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연구자초청 간담회]

지난 분기에는 해외의 진보적 연구자들의 초청 강연이 두 차례나 열렸습니다. 해외연자 초청 행사가 이렇게 연거푸 열린 것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 참석하지 못한 회원들을 위해 강연에서 오간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보고합니다. (정리: 김명희, 전수경)

일본 노동법학자에게 듣는다

– 일본의 비정규노동 현실과 한국의 미래 –

? 일시: 9월 3일 오후 7시-9시
? 장소: 성수노동자건강센터 교육장
? 통역: 스즈키 아키라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세 분의 발표자들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카 가즈미치 교수 (가나자와대학 경제학경영학계)는 파견과 청부 형태의 간접고용, 노동시장 유연화와 규제 완화정책을 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와키타 시게루 교수 (류코쿠대학 정치학과)는 일본에서의 노동/사회보장분야 규제완화와 권리의 문제, 그리고 한국의 비정규 고용 문제를 주로 탐구하고 있습니다. 요로이 다카요시 교수 (류코쿠대학 법률학과)는 노동계약론을 주로 연구하며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노동자 파견문제의 중요성을 지적해왔습니다. 세 분 모두 적지 않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늦은 시간까지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대학 교수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파견 노동자 상담 홈페이지까지 만들어 지원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게, 대기업 노동조합이나 법조인들이 아무도 이 문제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며 안타까워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일본에서는 자신들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이들이 드문데, 한국에서는 참가자들 중에 젊은 세대가 많다며 몹시 부러워하였습니다. 

§ 규제완화 정책의 전개와 비정규노동  

– 고카 가즈미치 (가나자와대학 경제학경영학계 교수)

우선 제조라인에서의 파견노동 허용에 대해서 살펴보자.
1995년 일본경제단체연합회(일경련)이 신시대 일본적 경영 지침을 냈다. 그 문서는 정규직을 줄이고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등 비정규직을 확산시키자는 내용이었다. 그 후 하시모토 수상은 규제완화를 주장했는데, 1996년 부가세를 3%에서 5%로 인상시키면서 오히려 소비는 줄어들고 경제는 더 나빠졌다. 다음 오부치 수상은 규제완화를 추진하지 못했고, 2001년 고이즈미 정권이 본격적인 규제완화를 추진했다.
일본 경제는 2000년대에 낮은 수준이기는 했지만 호황을 유지했다. 우리는 흔히 경제가 좋아지면 생활도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일본사례를 보면 호황기에 워킹푸어와 비정규직이 늘어났다. 당시 NHK 방송국에서 3차례의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그 시기에 일본에서는 거주지가 없는 파견노동자가 늘어나면서 PC방에서 숙식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등 사회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2003년에 제조라인에 파견을 늘리는 법 허용이 있었다. 2007년 5월 일본경제신문을 보면 일본 대기업들은 4년 연속 이익을 냈다. 하지만 노동자 수입은 늘어나지 않았다. 고용형태가 비정규고용으로 바뀌고, 낮은 조건에서 멈춘 것이었다. 이를테면 대규모 할인점의 시장진입을 막는 규제가 철폐되었고, 택시 업체 규제완화로 택시는 늘어났지만 택시노동자 임금은 줄어들었다. 공공부문에서 시장화, 민영화가 진행되면서 공무원의 비정규직화도 심해졌다. 지방자치단체가 파견업체를 만들어 임시직원을 고용하는 형태가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법을 통해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노동법을 완화시킴으로써 오히려 보호를 해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고용형태의 구체적인 변화를 살펴볼 차례다. 
1997년부터 5년간 정규직 400만 명이 줄고 비정규직이 300만 명 늘어났다. 2007년 호황기에도 정규직은 줄고 비정규직은 늘었다. 호황기에 정규직을 줄이는 것은 과거에 없던 일이다. 2007년에는 비정규 고용비율이 37%가 되었다. 파견노동자는 1997년 25만 명에서 10년 사이에 6배가 늘었다. 1997년 당시 파견노동자는 대다수가 여성이었지만, 2002년에서 2007년 사이에 제조업 파견이 허용되면서 남성도 큰 폭으로 늘어났다. 
한국에서도 사내하청에 대한 통계, 도급노동에 대한 통계는 찾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내하청 노동자는 어딘가에 숨어 있다. 이번에 방문해서 현대차 전주공장에 내려가 사내하청노동자를 인터뷰했다. 사내하청업체에 고용되어 있지만 그는 정규직이으로 헤아려진다.
어디까지나 추산이지만, 현재 일본에는 파견, 도급 노동자를 합치면 280만 명이 넘을 것으로 본다. 이 상황에서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2008년 이후 파견노동자들에 대한 해고가 시작된 것이다. 파견, 도급노동자가 줄었고, 간접고용노동자가 전체적으로 줄었다.

