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 갈등 상황의 마지막에는 꼭 법이 튀어 나옵니다. 한진중공업 파업 때도 그랬고 최근 강정마을 대치 때도 그랬습니다. 그 전에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시행 때도 그랬고 4대강 사업 때도 그랬으며 쌍용자동차 때도 그랬습니다. 더 거슬러 가보면, 새만금 때도 그랬고 천성산 때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경우에, 법은 정부 편이었고 사용자 편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정부와 사용자에 반대한 시민단체와 노동자들은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 무법천지를 조장한 사람으로 매도당하였습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법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법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학문으로 ‘법철학’이라는 분야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수 많은 철학자와 법학자들이 오로지 법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숱한 답들을 남겼음에도 그에 대한 논쟁이 끝나지 않은 것을 보면, 생활인인 우리가 법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 자체가 무모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법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상처를 받고 성과를 얻는 것은 바로 우리 생활인이기에, 우리도 그 법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물음의 초점을 조금 바꿀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법이 원래 무엇인지 그 본질을 캐묻지 말고, 그냥 너 누구냐 하고 정체를 밝힐 것만 요구하는 것입니다. 본질에 대한 것은 학자에게 맡겨 놓고, 현실에서의 정체에 대해서만 우리가 물어보자는 것입니다. 최소한 그 정도는 해야 지금 법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정색을 하고 제대로 한 번 물어봅니다. 법, 너 누구냐?
법이 원래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는 잘 몰라도 현실에서 그것이 어디에서 만들어지는지는 우리가 잘 압니다. 바로 국회입니다. 국회에는 여러 구성원이 있는데, 법을 만드는 주체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수당 국회의원들입니다. 다수당 국회의원들이 마음만 합치면, 우리 사회에서 못 만들 법은 없습니다. 그 법이 정당한지 아닌지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지 아닌지는 차후의 문제이고 어떤 내용의 법이든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살고 있는 집을 기업이 막무가내로 몰수해 가는 것을 허용하는 법이 있고, 종교적 이유로 총을 들지 않아도 처벌을 하는 법이 있습니다. 분명 적법하게 결성된 노조인데도 그 사업장에 다른 노조가 있으면 단체교섭을 요구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법이 있고, 사업상 계속 필요한 업무인데도 근로자는 기간을 정해 채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법이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일도 아니고 오늘날의 일도 아니지만, 한 때 어느 큰 나라에서는 금주법이라고 하는 것이 있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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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등법원 누리집 “공정한 눈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듭니다” 
법은 다소 변덕스럽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허용했던 행위를 지금은 금지시키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옛날에는 선거 운동시 현수막과 벽보를 마음대로 붙여도 되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애초 파견노동자를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법은 게으르기도 합니다. 필요한 내용을 규정해 놓고 있지 않은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부당하게 단가인하를 요구하는 행위를 금지시키지 않으며,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차별하는 행위도 금지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동성애자가 혼인하는 길을 열어놓고 있지도 않고, 이전에 군에서 의문사한 사람들에 대해 보상하는 절차를 마련해 놓고 있지도 않습니다. 
