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안 하는 것을 하는 것이 제 일관성이죠”

– 노동건강연대 주영수 대표

전수경 / 노동건강연대
지난 8월말 인터넷신문 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 단체 회원 분들은 사무실에서 발송한 메일을 통해서 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름 내 언론에 오르내리던 ‘캠프 캐럴’의 고엽제 문제에 대해서 고엽제만이 아니라 심각한 발암물질이 검출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던 주영수 한림대 교수. 100가구 정도가 사는 작은 마을에서 12살 아이들 두 명이 백혈병과 재생불량성빈혈에 걸렸고, 20대 주민 두 명이 백혈병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그는, 주민들에게 공포만 안겨주고 지역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을 먼저 이야기하더군요.
언론에 났으니 할 일을 다 했다거나 정부에 대책을 세우라고 목소리만 높이는 태도는 없습니다. 권력이 없는 사람들, 정보가 없는 사람들이 그와 만나게 된다면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강력한 지원자를 만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분이 노동건강연대의 상임대표이시니 어찌 든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지난 호에서 사무실의 동료를 인터뷰했던지라 다시 같은 단체에 있는 이를 만난다는 것에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떠들썩했던 환경, 인권 관련 사건 중에서 그가 관여한 일이 적지 않음을 우리 회원들께 알리고 싶어서, 주민의 처지에서 피해자의 처지에서 약자의 처지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분투해 온 그 속마음이 궁금해서 지하철 4호선 평촌역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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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프캐럴이 있는 경북 왜관에 다녀오셨다고요, 미군기지와 환경문제는 정말 분리할 수 없는 문제로군요. 
_ 왜관 이라는 곳에 대해 먼저 설명을 좀 드려야겠네요. 1960대부터 50년간 (주한미군의) 병참기지였던 곳이 왜관이죠. 그 전부터 왜의 관이 있던 곳이라 해서 마을이름도 그렇게 지어졌다고 해요. 지리적 조건이 그렇게 만든 거죠. 베트남전 10년 동안 사용하던 고엽제를 수거해서 태평양의 조스턴 섬에 폐기처분했는데 그 중간 저장지가 한국의 DMZ와 ‘캠프 캐럴’이었다고 해요. 1978년 미국은 카터정부 때 ‘러브커낼 사건’이라고 중요한 환경사건을 겪게 되는데 그 후 고엽제를 폐기하라는 정부지시로 매립을 하게 됐어요. 고엽제는 유기염소제초제로 (고엽제에서 나오는) 다이옥신이 암이나 신경질환에 걸릴 위험이 높아요.
백혈병, 림프종, 폐암 등 10종의 암을 포함한 15개의 후유증이 알려져 있죠. 얼마 전 스티브 하우스라는 미군퇴역군인이 왜관을 방문해서 고엽제를 묻은 곳을 증언했고 정부는 그 드럼통을 찾겠다고 했지만 땅을 파도 못 찾았다고 하잖아요.
사실 고엽제 다이옥신은 문제의 일부일 거라고 봐요. 50년 전이고 고엽제 매립양이 많지 않을 것이고, 이번에 나온 주민 건강조사결과는 미군기지의 다른 오염물질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죠.
여기서 잠시 미국의 ‘러브커넬 사건’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1892년 윌리엄T.러브가 주정부로부터 승인을 얻어 운하건설을 추진하던 중 1910년 미국의 경제불황으로 건설이 중단되고 말았다. 그후 방치되어 있다가 1940년대 후커 케미컬이라는 화학회사가 인수하여 공장에서 버리는 화학물질을 철제 드럼통에 넣어 이 웅덩이에 매립하였는데, 이때 매립된 화학물질은 PCB, 린덴, 다이옥신, 트리클로로페놀, 헥사클로로시클로펜타디엔 등 매우 유독한 물질이었다. 