파견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열악하다. 일본 파견법이 정한 26개 업종의 임금을 보면, 하루 8시간 근로 시 11,254엔 (약 15만원)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원청회사가 내는 비용의 68.8%이다. 즉, 나머지 32%를 파견업체가 가져가는 것이다. 이 26개 업무는 사용기한이 정해져있지 않으며, 그 외 업종에서의 파견 사용기한은 3년이다. 파견노동자의 임금은 시간 당 1,281엔(약 1만 7천원)이다. 파견노동자들의 산재 현황을 보면, 파견업체와 원청회사 신고 건수가 같아야 정상인데 원청회사의 건수가 적다. 원청회사들이 산재를 은폐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용이 불안정하고 임금이 낮을 뿐 아니라 산재위험도 높은 고용형태가 늘어나고 있다. 정사원이지만, 승진도 상여금도 없는 정사원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정규직도 장시간 노동하게 되었다. 비정규고용이 늘어나는 것은 정규직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 노동빈곤층이 157만 명 이상 늘어났다. 연 수입 100만~200만 엔 (약 1,300만~2,600만 원)사이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저임금노동자가 확대된 것이다. 비정규고용의 3/4은 저임금 노동자들이다. 실업자이면서도 실업수당을 못 받는 비율이 중국 84%, 일본도 77%나 된다. 즉 실업자의 23%만이 실업수당을 받는다는 것이다. 비정규고용의 대다수는 고용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혼인 상태를 조사해보면, 30대 후반 비정규직 남성의 60%가 결혼을 못하고 있고, 40대가 되어도 50%가 결혼하지 못한다. 비정규고용이 심화될수록 저출산이 더 심각해진다. 그대로 가면 일본 국내에서 구매력이 떨어지고, 자본은 해외로 시장을 찾아아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악순환이다. 한국에서 파견법을 확대하고 제조업까지 포함되고 나면 일본같이 변화할 것이다.

§ 일본에서의 빈곤 진행

– 와키다 시게루 (류코쿠대학 정치학과 교수)

고카 교수가 발표한 것처럼 일본에는 연수입 200만엔 이하 빈곤층이 6천만명이 있다. 노동자 4명 중 1명은 빈곤층이며, 연봉 200만 엔이면 기초생활보장 수준보다 낮다. 일본 정부는 빈곤율이 얼마나 되는지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다가, 작년 정권교체 이후 처음으로 발표했다. 2008년 조사 결과 빈곤율은 15.7%였다. 한부모 가정은 절반 이상이 빈곤층이다. 어머니가 가장으로 일하는 가구의 연수입은 아주 낮다. 비정규고용이 빈곤의 주된 이유다. 여성은 정규직 비율이 절반에 못 미친다. 일본 비정규문제의 중심은 여성이다. 비정규고용의 많은 형태는 파트타임이다. 남성의 경우는 파트타임보다 아르바이트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남성은 80%정도가 정규직인데 비해 여성은 그 비율이 50% 미만이다. 일본의 비정규문제는 남녀차별적 성격이 강하다.

