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

마당에 나서는데 봄의 시골 아침 공기는 차갑고 상쾌하고 충만하다.

옆집 민준이 네 앞을 지나면서 할머니와 눈인사를 나눈다.

“출근하는 거야?”

“네, 근데 오리들이 안보이네요? 어디 갔대요?”

“응, 뒤편 닭장에 있지”

“왜요?”

남의 집 오리얘기와 수세미 씨를 뿌렸는데 싹도 안 나온다는 둥, 오늘의 수다를 잠깐 떨다가 전철역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나는 인사성 밝은 동네 새댁.

전철역에 들어가며 전광판을 보니 열차가 전전역에 도착해 있다고 나온다. 서울과 달리 역 사이가 멀어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오케이. 여유롭게 정기권을 충전해도 되겠군.

역사의 한쪽에 있는 기계 앞에 섰다. 정기권 충전을 위해 6만 4천원 지폐를 정신없이 밀어 넣고 나서 돌아보니 내 주위에 할머니들이 모여 서있다.

“새댁아~ 나 차표 한 장만 끊어주게”

주위의 할머니들이 “나도 나도”를 중얼거리신다. 아무래도 ‘누구 하나 걸리길’ 한참 기다리신 듯 하고 때마침 내가 나타났나 보다. 구부러진 허리에 짐 배낭을 짊어지고 주름이 조글조글 한 얼굴로 애교웃음을 날리시다니, 한두 번 부탁해본 솜씨가 아니다.

할머니들의 표를 다 뽑아드리고 돌아보니 어느새 서울 가는 열차는 그새 가버렸다. 30분에 한 대 있는 열차인데… 오늘도 또 놓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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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표 파는 곳은 폐쇄되고 기계들만 즐비하다. 

  

다음 차를 기다리며 대합실 나무의자에 앉는다.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있는 일. 원망스런 눈으로 창구를 쳐다보지만, 요즘 전철역이 다 그렇듯, 자동기계만 놓여있고 창구는 굳게 닫혀있다. 시골역이라 이용객이 노인들인 덕분에 자주 내가 ‘직원’처럼 표를 뽑아주는 일을 대행하고 있다. 나는 노인들에게 친절한 젊은이.

넓고 한산한 역 대합실에서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동참한다. 일단 서로 묻는다. 어느 마을에 살고 있고 뭐 하러 서울(혹은 양평 읍내) 나가는지. 마침 양평 장날이라 할머니들이 많다. 표를 끊어줘서 고맙다고 한 할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다. 옆의 할머니도 내 등을 토닥여 주신다. 잠자코 앉아 “네~”하고 웃는다. 나는 붙임성 좋은 막내딸 같은 새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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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 한산한 대합실 풍경, 주민들이 열차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눈다 

전철이 도착한다. 할머니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한 할머니가 나와 나란히 앉으신다. 양수리에 볼일 있어 나가신다고 한다. 양수리 말 나온 김에 양수리엔 들어온 도시가스가 우리 동네엔 언제쯤 들어올지 한참 수다 떨다가 할머니가 내리고 나는 혼자 남았다. 

앞으로도 한 시간 반 이상을 더 가야 하니, 책과 스마트폰은 나의 무기다. 길고 지루한 전철 안에서의 시간과의 싸움이 나를 기다린다. 심심한데 뭐 재미있는 것 없나…하며 두리번거리니 전철 안의 몇 안 되는 승객들 모두 서로를 관찰하고 있다. 내 맞은 편 할머니가 나를 한참 살피더니 “서울 가셔?”하고 묻는다. 같은 차를 타고 가는 이유로 우리는 이웃처럼 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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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 시골마을을 누비는 전철 객차는 승객이 드물다.

한참을 달리니 창밖에 아파트가 한두 개 들어오기 시작한다. 도심역이다. ‘도심’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시골의 끝자락에 있는 역이다. 그래도 아파트가 좀 있는 동네라 사람들이 좀 탄다. 이때까지 객차에 열 명도 안 되던 승객 수가 늘어난다. 동시에 나도 자세를 고쳐 앉는다. 한가롭게 늘어져 있던 등을 곧추세우고 두세 자리에 걸쳐 있던 다리도 곱게 접어 똑바로 앉는다.

여기서부터는 모르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는 셈이다. 사람들도 더 이상 서로를 살피지 않고 각자의 도구에 집중한다. 핸드폰이나 책에.

점점 아파트 숲이 많아지더니 구리역에 도착한다. 여기서부터는 완전한 도시구역이다. 더 이상 산과 숲은 보이지 않고 온통 고층아파트의 장벽뿐이다. 승객들도 반짝거리는 도시인들이다. 손에 테이크-아웃 커피 잔을 들고 다른 손엔 스마트폰을,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있다. 이어폰과 스마트폰은 ‘말 시키지 말아주세요’는 심경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제 노인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젊은 사람들은 눈을 내리 깐다. 나 역시 책에 얼굴을 묻고 옆 사람이 들고 나는데 신경 쓰지 않는다. 창밖은 온통 회색. 동시에 나의 근육과 신경도 회색의 콘크리트에 주파수를 맞춰둔다. 눈길은 책에 고정하고 표정은 딱딱하고 무미건조하게, 입가는 야물게 닫는다.

이제는 옆 사람에게 말을 걸어도 소용없다. ‘어디 가셔요?’라고 물어봤자 ‘별걸 다 묻네’라며 뚱한 표정을 지을게 뻔하다. 다들 그렇게 서로 묻지 않기로 하고 전철 안의 밀폐된 공기는 그 암묵적 합의를 옆 칸으로 옆 칸으로 확대시켜간다. 그래서 나도 ‘말 걸지 말아주세요’의 뜻을 밝히며 책과 이어폰으로 무장한다.  

우연히 앞사람과 눈길이 마주치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을 피한다. 궁금하지도, 친근하지도 않은 표정으로.

전철이 거대한 도시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고층건물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타고 객차 안의 구두굽 소리가 많아질수록, 아이폰과 이어폰의 수가 많아질수록 공기 중의 깔끔함과 까칠함의 밀도도 높아진다. 전철이 주행하면서의 진동은 나의 몸을 쉴 새 없이 흔들어댔고 두 시간 가량 진동 속에 흔들리던 나의 체세포들은 한계상황에 도달하였다.

어느덧 나는 도시여자로 변화했다.

7호선을 타고 내방역에 내리자 온통 모르는 사람, 바쁜 사람, 북적이고 있다. 나 역시 한손에 커피를 들고 바쁘게 걷는다. 한손에 6만 4천 원짜리 전철정기권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와 업무통화를 하며.

길가에 야쿠르트 아줌마도 앉아 있고 유모차 끄는 애기엄마도 있지만, 이제 그런 풍경은 더 이상 나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나는 바쁜 도시의 직장인이다. 오늘 저녁 퇴근하기 전까지, 여기 서울에서 머무는 동안 나의 감정은 도시에 걸맞게 팽팽히 긴장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