1942년부터 1950년 사이에 무려 2만여t의 유독성 화학물질을 운하에 매립한 후 1953년 이 화학회사는 이곳을 포함한 주변지역을 시교육위원회에 기증하였고, 교육위원회는 이곳에 초등학교와 주택을 건설하였다. 이 지역 주민들은 피부병과 두통이 자주 발병하였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유산율이 높았다. 1976년 큰 홍수 후 가로수와 정원의 꽃이 죽어 갔고, 연못에서는 유해한 화학물질을 포함한 물이 표면으로 스며 나왔다. 또한 많은 주민이 신체의 통증을 호소했다. 뉴욕주 보건당국이 실시한 역학조사 결과 이 지역의 오염도이 확인되고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미국 연방환경처는 1978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이 지역을 환경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거주하던 주민들에게 즉시 떠날 것을 요구하였으며, 문제의 학교를 폐쇄하였다.   출처: ‘환경사전’ 환경운동연합
□ 미군기지 문제가 관심 갖고 있는 사람들 외에는 잘 모르는 대표적 문제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저만 해도 그렇고요.
_ 미군기지가 잘 보면 대도시 한복판에 있어요. 대구, 춘천, 군산, 서울… 외곽에 있지 않죠.
우리 군부대는 시골에, 우리 눈 밖에 있는데 말이죠. 미군기지가 있던 도시에서 시민발언권이 높아지면서 피해자의 목소리가 중요해졌어요. 너무 오래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었던, 최소 50년 이상 피해를 입었던 주민들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죠. 이번 왜관 ‘캠프 캐럴’은 현지 역학조사를 제안 받으면서 제가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여론화가 중요하니까.
이번 사안으로 동대구에서 회의를 하는데 대구경북지역이 시민운동이 어려워요. 대구지역 환경단체들이랑 회의를 하는데 그날이 복날이라 제가 삼계탕을 사주고 왔어요. 힘들게들 일하고 있으니까.
□ 미군기지 주변 주민들이 공통되게 호소하는 문제들이 주로 무엇인가요.
_ 어느 기지든지 헬기, 공군기지 피해가 높아요. 소음, 유류 오염 등 문제가 생기죠. 매향리 사격장의 경우 오폭으로 인한 사망, 유산, 불임, 불면, 스트레스 등 문제가 심각했어요.
이번 왜관의 경우에는 유기용제 오염이 심각합니다. 우리 문제제기로 환경부가 역학조사를 하기로 했어요. 주민추천 전문가로 제가 참여하게 되었죠.
□ 지난 8월에 서울역 노숙인을 코레일이 추방하겠다고 하면서 이슈가 됐는데요, 걱정이 많으셨죠? 노숙인 건강지원 활동을 하면서 노숙인 인권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셨잖아요.
_ 사실 코레일이 서울역사 안 노숙인을 쫓아내겠다고 했을 때 철도공사를 비난하는 여론이 많았는데 서울시가 비난받을 일을 철도공사가 대신 받는 면이 큽니다. 노숙인이 있으면 민원도 많이 들어오고 실제로 철도공사 처지에서는 힘겨운 면이 있어요. 서울역 노숙인 300명.중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10~20명을 선별해서 내보낼 수도 없고. 노숙인들도 ‘우리 이러면 안 된다 ’화장실 깨끗이 쓰자’고 서로 제재하는 문화가 있거든요. 공중시설을 빌려 쓰는 것이니까요. 강제로 쫓아낸다고 해결 되는 게 아니고… 흐름, 가능성이 있어요. 자체 순기능이 있고 그런 부분을 도와줘야 하는데 서울시와 복지부가 알아서 해라 서로 미루다 결국은 서울역이 나서게 된 것이죠. 서울역 측도 문제는 있죠. 위생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공간이 넓으니까 SOS 센터부터 만들 수도 있고요.
□ 서울역에서 노숙인을 내보내게 되면 노숙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나요.
_ 그렇게 되면 노숙인 들은 안 보이는 곳, 남산 같은, 자기 영역이 아니었던 곳에 숨어들게 되는 겁니다. 퍼져나가죠. 풍선효과라고 하잖아요. 영등포로도 많이들 갔다고 해요. 문제는 그분들이 굉장히 취약하다는 것이에요. 2009년 통계지만 한해 숨진 노숙인이 357명이예요. 하루 한명씩 사망했다는 것인데. 사망원인이 뇌손상이 많아요. 응급처방이 되었으면 사망에 이르지 않을 수 있었다는 얘기에요. 이제는 안 보이는 곳에 죽어가겠죠. 그나마 파악이 되고 있었는데.
8월 21일 코레일이 노숙인을 내보낸다고 하는 그 밤에 서울역에 같이 있었어요. MBC, KBS에서 카메라 나와서 계속 들이대니까 강제로 내보내질 못하더라고요.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위축되는 상황에서도 노숙인 지원단체들이 서울역사에 들어가 앉아서 밤샘을 한 것은 훌륭한 판단이었어요.