2006년에 제조업파견을 허용하면서 비로소 남성 비정규직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전부터 여성 비정규직화가 진행되었는데 언론은 보도하지 않았다. 남성은 젊을 때부터 정규직으로 일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비정규직이 늘어나자 언론에서 난리가 난 것이다. 내가 1996년부터 홈페이지 통해서 파견노동자들의 고충상담을 시작했다. 연구자가 직접 나서 노동자 상담을 한다는 게 이상하지만, 일본 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 비정규문제를 다루지 않고 노동조합 고문변호사도 그런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홈페이지 개설하고 나서, 기다렸다는 듯 상담이 많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여성들이 많았지만, 최근에 남성이 많아졌다.

일본은 고도성장기에 전형적인 노사관계가 정착되었다. 70년대에는 고용의 70%가 정규직고용이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숙련노동자로 고용되어 기업 내에서 직업훈련을 받았다. 근속기간이 늘어나면서 임금도 늘어났고, 수당과 퇴직금은 기업의 책임이었다. 1947년까지 일본 내에서 산별노조를 지향하는 좌파노동운동이 있었지만, 미군정 하에서 기업별 형태로 강제당한 것이다. 일본적 고용 관행은 고용안정과 임금인상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이지만, 기업 규모에 따라 노동조건이 격차가 크다는 문제점이 존재한다. 이 고용방식은 남성을 중심으로 하고, 여성은 노동시장 퇴출을 전제로 하는 고용형태이다. 이후 비정규 고용의 아주 나쁜 형태가 생겨났다. 일본적 고용관행의 좋은 부분은 사라지고, 나쁜 점인 기업 간 격차, 남녀차별만 유지된 셈이다.

기업별 노조는 정규직 노동조합이라 비정규 고용 문제에 대해서 대응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서구의 비정규고용과 큰 차이가 있다. 일본은 1970년대 남성은 정규직으로, 여성은 결혼하면서 남성의 피부양자가 되어 남성고용을 파괴하지 않는 한에서 파트타임으로 고용되었다. 노동조합에서도 이러한 관행이 정규직을 위협하지 않으니까 문제 삼지 않았다. 우수한 여성노동자들이 남성보다 싼 임금으로 일하게 되었고, 기업은 이를 활용했다. 하지만 1980년대에 파트타임과 비슷한 수준으로 풀타임 비정규직이 늘어났다. 그 형태가 바로 파견, 하청, 기간제고용이다. 우선 여성과 생산직 남성에서부터 시작했다. 80년대에 시작된 일회적 고용형태를 일본 자본은 90년대에 확산하려 했다. 결국 지금은 반대 목소리가 늘어났다. 일본의 정규직 고용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비정규고용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노동은 불안정한 노동이기 때문에 정규직임금의 3,4배를 받아도 결코 유리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은 고용도 불안정하고 임금도 차별대우를 받는다. 세계 유래가 없는 나쁜 형태다. 한국도 비슷하지만 최소한 법규상으로는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일본에는 그런 법규제 조차 없다.
파트타임 고용은 가구 내 남성 정규직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남편이나 아버지는 정규직, 아내나 자녀들은 아르바이트로 일한다. 피부양자 임금이 130만 엔 (약 170만 원) 이하면 사회보장에서 비과세 혜택을 받는다. 또한 노동시간이 정규직의 3/4이면 사회보험에 가입하지 않아도 된다. 이 두 가지를 고려하면 아내가 파트타임으로 일했을 때 비과세 한도는 103만 엔 (약 140만 원)인데 이를 환산하면 시급 687엔 (약 9,400원)이 된다. 이는 시급 기준 최저임금과 비슷한 수준이다. 내가 한국말로 이걸 ‘남편 짝벌이’ 현상이라고 부른다. 파트타임 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관행은 심각한 문제다. 모자 가정의 어머니가 열심히 일해도 빈곤한 이유가 바로 파트타임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1985년에는 노동자파견법을 통해 위장도급을 합법화했다. 남성노동자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든 게 파견법이다. 당시 수상이던 나카소네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우익으로 일본국철노조를 부당하게 탄압했다. 파견법은 단결파괴법이 되었다. 기업별 노조는 회사가 다르다는 이유로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것을 나카소네가 전략적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당시 좌파 계열의 노총이 있었는데 산별노조를 지지하고 파업도 했었지만, (일본 최대의 노동조합인) ‘렌고’는 한국의 현대중공업 노조와 비슷한 성격이라고 보면 된다. 파견법이 생긴 이후 일본 노동조합은 파업을 하지 않았다. 2008년 가을에 대기업 파견노동자 27만 명이 해고가 되었다. 대기업 노동조합들은 옆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해고를 당했는데도 파업을 하지 않았다. 나카소네의 전략이 관철된 것이다.

