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편적 복지 담론 속에서 산재보험 개혁 전략1)
1. 보편적 복지 담론 속에서 노동자 복지
무상 급식 논쟁으로 촉발된 보편적 복지 논쟁이 정치권을 달구고 있다. 진보 교육감과 한나라당 단체장은 연일 날을 세우며 무상 급식 시행 여부에 사활을 걸고 있다. 박근혜 씨도 복지를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한 발걸음을 시작했고, 이에 뒤질세라 민주당은 연일 ‘무상’ 정책 시리즈를 발표하며 복지 정당으로 자리매김하고자 안간힘이다. 이에 화들짝 놀란 한나라당과 청와대는 ‘복지 포퓰리즘’ 담론을 공세적으로 제기하며, 무상 정책 시리즈의 비현실성을 폭로하기에 여념이 없다.
“오세훈 서울시장 블로그에 쓰인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 비판글”
격세지감을 느낄 노릇이다. 특히 그간 복지 논의를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로 삼아왔던 진보 정당들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것 역시 한국 정세의 변화무쌍함을 증명하는 것일까? 현재로서는 그 어느 누구도 현 상황의 시대정신과 화두가 ‘복지’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이는 급격한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 양극화가 날로 심화되고, 사회적 부의 재분배 구조가 파괴된 한국 현실에서 복지가 시급한 시대적 요청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앞으로 한동안은 그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 불황기가 아닌가?
이에 아이들 먹거리 문제로 시작한 복지 논쟁은 의료, 보육 등으로 그 논의가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대로라면 연금이나 교육, 그 밖의 사회서비스 등에 대한 논의도 촉발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이한 현상이 존재한다. 보편적 복지를 논함에 있어 핵심적 논의사항일 수밖에 없는 한 영역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조짐이 안 보이는 것이다. 바로 노동시장 영역에 대한 분석과 보편적 노동 복지 확대에 대한 논의이다.
현재 보편적 복지 제도의 근간은 5대 사회보험이다. 그런데 현재 이 5대 사회보험은 완전고용을 전제로 한 임금 노동자 중심으로 설계된 제도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그래서 늘 얘기되는 문제점이 사각지대의 존재다. 그런데 고용의 불안정성이 점차 심해지고 있고 현재도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많은 한국 사회의 노동시장/구조 문제를 논의하지 않고 이러한 복지 제도가 형평한 혹은 보편적인 제도가 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한국의 복지제도가 건강 보장 제도를 제외하고는 지나치게 현금 급여 중심, 노년 연금 중심으로 제도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그래서 향후 보편적 복지 제도 발전을 위해서는 복지 서비스 전달 체계의 공공화, 현물 급여 확장, 노동자를 비롯한 경제 활동 인구에 대한 복지 서비스 확충이 과제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현재까지의 논의는 무상의료 논의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도 노동자들 비롯한 경제활동인구를 위한 보편적 복지 제도에 대한 논의는 너무도 적다.
이러한 기이한 사회적 현상의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주객관적 요인이 모두 존재할 것이다. 오랜 동안 형성되어온 노동 배제적 사회 인식, 담론 사회에서 노동 담론의 허약함, 노동자/자본가 역관계 속에서 노동계급 힘의 압도적 열세 등이 모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 요인에 못지않게 주체적 요인 탓도 크다. 그러한 주체적 요인의 문제는 이미 10여 년 간 ‘노동 운동의 위기’ 논쟁 속에서 평가되고 제기된 바 있다. 노동운동 전반에 대한 논의는 필자의 역량을 벗어나는 것일 뿐 아니라 이 글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그래서 논의를 이른바 산재보험 개혁 운동을 표방했던 운동에 대한 평가와 논의로 집중하고자 한다.2)
2. 그간의 산재보험 개혁 운동 평가
주지하다시피 산재보험 개혁에 대한 논의는 노동안전보건 운동의 태동기부터 노동안전보건 운동 진영의 핵심적 논의였다. 문송면 투쟁부터 원진 레이온 투쟁까지 노동안전보건운동은 산재보험의 문제점을 대중적으로 각인시키고 그것을 개혁하기 위한 운동의 흐름을 만들어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운동의 흐름은 1990년대 말 근골격계질환을 둘러싼 노동조합의 대중 투쟁을 경과하면서 논의의 폭이 확장되었고, 2000년대 초 산재보험 개혁 공동대책위가 결성되면서 정책 내용이 깊어졌다. 그 결과 2005년 정부 주도로 확장된 산재보험 발전위 논의에서 산재보험 개혁 운동 진영은 통일된 요구된 요구안을 내걸 수 있었고, 그것의 구체적 형태로 민주노동당과 협력하여 국회에 개혁 법안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후 산재보험 개혁 논의는 민주노총과 산재보험 개혁 운동 진영이 배제된 채 급격히 노사정위원회 합의 구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려면서 산재보험 개혁 운동 진영의 요구가 사회적 발언권을 얻는데 한계를 가지게 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선보장 후판정’을 주된 슬로건으로 한 산재보험 개혁운동 진영의 요구가 일정한 사회적 반향을 낳았던 것도 사실이다.3)