여기서 잠시 신문기사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주영수 대표는 숫자 한자리수도 틀리지 않고 노숙인 사망통계를 말하였군요. 혹시나 해서 인터넷 검색을 한 게 참 죄송한 마음입니다.
최근 5년 동안 노숙인이 하루 한 명꼴로 숨졌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주영수 한림대 의대 교수(47·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는 전국 노숙인 쉼터 등록자료(2만2148명·여성 노숙인 854명 제외)와 통계청 사망자료를 분석한 결과 1998~2009년 노숙인 사망자 수는 2923명으로 집계됐다고 21일 밝혔다.
조사 결과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5명에 불과하던 노숙인 사망자 수는 1999년 95명, 2000년 142명, 2003년 304명으로 꾸준히 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4년 사망자가 284명으로 줄긴 했지만 2005년 300명, 2006·2007년 325명, 2008년 319명, 2009년 357명으로 300명대를 유지하고 있다. 2005년부터 하루 한 명꼴로 사망한 셈이다. 사인은 다쳐서 숨진 경우(664명)가 가장 많았고 술 관련 간질환(412명)이 뒤를 이었다. 암과 심근경색 등 순환기계 질환도 각각 389건, 386건이었다. 일반 사망률 대비 노숙인 사망률은 1999년 1.47배에서 2006년 이후 1.9배 이상으로 높아졌고, 2009년에는 2.14배로 조사됐다.

 

□ 노숙인 건강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_ 노숙인 건강 문제를 제가 처음 학술적으로 정리한 것이 1999년 예방의학회 학술대회 자리였어요. 인기 있는 주제였죠. 발표장이 꽉 찼으니까요. IMF사태를 겪으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한 노숙인들에 대해서 회원들이 거리진료를 시작했어요. 2,300여명의 노숙인에 대한 진료기록을 토대로 그들의 건강실태, 생활을 분석했어요.
저는 그 때 박사논문을 쓰던 중이었는데 8월말에 을지로 지하도에 가 보았죠. 너무 놀라 눈물이 날 정도였죠. 근처 영락교회에서 나와 밥을 주고 있었는데 700명이 줄을 섰더군요. 충격적이었습니다. 9월에 설문지를 만들어 각 대학 진료동아리 학생들과 설문지를 들고 1:1 조사를 했어요. 정신 심리평가도 했죠.
□ 당시 노숙인 규모가 실제보다 적게 추정되는 것을 대표님이 바로잡아 주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_ 당시 서울시가 노숙인 수를 발표했는데 그게 다가 아니다, 자는 사람을 최소 추정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죠. 노숙인들 공간이 서울역, 남대문, 서소문 쪽과 을지로 쪽 구역이 달라요. 을지로 쪽 노숙인들은 상태가 비교적 좋은 편이고, 이분들은 서울역 쪽 노숙인들은 ‘인간 말종’이라고 우습게 봅니다. 양쪽 인원을 보니 5천 명 규모로 추정이 되더라고요.
서울시에서 항의전화가 왔어요. 우리가 파악하기로 3천 명인데 왜 5천 명이냐, 근거가 뭐냐. 서울시가 99년 당시 영등포에 이라고, 3천 명이 들어가는 시설을 지어놓고 노숙인들에게 들어오라고 할 때였거든요. 그 후로는 서울시에서 자문요청하는 전화가 왔죠.
□ 그때부터 지금까지 노숙인 진료가 진행되고 있다니 놀라운데요.  
_ 진료는 매주 금요일 서울역 지하도에서 진행되고 있어요. 진료에 참여하는 의대 학생들을  운영위로 조직하고 연합동아리를 만들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저는 조직으로 만들어지는 순간 망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발적으로 모이는 성격이어야 오래 간다고 생각한 것이죠. 제 의견대로 되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진료소는 안정적으로 운영이 되고 있어요.
조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은 조직 없이 하는 활동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하지만, 인의협 회원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대해서 저는 정치적 성향을 배제하는 활동이 오래간다고 보았어요. 대신 그 학생들을 데리고 1년에 한 번 씩 섬에 가서 진료하면서 공부도 하고 오죠. 노숙인 진료활동 하는 학생들하고 노화도, 소완도 같은 곳에 가서 진료활동하고 토론도 하는 것이죠. 여름마다 섬으로 간 지가 10년이 되었네요.