노동자들은 정규, 비정규, 직영, 파견으로 분할되고 있다. 1999년, 파견법이 원칙적으로 자유화되었다. 이때를 기준으로 현재 파견 노동자가 3배 이상 늘어났다. 일본의 최저임금이 파트타임 기준으로 책정되면서 저임금 노동자가 대폭 늘어났다. 도요타, 파나소닉 같은 경우 정규직 노동자의 연봉은 800만 엔 (약 1억 1천만 원), 파견노동자는 200만 엔 (약 2,700만 원)이다. 이러한 격차나 빈곤은 정치적 변화를 만들었다. 2007년 참의원선거에서 여야가 역전된 것이다. 1999년 파견법에서 한국보다 나은 점 한 가지는 파견업체가 노동자를 바꾸어도 원청회사는 3년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2003년부터 제조업에서 파견이 확대되면서 3년 제한규정 때문에 위장도급이 늘어났다. 언론에서 파견이 위장도급을 늘린다고 보도하면서 단속이 시작되었다. 시정명령이 이어지고 도급 대신 파견을 활용하게 되었다.
2007년 선거를 통해서 여야가 역전되고 파견노동자 보호에 대한 법 개정 요구가 강해졌다. 2009년에는 중의원 총선이 있었는데 야 3당이 모여 개정안을 만들었다. 정권이 교체되면서 민주당 공약으로 파견법이 일부 개정되었지만 아직은 명목상으로만 노동자 보호를 말하는 수준이다. 야 3당 안은 한계도 있지만 좋은 점도 많이 있다. 제조업파견의 원칙적 금지, 불법파견은 직접고용으로 본다는 것 등이다. 재미있는 부분은 불법파견 상태에서 고용주 선택 조항이 있다는 점이다. 원청에서 사용할 것인가 혹은 파견업체에서 사용할 것인가. 일본에서 없었던 균등대우라는 말도 들어갔다. 그러나 정부안의 경우, 원칙은 금지라고 하면서 예외를 많이 두었다. 그 중 하나가 원청회사에서 파견이 상시고용이면 허용된다는 것이다. 균등대우를 확보하는 부분은 ‘균형을 고려한다’로 바뀌었다. 경영자 입장에서는 개정이 아니라 지금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제일 좋으니까 그렇게 선택한 것이다.

일본에서 이러한 상태를 깨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특히 단결권을 행사할 수 없는 비정규 노동자에게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이들을 위한 노동조합은 거의 없다. 직장 내에 있는 조직보다는 지역노조, 일반노조가 적당할 것이다. 한국의 산별노조가 지향하는 방향을 일본에 소개하고 싶다. 일본에서 눈에 띄는 현상은 노동자 내부보다 시민연대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올해 4월 회장이 된 이는 주로 사채 문제를 다루며 반(反) 빈곤운동을 열심히 해 온 사람이다. 작년 11월에는 라는 단체가 생겼다. 이 단체에는 변호사, 연구자, 시민들이 함께 한다. 내가 그 대표를 맡고 있다. 앞으로 한국노동자들의 투쟁을 알려나가면서 노력할 것이다. 

