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동떨어진 법규가 `전과 기업` 양산

법조항 1069개…땜질식 중복규제
산업재해 발생은 10년째 세계최고

◆노동법 이대로는 안된다 ⑧ / 시대에 뒤처진 산업안전보건법◆

#사례1

= 조선업체 A사는 작업 현장에 지금의 산업안전보건법을 적용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도장시설은 수만㎡ 지역에 독립적으로 설치돼 화재, 폭발 위험이 적지만 취급물질 사용량을 일일이 작성해 공정안전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불편이 있다. 또 법에서는 사다리식 통로를 설치하면서 `등받이 울`이나 구명줄 설치를 요구하지만 조선업체에는 맞지 않아 형식적으로 설치해 놓고 있다. 크레인 작업시에는 근로자 출입을 금지하는 규정도 조선업 특성상 지키기 힘든 조항이다. 이에 따라 A사 대표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20여 차례 받은 전과자가 됐다.

#사례2

= 건설업체 B사는 근로자에게 간단한 용접업무를 맡기면서도 곳곳에 흩어져 있는 5~6개 산업안전보건법 관련 조항을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 28조(자율안전확인대상기구), 산업안전기준에 관한 규칙 267조(용기의 용접)와 308조(압력의 제한), 산업안전법 시행규칙 46조(방호장치), 산업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28조(용접 등에 관한 조치) 등 다양하다. B사 관계자는 “용접에 관한 내용들이 중복돼 있어 회사를 비롯해 근로자마저도 헷갈린다”며 “그렇다고 법을 지키지 않을 수도 없어 답답하다”고 말했다.

1981년 전통 제조업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산업안전보건법이 한계에 도달했다. 디지털산업으로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일일이 회사와 근로자를 간섭하다 보니 법 조항만 잔뜩 늘었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안전보건법(72조),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48조)과 시행규칙(145조), 산업안전기준에 관한 규칙(523조), 산업보건기준에 관한 규칙(281조) 등 모두 1069개 조항으로 돼 있다.

여기에 고시 수준의 것들을 포함하면 산업안전 관련 규제는 더 늘어난다. 사람 생명을 다루는 안전에 대한 규제는 철저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엄청난 수의 법 조항은 중복 규제가 많고 사업장에서는 법 조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지키기조차 힘들다.

`산업재해를 예방하고 쾌적한 작업환경을 조성해 근로자 안전과 보건을 증진한다`는 법의 목적도 빛이 바랬다. 산업재해를 입는 근로자가 줄어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산업재해율은 10년째 0.7% 수준에 정체돼 선진국보다 월등히 높다. 산업재해가 아니라 회사 자체적으로 `공무 중 부상(공상)`으로 처리하는 사례마저 통계치에 포함하면 재해율은 더 높아질 수 있다.

전문가들은 불필요한 산업안전보건법 조항을 과감히 손질하고 사업장 내 자율적인 안전관리문화 정착에 힘써야 할 때라고 조언한다.

◆ 형식화 된 안전관리

= 인천에 공장이 있는 H금속은 직원 370여 명의 중견기업이지만 안전관리자를 별도로 두지 않고 있다. 이 회사에서 안전관리 업무를 맡고 있는 김 모 부장은 “전체 업무 중 안전관리에 투자하는 시간은 10~20%에 불과해 부수적인 업무로 취급하고 있다”면서 “업무라고 해봐야 아침에 공장 한 바퀴 도는 일 외에 특별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특히 H금속은 올해 들어 안전관리 교육을 두 차례 실시했지만 그나마 30분 정도 전 직원을 모아놓고 훈계조로 이야기한 것이 전부였다. 산업안전보건법 시행규칙에서는 비사무직 근로자에 대해 매월 2시간 또는 분기별 6시간 이상 안전교육을 의무화하고 있지만 산업현장에서는 형식요건을 충족시키는 데 급급하다.

박지순 고려대 법대 교수는 “규제 일변도인 산업안전보건법을 사업장의 자율적 위험성 평가에 기초한 방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면서 “기존 안전보건 기준이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미로처럼 얽혀 있어 현장에 직접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적용 대상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입법적 정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선진국 안전 자율성 강조

= 산업안전 선진국 법령은 예방활동 자율성을 강조한다는 특징이 있다. 독일은 2004년 `작업장안전보건법`을 개정하면서 관료주의적 규율 관행에서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예를 들면 작업장 대지가 최소 8㎡ 이상이어야 한다거나 화물 적재 플랫폼 가로 길이가 최소 0.8m 이상 돼야 한다는 형식적 규정을 없애고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했다.

영국 산업안전법도 명령 중심의 규제에서 노사정 3자에 의한 사업장 안전보건관리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영국은 노사정이 참여하는 산업안전보건집행위원회를 설치하고 여기에서 이뤄진 사업장 안전보건상 조치 및 기준에 대한 합의사항을 집행하는 산업안전보건청(HSE)을 두고 있다.

미국은 각 주가 자체적인 산업안전보건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연방정부가 이를 모니터링해 규제 여부를 결정하는 시스템으로 각 주 정부의 자율적 노력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주의 사업주에게 공통적인 의무를 규정하는 `일반 의무규정`을 두고 있다. 이는 산업안전보건기준이 근로자를 보호할 수 없을 때 보완하기 위한 규정이다.

[강계만 기자 / 박승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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