그 덕분에 학생들이 바뀌어서 와요. 진료소 출신들이 해마다 졸업을 할 때마다 ‘나의 진료소’였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10명은 되죠. 이 학생들 불러서 연말에는 제가 꼭 밥을 삽니다.
□ 정치적 성격을 배제하면서도 그렇게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나오다니 놀랍습니다.
_ 대학교 때 안병욱 민중 신학자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어요. ‘예수와 여인들’을 주제로, 예수가 왜 위대한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나를 설명하셨죠. 예수가 원래 죽을 생각이 없었는데 주변 여인들이 애처롭게 쳐다보는데 안 죽을 수 있나, 하는 거죠. 어머니도 있고, 마리아 막달레나 같은 사모하는 여인도 예수를 보는 눈이… 부활할 때도 마찬가진데 무덤 앞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 부활을 안 할 수가 있나, 하는 거죠.
저도 비슷해요. 철학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눈빛이… 한해 여름 바빠서 섬에 못 갈 것 같았어요. 그런데 학생들이 ‘선생님이 안 가시면 우리끼리라도 섬에 가겠습니다’ 하는데 그 눈빛이… 그래서 10년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섬으로 갈 수 있었던 거예요.
조직화라는 목적의식을 갖지 않고 제 일만 한 것 같은데도 조직이 됐다고 할까요. 의과대학 교육이 기술적 교육만 주로 하니까 제가 섬에 가는 것은 교육의 목적도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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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 원유유출 사건 때도 바쁘셨죠.  아, 이 사건도 벌써 잊혀진 일이 된 것 같습니다.
_ 제가 산업의학을 하려고 예방의학을 공부했지만 환경역학 일을 많이 했어요. 미군기지 문제 같은 것이 환경역학이죠. 산업의학은 임상이 중요해지고 환자 개인진단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죠. 예전에는 두 영역이 구별이 안 되었지만.
태안은 현재 환경보건센터가 만들어지고 운영되고 있어요. 문제는 4년이 됐는데, 틀은 만들었는데 운영이, 주변 연계해서 하는 운영이 잘 안돼요.
□ 벌써 4년이 되었군요. 당시 태안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정확하게 알려진 것 같지가 않습니다. 
_ 원유의 반이 휘발성 유기화합물인데 사람에게 노출되면 안 되는 물질이죠. 그런데 당시 전국에서 사람들이 방제 작업하러 모이고, 주민들도 노출됐죠. 원유덩어리는 바다에 침전되고 양식어패류에 쌓이거든요.
양식업을 못하게 됐어요. 상당기간 재배와 채취를 못하죠. 위험한 일은 남모르게 문제되는 것을 파는 것이죠. 주민들은 경제적 피해가 있고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일부 암이 늘었다는 주장도 있어요.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PTSD)가 늘고 자살이 늘었다는 보고도 있고요. 당시 주민대책위장이 굴 양식하던 분이었는데 분신자살한 뉴스도 났었잖아요. 환경오염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지금은 잊혀진 지역이 되었어요.
□ 온 국민이 태안으로 달려가서 기름 때 묻은 바위를 닦았는데 노출되면 안 되는 물질이었다니 놀라운데요. 
_ 초기대응을 잘못했어요. 주민을 제일 먼저 대피시키고 방제작업을 해야 했는데 다 달려가서, 초등학생까지 부모 손잡고… 150만 명이 달려갔죠. 해병대들은 3~4개월씩 해병대 티셔츠 하나 입고 마스크도 안 쓰고 일했어요. 인기가수가 가서 안전하다고 홍보하고. 암환자가 늘어날 수 있겠다 생각할 수 있어요.
□ 그렇게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누구 하나 경고를 하지 않았다는 게 이해가 안 가는군요.
_ 그 때 제 주장이 대피해야 한다, 보호장구 있어야 한다 주장했는데 언론이 안 실어줬어요. 이렇게 봉사열의가 높은데 찬물을 끼얹는 주장을 기사화할 수 없다는 거죠. 녹색연합이랑, 12월 7일 사고가 났는데 12월 16일 기자회견을 했는데 어느 언론에도 안 났어요. 어떤 환경단체는 심지어 버스를 타고 단체로 가기도 했죠. 대피하고 제거했어야 하는데.