§ 질의 응답

? 비정규직 확대가 결혼 연령을 늦추거나 안 하는 비율을 높인다는 언급에 대해
여성 비정규직은 결혼 후 파트타임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성비정규직과 임금 차이가 없어지면서, 예전에는 여성의 미혼 비율이 높지 않았는데, 남성처럼 결혼하지 않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여성 비정규노동자는 결혼하지 않고 부모와 사는 경우가 많다.
? 일본에도 한국처럼 특수고용노동자가 있는가?
특수고용이라는 말은 일본에 없다. 노동자 내지 자영업자이다. 노동자가 싸우지 않으면 모두 자영업자로 분류되고, 사회보장제도의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한국은 네 가지 특수고용에서는 산재가입을 할 수 있는데, 일본은 특별가입으로 자기 돈 내고 자영업자 형태로 산재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전에는 보험설계사, 레미콘운전사가 노동조합에 속했지만, 요즘에 와서는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 판례가 생기고 있다. 독립자영업자라고 하면서 사용자 지위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가 소송을 제기하고 싸운다. 노조 만들고 인정하라, 노동자성 있으니까 산재 보상하라고 소송하는 것이다. 한국과 비슷한 상황이다.
? 비정규직 연봉 200만 엔이면 일본 내에서 어느 수준인지 가늠이 안 된다
일본의 생활보호 제도는 지자체마다 약간 차이가 있는데 교토의 경우 30세 부부와 2살 아기의 최저생계비가 한 달에 22만 엔 (약 300만 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연 200만 엔 (약 2,700만 원)이면 혼자 살기도 어렵다. 부모와 같이 살아야 겨우 살 수 있다. 부모가 사망하면 집에 있을 수가 없어서 노숙자 되는 젊은이도 있다. 결혼하지 못하고 부모가 사망해도 국민연금 받으려고 신고 안하는 젊은이도 있다.
? 2007년 여야가 역전된 것에 비정규노동자 증가가 영향을 미쳤나?
계기가 되었다. 파견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비정규고용이 늘어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국민이 더 이상 못 참겠다고 선거로 선택한 것이다. 민주당, 사민당, 국민신당 세 야당에서 파견법 개정이 쟁점이었다.
?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에게 원청기업의 사용자성을 인정한 것처럼 일본에 유사한 판례가 있나?
비슷한 판례가 없다, 2008년 4월 마쓰시다 사건이라고, 현대차하고 비슷한 사건이 있었는데 오사카고등재판소에서 이겼으나 대법원에서 작년 12월 패소했다. 2008년에 금융위기 이후 파견노동자들이 많이 해고당했다. 60건 정도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데 다 개인들이 제기한 해고무효 소송이다. 일본 파견법에서는 한국처럼 2년 이상 사용하면 직접고용이다,라는 조항이 없다. 원청의 지휘를 받았다는 증거가 있으면 정규직이라고 주장하는 한국 대법원 판결을 보고 우리는 용기를 받았다.
? 일본도 한국처럼 노동조합 운동을 탄압하는가?
노조가 힘이 있을 때, 사업장에 활동가가 있을 때에도 그런 일은 일어난다. 이를테면 공산당 활동가를 사찰, 미행한 사건이 있었다. 기업이 노동자의 퇴근 후와 휴게시간에도 계속 감시했다. 기업의 감시는 불법이다 소송을 해서 노동자가 이겼다. 기업이 감시한 것은 직장에서 인간관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대법원 판결로 확정했다.
? 노동조합이 모든 노동자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 방안이 있는가?
금속노조 구호 속에 ‘총고용’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고용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그에 병행하여 임금 쟁취 투쟁이 있어야 한다. 제일 나쁜 조건에 처한 노동자를 대변하면서 전체 임금을 인상하는 활동이 필요하다. 이탈리아 노조를 보면 노동조합이 활동가 단체이지만, 일단 파업에 돌입하면 노조원 수의 5, 6배가 동참하고 그 협약은 전체노동자에 적용된다. 지금은 고용불안정이 확산되어 있기에 일을 하고 있어 실업율은 줄어들었지만 빈곤율은 늘어나는 역설적 상황이다.
미국의 노동안전보건 운동

