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보고 출퇴근하는 은행 노동자
직무·감정노동 스트레스…우울증 20% 넘어

김봉석 기자

“행복추구권을 완전히 박탈당한 것 같아요. 아침 8시까지 출근해 보통 11시 넘어 퇴근하는데, 직장(은행)에서 일하기도 힘들고 가정에서는 아이들 얼굴 보기도 어려워요. 아이들이 ‘엄마가 우리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냐’고 하면 가슴이 쓰려요. 몸은 고된데 마음도 편치 않아요. 하루는 버스를 타고 가는데 고등학생들이 ‘은행이 무슨 문을 그렇게 빨리 닫냐. 자기네들이 하는 게 뭐 있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울컥 화가 나더라고요. 우리가 어린 학생에게도 무시를 당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개인고객상담 19년차 A은행 ㄱ씨)

겉으론 행복해 보여도 항상 속앓이를 하고 있는 것이 대다수 노동자의 삶이다. ‘보다 빨리·보다 멀리·보다 높이’라는 올림픽 구호마냥 모든 노동자는 ‘보다 빠르게·보다 효율있게·보다 많이’라는 구호에 휩싸여 실적(생산성)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은행 노동자들은 고액연봉에 편한 일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그에 따른 소외감 역시 컸다.

하루 12시간 노동 “그래도 시간이 모자라다”

한국노총 산업환경연구소와 한양대 산업의학과가 우리·신한·기업 등 3개 은행 노동자 2천36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은행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남성이 평균 13시간, 여성이 12시간20분 정도였다. 하루 기준 최소 4시간에서 5시간의 초과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들의 하루 휴식시간은 점심과 저녁을 먹는 시간까지 합쳐 남성이 1시간50여분, 여성이 1시간40여분 정도였다. 휴일근무도 각각 월 0.6회씩 하고 있었다.

연봉은 5천만~8천만원이 44.8%로 적지는 않은 편이었다. 3천만~5천만원이 32.6%였고, 1천만~3천만원이 16.8%, 8천만원 이상인 사람은 5.8%였다. 절반 이상인 55.3%가 수입에 대해 ‘충분’과 ‘부족’의 중간 대답인 ‘별 지장 없다’를 택했다. 생활하는 데 어렵지는 않다는 뜻이다. 충분은 14.9%였고 부족은 27.0%였다.

그렇지만 과도한 업무량은 문제였다. 88.5%가 영업 관련 업무가 부담된다고 답했다. 퇴사를 고려하는 이유로도 과도한 업무량(25.3%)이 가장 많이 꼽혔다.

“인원은 많이 줄고 업무량은 계속 늘기만 해요. 점심에도 고객이 있으면 나가지 못해 굶을 때도 있어요. 고객들 맞으랴 미뤄뒀던 일은 은행 문 닫고 나서 마무리하고, 펀드나 방카슈랑스 등 상품에 대한 전화설명을 드리기 위해 고객들에게 전화하고 은행에서 하는 캠페인이나 상품 판매 그리고 경영평가를 받기 위한 준비작업까지 해야 합니다.”

은행 노동자들은 보통 11시 넘어 퇴근하기 일쑤고 주말에는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까지 다닌다. 펀드나 방카슈랑스 등 은행에서 취급하는 각종 상품을 팔기 위해선 관련 자격증이 필요하다. 승진을 위해서라도 자격증 확보는 대세가 됐다. “매일 늦게 들어가고 주말에 쉴 시간도 없고. 시간이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요.” 은행 노동자에게 장시간 노동은 일상이 됐다.

하는 일이 많다 보니 직장 내 인간관계도 개인주의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행복추구권을 빼앗겼다”고 성토했던 ㄱ씨는 “예전에는 서로 챙겨주는 것도 많았는데 요즘은 옆에 있는 동료도 자기 일만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은행 노동자들은 우스갯소리로 “별 보기 운동을 한다”고 말한다. 아침 일찍 출근해 밤늦게 퇴근해야만 하는 상황을 빗댄 말이다. 퇴근 인사는 어느새 “좀 이따 보자”가 됐다.

‘인력부족→장시간 노동→노동강도 강화→스트레스’ 악순환

긍정적인 마음으로 즐겁게 일하려 해도 생각만큼 쉽지 않다. 실적경쟁은 심화하고 밑에 후배들은 치고 올라오고 승진이라도 늦으면 뒤처졌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업무가 복잡 다양해지면 많이 배워야 하고 뒤처지지 않으려고 주말에도 꾸준히 자기개발을 해야 한다. 18년째 기업고객팀에서 일하고 있는 B은행의 한 노동자는 “신입들은 확실히 업무처리가 빠르다”며 “내가 더 잘해야 하는데 생각하면서도 과연 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걱정만 늘어난다”고 한숨을 토했다.

