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
대우자동차판매 고 최동규 씨…”차 못팔면 나가라” 협박
시원한 가을바람이 아침저녁으로 옷깃을 여미게 하던 9월 6일 아침 7시. 대구 칠곡의 한 아파트에서 출근을 위해 화장실을 다녀오다 한 남자가 갑자기 쓰러졌다.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의 뇌 안에서는 피가 멈추질 않았다. 뇌출혈이었다. 그날 밤 8시 20분 그는 세상을 떠났다.
대우자동차판매 대구남산지점 최동규. 그의 나이 서른 아홉이었다. 아침마다 운동장에서 조깅을 하고, 평소 감기도 잘 앓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다. 매일 아침 가장 일찍 출근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던 그가 초등학교 1학년 딸과 다섯 살배기 아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눈을 감았다.
그의 시신이 잠들어있는 가톨릭대학교 칠곡병원. 그가 죽은 지 5일이 지났는데도 그의 아내와 유족들은 장례를 치르지 않고 있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서 이대로 남편을 보낼 수 없었다. 가족들은 남편의 한을 풀어달라며 모든 권한을 노동조합에 넘겼다.
▲ 가톨릭대 칠곡병원에 차려진 고 최동규 씨의 빈소
그와 10년을 넘게 일했던 정창득 씨는 “판매직이 그렇지 않아도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인데 차를 팔지 못하면 정리해고하겠다고 협박하고, 별도 회사를 만들어 정규직을 모두 개인딜러로 만들려고 했다”며 “회사는 그의 죽음에 대해 대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1995년부터 대우자동차판매에 입사했다. 성격이 활달하고 대인관계가 좋아 세일즈맨의 인생을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가 입사한 회사는 경북대우자동차로 대구지역의 판권만 가진 대우자동차판매의 위장계열사였다.
2000년 초 대우그룹 부도사태 이후 회사는 폐업신고를 했고, 모든 직원을 계약직과 대리점직원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는 난생 처음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끝까지 싸워 그 해 8월 대우자동차판매 대구 남산지점으로 고용승계가 됐다.
아이를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아이들과 아내, 그리고 노모를 모시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매일 아침 8시도 되지 않아 출근했고, 매장을 찾는 고객들에게 차를 한 대라도 더 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퇴근 후에도 고객과 약속이 잡히면 밤 11시에도 집을 나섰다.
1년이 지난 2001년 말. 회사는 SR이라는 제도를 들이댔다. 그동안의 월급체계인 CM은 70%가 고정급이고 30%가 판매실적에 따라 받는 변동급이었는데, 회사는 고정급 30%, 변동급 70%라는 새로운 체계를 요구했다. 똑같이 월 3대를 팔면 SR이 월급이 더 많도록 해 사람들을 유혹했다. 노동조합이 끝까지 반대해 2년 넘게 파업했지만 거머리같은 제도를 막아내지 못했다.
작년 12월 회사는 명예퇴직을 받았다. “회사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12명이 일하는 대구 남산지점에 7명이 회사를 떠났다. 불안감이 밀려왔다. 여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2001년 2,500명이던 대우자동차판매 정규직은 이제 500명 남았다. 예전 동료들은 개인딜러가 돼 거리를 헤매며 비정규직보다 더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2천5백명이던 정규직 5년새 5백명으로 줄어
올해는 지독한 불경기였다. 그래도 3월까지는 한 달에 3대는 팔았다. 그러나 4월부터는 1대를 팔기가 어려웠다. 10년이 넘으면서 더 이상 아는 사람 손 벌릴 곳도 없었다. 월급체계가 실적으로 바뀌면서 그는 4월부터 실수령액이 월 90만원 남짓했다. 하루하루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파트 대출이자도 내기 어려웠고 보험도 해약해야 했다.
8월 10일 대우자동차판매 이동호 사장은 직영부문만 떼내 별도의 회사를 만들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그는 “GM대우차의 판매수수료 인하로 더 이상 직영부문을 유지할 수 없다”고 밝혔다. 회사는 희망퇴직을 받았고, 별도법인으로 가지 않는 직원들은 정리해고를 하겠다고 협박했다.
노동조합이 불법이라며 강력히 반발했지만 회사는 초강경이었다. 8월 18일과 9월 1일 박상설 전무는 ‘직영사업부문 직원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통해 새 법인 설립은 노사합의사항도 아니고 개인동의사항도 아니라며 “우선적으로 판매실적이 부진한 직원(월 2대 미만)에 대해 권유퇴직을 실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람들 사이에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결국 회사를 분리해 직영을 없애고 모두 개인딜러로 만들 것이라는 얘기였다. 회사는 대리사원에게 퇴직금 4천만원을 제시했다. 정리해고 당하기 전에 이 돈이라도 챙기고 나가라는 뜻이었다.
8월 10일 이후 그는 하루하루가 미칠 것만 같았다. 밤이면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평소 한 갑 정도 피던 담배는 거의 두 갑으로 늘었고, 귀엽기만 한 아이들도 귀찮아졌다. 결국 비참하게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순간순간 그를 괴롭혔다.
쓰러지기 이틀 전인 9월 4일 회사 회식 자리. 그는 새벽까지 술을 퍼부었다. 새벽 2시가 되어 집에 들어간 그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고, 옷까지 다 엉망진창이었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한번도 그런 경우가 없었다.
그리고 26시간 후 그는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2006년 09월 11일 (월) 09:10:53 박점규 현장기자 bada995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