하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실적’ 목적이 전도되어 나타나는 것이 ‘현존하는’ 제도적 질서라면 그것을 전복하는 상상은 ‘현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현실적’일 수 있다. 나아가 본래의 목적을 전도시킨 제도적 질서를 극복하려는 상상력은 조만간 현실로 드러날 것들에 대한 창조적 실험과 실천들을 자극한다. 겉으로 드러난 제도적 질서만을 인식할 수 있는 얕은 ‘경험주의적’ 인식을 넘어서 제도적 질서를 움직이게 하는 인간 역사의 저변을 인식하려는 깊은 ‘실재론적’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 특집이 전달하려 했던 생각은 이러한 분석과 실천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구체적 삶이 영위되는 지역이라는 사실이다.
목차
▣ 특집: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의 지역과 풀뿌리 정치
* 한국의 지역정치와 지역사회운동의 전개과정과 전망(최병두)
* 한국형 포스트포드주의 지방정치는 가능한가: 한국의 지방자치 진단과 평가, 그리고 대안 모색(김현우)
* 나의 마을살이 10년: 이제 마을하자!(유창복)
* 주체성의 정치와 좌파의 시선: 다시 부안항쟁을 생각하며(고길섶)
* 진보적 지방정치의 역사적 사례들(장석준)
* 도시와 농촌의 분리에 대한 녹색사회주의의 진단: 영국 적-녹 연구그룹의 제안(서영표)
▣ 국제
* 아직 끝나지 않은 기후변화협약 15차 당사국 총회: 코펜하겐 기후변화협약 15차 당사국 총회 참가기(이헌석)
▣ 일반논문
* 노동의 개념(이종영)
*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진단과 해법(최갑수)
* 공화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루소의 사회계약론(류청오)
* 광주촛불집회의 참여주체와 주체성 변화(김형주)
* 바디우적 주체의 형상: 보편주의 윤리학의 힘과 한계(윤영광)
▣서평
* 손호철의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
MB를 넘어,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강병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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