12월 26일 건강대책에 대한 전문가 미팅이 있다고 해서 갔는데 주민건강을 생각해서 접근을 막고 보호구 지급하자고 했더니, 회의 주제가 건강영향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지라는 거예요. 어떻게…. 원유유출 현장에 가기 전이나 후나 건강에 이상이 없도록 하는 게 우선인데 어떤 이상이 나타나는지 연구하겠다는 것은, ‘생체실험’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죠.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건강피해연구라니….
□ 정부의 존재이유가 의심스러운데요, 재난에 대한 시스템이 전혀 없는….
_ 20년 전 알래스카 원유유출 사건을 보면 아직도 통제가 안 풀린 데가 있어요. 20년 이상 관리대상인 지역이 있는데 태안은 4개월 후 바로 풀렸죠. 주민지원, 대피, 보상도 없이 사후관리 매뉴얼도 없고. 피해보상이 없으니 주민을 비난하기 어려워요. 위험한 해산물이 유통되는 것은 정부의 책임이죠. 원유유출의 책임자인 삼성도 배상을 안했어요. 피해액수가 2~3조 된다고 추정하는데 겨우 4천억을 보상에 썼어요.
□ 음 재난 지역 주민 보호에 대해서는 거의 무정부상태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군요.
_ 미군기지도 마찬가지죠. 문제가 매우 복잡하고 많아요. 과학연구만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주민에게 애정이 있어야 대책도 나오는데 정부가 연구자에게 맡겨버리고 말죠.
왜관도 정부가 쉽게 생각하고 있어요. 전부 조사해야 하는데, 주민이 50년간 피해를 입었는데, 고엽제만 안 나오면 괜찮다, 생각하는 의도가 명확한 거죠. 주민 추천전문가로 제가 들어갔으니 주민입장에서 생각하여 애쓰긴 하지만.
주민들이 50년 세월을 말하면서 헬기가 대포 매달고 왔다갔다 하는데, 무서웠다, 힘들었다 하잖아요. 고엽제 안 나와서 괜찮다고 어떻게 말하나요.
□ 노동조합하고도 사업을 많이 하셨죠. 검진사업도 많이 하실 테고…
_ 노동조합에 대해서 서운한 것도 많고 불만도 많지만 얘기하지 않겠어요. 확실한 것은 노동운동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유럽 출장을 가서 놀란 것이 북유럽, 독일 같은 곳은 사회구성 주체로 노동조합이 자기 위치를 갖고 있는 것이 부럽기도 하고, 놀라웠어요. 독일 산재보험의 의사결정은 노사 50:50으로 하더군요. 동등하게.
□ 요즘 개인적인 고민이랄까, 개인적인 이슈는 무엇이 있나요.
_ 사실 이제는 일을 좀 내려놓고 농사를 짓고 싶어요. 농사라기보다는 템플스테이 같은 걸 한 번 해보니 의외로 체질에 맞더라고요 (웃음). 워낙 나서는 자리를 못해요. 불편해서요. 나이가 들면서 삶과 죽음을 생각해요. 엊그제 돌아가신 이소선 어머니가 82세에 돌아가신 것인데, 제가 36, 37살 더 살아야 하는 나이인데. 내가 지금 47살이니까 짧게 남았어요. 하고 싶은 거 한 건 얼마 안 돼요.
애들한테도 어떻게 얘기할까. 어떻게 사는 것이 잘하는 걸까. 뭐가 잘하는 걸까. 무엇이 정답일까 요새 자주 생각해요.
□ 하시는 일이 워낙 많아서 하나씩이라도 후계자를 키워야 쉬실 수 있지 않을까요 (웃음).
_ 그렇죠. 후계자를 키워서… 제가 구금시설수용자 인권, 국제결혼이주여성 실태조사도 했었고, 오늘만 해도 홈리스 연구회, 도시 공간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고요, 진폐 노동자 문제도 있고. 섬 주민들의 건강문제도 있고, 사회적 소수자, 마이너리티의 문제를 주로 해왔는데. 한 분야씩 후배에게 가르치고 넘겨주고 있기는 해요.
□ 마지막으로 그동안 해 오신 일을 하나로 관통하는 원칙이 있다면 말 해 주세요.
_ 주변에서 안 하는 것을 하는 것이 제 일관성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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