노동시간이 길 뿐만 아니라 강도도 강하다. 직무 스트레스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88.2%가 ‘업무 수행 중에 충분한 휴식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답했고, 하루 근무 중 식사시간과 휴식시간이 불충분하다는 대답도 84.4%에 달했다. 내가 일하는 부서의 인력이 부족(62.2%)해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야 하는(86.7%) 상황이다.

인력부족이 업무강도 강화의 핵심이다. 고객이 카드를 만든다고 신청을 하면 은행 개점시간에 카드신청서를 받은 후에도 신용조회를 하고 결제도 맡는 등 후속 처리업무가 많다. 이런 업무들은 보통 은행 문이 닫히고 나서야 시작된다. 한 두건에 그치면 모르지만 수십건에 이르면 이 업무만 처리해도 저녁시간을 모두 소비해야 한다. 예전에는 은행 문을 닫고 하는 일을 창구 뒤에서 일을 보는 후선담당이 처리했다. 지금은 그야말로 일인다역의 시대다.

“12시간 상담…아이가 말 걸어도 스트레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일과 가정의 양립은 어림없는 소리다. 스트레스는 많아지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은행 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업무에서는 실적 때문에, 가정에서는 가족들의 불만이 가장 스트레스예요. 늦게 들어가고 밥 먹을 시간도 없어 가족들의 불만이 그칠 날이 없죠. 그래서 주말에는 어떤 약속도 잡지 않고 가족에 올인해요. 그렇지만 실적 걱정이 집까지 연장됩니다. 밤에 잠도 안 오고 어떻게 하면 목표량을 채울까 하는 생각밖에 안 들죠.”

C은행의 ㄷ씨는 “가정은 포기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많아 아팠을 때도 옆에 있지 못했고, 사랑하고 안아줘야 하는데 밤에 늦게 들어가니 잠자는 모습만 보기 일쑤”라는 것이다. 주말에는 다른 약속을 일절 잡지 않고 가족에 올인하는 이유다. 그래도 주말에는 피곤함에 못 이겨 늦게까지 자는 경우가 많다. 가족과 함께해야 한다는 마음은 굴뚝같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15년째 고객상담을 하고 있는 한 노동자는 “하루종일 말을 많이 해서 힘들어 죽겠는데, 집에 가서 아이들까지 말을 시키면 더 피곤할 때가 있다”며 “시어머니도 집에 계셔서 말동무라도 해 드려야 하는데, 그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곤 한다”고 털어놓았다.

실제 은행 노동자의 ‘일과 가정의 양립’ 문제는 심각했다. 조사 대상자의 80.2%(복수응답)가 ‘일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가정생활에 지장을 준다’고 답했고 82.7%가 ‘직장 업무로 인해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대답했다. ‘직장 업무가 너무 힘들어 집에서는 정성을 쏟는 일을 하기 어렵다’는 응답도 63.3%나 됐다.

직무·감정노동 스트레스…우울증에 시달려

직무와 감정노동에 따른 스트레스도 다른 산업 못지않게 높았다.

“민원전화가 오면 직원에게 불만을 호소할 때가 많은데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저희는 무조건 빌어야 하는 입장입니다. 고객만족도평가(CS)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죠. 심지어 서비스를 등에 업고 저희를 무시하는 고객들도 있어요.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직원들은 속수무책이죠. 그럴수록 스트레스는 더욱 많아져요.”

B은행의 ㄴ씨는 “밤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했다. 쌓이는 스트레스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C은행의 ㄷ씨는 실적 걱정에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속하고 있다. ㄷ씨는 “실적 걱정에 어떻게 하면 목표량을 채울까 하는 생각밖에 없다”고 말했다.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도 심각했다. 조사 대상자의 8.4%가 우울증상을 보였고 12.3%가 의심자로 분류되는 등 20% 이상이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최근 다른 산업군을 조사한 결과(우울증상군 5.8%, 의심자가 10.1%)보다 높았다.

스트레스와 작업환경에 따른 근골격계질환에 걸린 은행 노동자가 적지 않았다. 지난 1년간 작업과 관련한 근골격계 증산 빈도가 월 1회 이상이거나 증상 발생시 지속기간이 1주일 이상인 ‘근골격계질환의 발생감시대상’이 81.0%였고, 의학적으로 근골격계질환 관리대상으로 분류된 사람도 54.5%에 달했다.

이번 조사를 담당했던 김인아 충남대 산업의학과 교수는 “은행 노동자의 근골격계질환 유병률이 제조업 못지않게 높게 나타난 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결과”라며 “제조업처럼 당장 치료가 필요하거나 집단 요양을 할 정도는 아니지만 조기 예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