또한 법은 소신이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돈이나 힘이 있는 사람에게는 관대하고 돈이나 힘이 없는 사람에게는 가혹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엄격하게 작용하고 어떤 때는 한없이 느슨하게 작용합니다. 정부 요직에 나가려는 사람이 위장전입이나 허위세금신고를 해도 문제가 안 되는 반면,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이 정책의견을 발표한 것만으로 구속이 되기도 합니다. 정리해고의 요건이 법에 규정되어 있는데도 그 요건을 대폭 완화해서 해석하는 것을 용인하는 반면, 비리사학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사의 자격에 대해서는 제 규정을 물 샐 틈 없이 적용시킵니다. 1심, 2심, 3심 법원의 판단이 다 달라질 때도 있는데도 법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이처럼, 법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숫자의 힘에 의존하며, 실제 기능상으로 변덕스럽기도 하고 게으르기도 하고 소신도 없습니다. 따라서 법이 본질적으로는 어떠한지 몰라도, 현실에서의 법은 신성하거나 고결한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법은 완전한 성인군자의 모습이 아니라, 불안정한 젊은이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요즘 개그콘서트에서 ‘애정남’ (애매한 것을 정리하는 남자)이라는 코너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필자는 그 코너를 보면서 결국 법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했습니다. 즉, 힘 센 사람들이 애매한 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정리해 놓은 것이 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법 중에는 사리에 맞게 정리되어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힘의 논리에 따라 정리되어 있습니다. 오른손잡이가 많다는 이유로 영화관 좌석의 오른쪽 손받침을 자신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정리하는 것이랑 별반 다르지 않게 정리되어 있는 법이 많습니다. 영화관 좌석의 손받침 정리가 정당성을 획득하려면, 왼손잡이가 그것을 양해하거나 왼손잡이 전용 줄을 마련하거나 왼쪽 끝 좌석은 무조건 왼손잡이에게 배정하는 등의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조치 없이 무조건 오른쪽 손받침이 자신의 것이라고 정리해 놓으면, 그것은 다수의 횡포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법들 중 많은 법이 그런 식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법을 이렇게 이해하면, 법에 대해 과도한 기대를 건 뒤 실망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또한 미리부터 법에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 우(愚)를 범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법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하기 나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회에서 다수의 국회의원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좋은 법을 얼마든지 많이 만들 수 있습니다. 법이 작용하는 모습을 감시하고 견제하면 법이 올바른 모습으로 기능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법이 어렵다고도 하는데, 그것도 과장된 것입니다. 운전면허시험에 대부분 다 합격하는데 그 시험은 곧 도로교통법에 관한 것입니다. 도로교통법에 통달하지 않아도 운전하는데 지장이 없듯, 법에 통달해야 한다는 강박만 없다면 법이 꼭 그렇게 어려운 것만도 아닙니다. 필자는 어떤 분야를 책임지고 있는 시민단체의 담당자가 법을 잘 모른다는 말을 할 때면 실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모든 문제가 최종적으로는 법으로 귀결되어 있는데 그 분야에 대한 법을 잘 모르면 도대체 무엇을 안다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법에 대한 마지막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법이 신성하지도 고결하지도 않고 나아가 힘 센 사람들이 자신의 의도대로 정리해 놓은 것이라면, 그것을 안 지켜도 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도 법철학에서 다루는 문제이지만, 현실에서도 이 문제를 비켜갈 수 없으니 거칠게나마 그에 대한 답변을 해 보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필자는 법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힘을 키우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차원에서도 그렇고, 나중에 힘을 키웠을 때 새로 만들어진 법을 지키라고 요구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저는 법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법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힘 센 사람이 자신의 의도대로 정리해 놓은 것에 무조건 순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 법이 정의를 구현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분명한 이상, 무조건 그에 순응할 이유나 근거는 없습니다. 우리는 정의를 추구할 더 큰 권리를 가지고 있고 또 그럴 의무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현실 법을 어기게 되는 경우, 현실 법에 따른 제재는 감내해야 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제재를 감내하는 행위도 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했을 때도, 사약을 받아 드는 것으로 그 처벌을 감내했던 것이지 정의의 요구를 외면했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것은 매우 험난하고 가혹한 일이지만 그러기에 더 위대하고 분명한 길입니다. 
 
지금 크레인에서 농성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은 나중에 형사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김진숙 지도위원도 그것을 피할 생각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 김진숙 지도위원이 유죄입니까? 예, 현실 법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정의의 이름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법의 모습, 이른바 자연법에 비추어 보아도 그것이 올바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연법에 따라 정의를 추구하면서도 현실의 법에 따른 제재를 감내하는 것으로, 현실의 법을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진다면, 우리가 법을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그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