? 일시: 11월 5일 오후 4시-6시
? 장소: 성수노동자건강센터 교육장
? 통역: 박준규 (건강과 대안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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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강연을 맡은 찰스 레벤스타인 (Charles Levenstein)은 현재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로웰 캠퍼스(UMass Lowell) 보건환경 대학원 석좌교수이고, 크레이그 슬래틴 (Craig Slatin)은 같은 대학원의 교수입니다. 두 분은 노동자 건강의 정치경제학, 노동 환경 정의에 관련된 연구를 주로 진행해왔으며, 보건의료노조, 교원노조와 함께 현장 활동도 활발하게 해온 활동가이기도 합니다. 레벤스타인 교수는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노동자였지만 아들은 노동자가 되지 않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사회운동에 참여했고, 대학교수가 되기 전에는 노동조합연맹의 수석경제학자로도 일했다고 합니다. 슬래틴 교수는 대학 중퇴 후 육류 생산 업체의 운송 노동자로 일하다가 노동환경과 안전보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어 뒤에 소개할 COSH 그룹을 찾게 되었고, 그 곳에서 활동하던 중에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보건대학원을 진학하고 나중에 교수가 되었습니다. 두 분은 그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에서 노동조합과 보건의료 전문가 집단, 또 지역사회 환경운동 그룹이 함께 하는 안전보건 운동에 대해 소개해주었습니다.  

안전보건과 관련된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행동은 광산노동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산별연맹들이 안전보건 문제를 주요 이슈로 다뤄왔지만,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노조운동의 쇠퇴는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미국직업안전보건청 (OSHA)의 ‘뉴디렉션 (new direction)’ 프로그램입니다. 이는 1970년대 후반에 시작된 것으로 안전보건과 관련하여 전문가나 활동가, 노동조합 간부들을 교육하는데 자금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이는 안전보건 교육과 활동가 양성을 물론 기초적인 노동자 조직화 사업 등에도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 레이건 행정부가 집권하고 직업안전보건청에 반노동 인사를 책임자로 선임하면서 이 기금은 노조보다는 사업주가 받아가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1986년에 시작된 ‘유해 폐기물 처리 노동자 훈련 프로그램’입니다. 미국 전역에 매립된 산업폐기물 처리를 위한 슈퍼펀드 (superfund) 법과 연계하여, 이를 담당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훈련 프로그램이 마련되었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안전보건 교육을 진행할 수 있었다지만 그 효과는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노동안전보건 운동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축은 전문가들입니다. 미국 공중보건협회 (American Public Health Association, APHA)는 공중보건 전문가들의 가장 큰 단체로, 주로 대학에 재직하는 연구자들로 구성된 학회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여기의 직업안전보건 분과는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주로 기업에 고용된 산업의학 의사들이 주축을 이루었지만, 이후 60년대 좌파 운동을 경험한 진보적 성향의 의사들이 분과를 장악하면서 다른 공중보건 전문가들과 노동계와 연합을 구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분과는 현재 안전보건 전문가들과 노동계를 연결하는 플랫폼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학회는 1년에 한 번 열리지만, 메일링리스트를 통해 주요 이슈들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면서 토론의 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레벤스타인 교수가 예전에 이 분과의 수장을 맡기도 했었다고 하네요. 국내 언론에는 매우 인색하게 다뤄졌지만, 공유정옥 씨가 반올림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상을 받게 된 것이 바로 이 분과입니다. 공중보건협회는 전문가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는 공간이기에, 사회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무시하지 못할 지위가 있어서 캠페인 활동에 유효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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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또 다른 주체는 ‘안전보건 연합 (Coalitions for Health and Safety, COSH)’입니다. 지역사회 풀뿌리 운동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60-70년대 미국 민권운동의 영향 속에서 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시카고 지역에서 처음으로 COSH가 설립된 이래, 여러 지역으로 이 운동이 퍼져나갔다고 합니다. 매사추세츠, 뉴욕, 필라델피아, 코네티컷 등 여러 주로 COSH 운동이 퍼져나갔습니다. COSH 그룹들은 참가하고 있는 단체들 성격이나 지역 특성들이 다양한데, 이를테면 레벤스타인과 슬래틴 교수가 속해있는 MassCOSH (매사추세츠)는 보건의료 전문가와 노동조합이 주요한 활동의 축이고, 뉴욕 COSH는 강력한 노동조합들이 핵심 세력이며, 코네티컷은 ‘뉴 디렉션’ 프로그램의 영향을 통해 지역사회 주민단체와 연계를 조직했고 특히 히스패닉 이민자들의 참여가 활발하다고 합니다. 활동의 내용이나 방식들이 다양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전문가들, 노동조합, 지역사회, 환경운동 단체들이 함께 연합을 구축한다는 것은 공통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뉴저지 주에서는 주민들의 산업 공해에 대한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적 소송을 하기도 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사용되는 유해 화학물질에 대한 노동자 교육, 혹은 정보공개 투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뉴욕 COSH는 가장 규모도 크고 활동도 왕성한데, 지난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건 당시, 사고 현장의 먼지 실태와 노동자들의 건강문제를 공개함으로써 뉴욕타임즈에서도 이를 다루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캘리포니아 COSH 같은 경우, 노동조합의 조직력이 약화되면서 현재 대학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또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국 단위의 공통 캠페인을 전개하기도 합니다. 오바마 행정부로 바뀌면서 노동부와 OSHA에 개혁적인 인물이 수장으로 임명되었기에 COSH 운동에도 활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있다고도 합니다.

현재, 미국에서 주목해야 할 새로운 움직임은 ‘노동자 센터 (Workers’ Center)’입니다. 이는 전통적인 의미의 노동조합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새롭고 자발적인 형태의 노동자 결사체인데 전국에 100개, 보스턴에만 이미 6군데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주로 이주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고, 특히 남미에서 이주해온 좌파운동의 경험이 있는 노동자들이 적극적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건강문제 뿐 아니라 노동권과 관련된 다양한 상담 활동, 조직화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들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진화하고 발전해나갈지는 알 수 없으나, 발표자 두 분 모두 낙관한다고 하셨습니다 (하긴, 낙관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 오랜 동안 꾸준하게 사회운동에 헌신할 수 있을까요?)

이후 질의응답과 토론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오바마의 집권, 그리고 이어진 중간선거에서의 공화당 승리 같은 정치적 변화가 노동자 건강권 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두 교수는 누가 정권을 잡을까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층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며, 여기에서 싸움과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민중의 투쟁이고, 어렵긴 하지만 변화의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답변이었습니다.
또한, 한국사회에는 낯선 방식인 환경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의 결합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 환경정의 (environmental justice) 개념이 대두하면서, 자동차 노조의 훈련프로그램에서 이 문제를 처음 다루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실, 환경주의자들이 어떤 조치를 취하게 되면 그것이 해당 사업장에 속한 노동자들에게는 해가 되는 경우가 있고, (이를테면 유해 사업장 폐쇄로 인한 일자리 상실), 노동조합에서는 조직 유지를 위해 중요한 환경문제임에도 외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함께 가야 합니다. 이를테면 산업폐기물 처리와 환경복원을 위한 기금인 슈퍼펀드의 경우, 다른 방식, 이를테면 ‘노동자 슈퍼펀드’를 마련하여 유해산업에 종사하다 해고된 노동자들의 지원프로그램이 생겨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슬래틴 교수는 이를 ‘정의로운 전환’이라고 부르며, 산업구조의 이행 과정 자체가 정의롭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흔히 환경운동이 엘리트그룹에 의해 주도되는 경향이 있고, 일상적인 환경오염은 중요하게 다루면서 막상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건강문제나 고용의 권리는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두 분은 가장 유명한 ‘시에라 클럽’과 함께 지역연대운동을 구축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환경 문제는 엄연한 계급 문제이며, 노동자들의 권리와 그 문제로 인해 영향을 받는 지역사회가 함께 운동해야 할 과제라는 것이 이 분들 주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