그런데, 당시에 산재보험 개혁 공대위(이후 공투위) 활동으로 산재보험 개혁 운동 진영이 단일한 단일한 정책 요구를 가지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중요 지점의 차이에 따라 일정한 경향성을 띤 몇 가지 운동 흐름이 생겨난 것도 사실이다.4)
첫째는 산재보험을 제대로 된 사회보장(사회보험) 제도로 자리매김하는 것에 최대의 중점을 둔 요구와 실천 경향이다. 현재 한국의 산재보험은 사회보험으로 보기에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한국의 산재보험이 사용자 책임 배상보험의 성격을 같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산재보험 체계가 법제도 체계상 사회보장기본법의 하위법령이기보다는 근로기준법의 하위법령으로 기능하는 측면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운동 진영은 산재보험을 우리 사회의 제대로 된 사회보장제도로 만들려 노력해왔다. 이러한 경향의 운동은 무엇보다 산재보험 사각지대, 산재보험 급여의 불형평성, 산재보험 급여 신청 시 존재하는 제도적, 실질적 장벽 문제 등을 중요하게 여겨왔고, 이러한 문제 해결이 그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임을 역설해 왔다. 특히 산재보험이 보편주의적 제도로 발전하려면 현재 산재 신청 자체가 아예 막혀있는 대다수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의 산재 신청 장벽을 없애는 게 가장 큰 이슈라고 주장해왔다. 다른 표현으론 ‘산재 은폐’ 철폐다.
이러한 운동 흐름의 가장 큰 장점은 산재보험의 향후 개혁 경로를 명확히 했다는 것이다. 산재보험 제도가 사용자 책임 배상보험의 영역이 아닌, 우리 사회의 보편적 사회보장 제도로 자리매김되어 노동자들의 질병, 장애, 생활, 노동을 책임지는 제도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지향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는 곧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 중심주의 혹은 조합적 경제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대신 비정규직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들의 요구, 임금 노동자로 제한되지 않는 모든 일하는 계층의 요구를 정식화하였고, 그것에 기반하여 보편적 사회보장 운동과의 연대를 모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 경향의 크나큰 약점은 이를 대변하고 움직이는 운동의 주체 세력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주장과 정책은 있었지만, 그러한 주장과 정책을 현실화할 세력을 확보하는데 늘 실패했다. 주장과 정책은 있었으되 전략이 없었고,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객관적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 비타협적, 전투적, 기업별 노조주의를 특징으로 하던 그간 한국의 민주노조 운동은 사회보장 운동을 개량주의로 폄하해온 전력이 있다. 민주노총 창립 시기 이러한 운동 경향은 혁명적 노동운동에 대비되는 ‘사회개혁적’ 노동운동으로 치부되고, 심지어 특정한 정파의 노동운동 경향이라고 치부된 적도 있었다. 이는 이러한 주장을 펴던 세력이 민주노총 내 특정한 정파를 대변하던 그룹이었던 탓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파적 색채와 관계없이 ‘일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사회보장’을 외치는 세력은 개량주의자 혹은 특정한 정파를 대변한 세력으로 오인되었다. 사회보장 제도 개혁을 외치는 세력은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착취와 억압에 눈감은 채 재분배 구조에만 신경 쓰는 개량주의자가 된 것이다. 지금은 민주노조 운동 세력 중에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그룹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혁명을 꿈꾸는 노동운동도 사회보장 요구를 할 수 있고, 사회보장 요구가 개량적이지만은 않은 요구라는 것에 대해 노동운동 내 일정한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러한 오해와 몰이해는 그 모습을 바꾸어가며 노동운동 내에서 사회보장 요구를 전면적으로 내거는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비판은 이러한 경향의 운동 세력을 ‘법제도 개혁주의자’나 ‘전문가 운동 세력’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법제도 개혁운동에만 몰두하는 운동 세력이나, 계급적 역관계를 고려하지 못하고 ‘전문주의’에만 빠져 그것을 최고의 진리로 신뢰하는 ‘전문가’들을 비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운동과 그러한 전문가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법제도 개혁 운동은 보다 큰 운동의 전술로만 유효하고, ‘전문가’는 보다 큰 민주주의적 틀 내에서 그들의 전문성이 발휘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사회보장운동의 중요성, 산재보험 개혁운동의 사회보장 운동 성격을 말한다고 해서 이 흐름을 무조건 법제도 개혁운동 혹은 전문가 운동으로 치부하여 비판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는 현실에 근거한 비판이기 보다는 정치적 마타도어 성격이 강하다.
이처럼 이러한 성향의 운동 세력이 성장하는데 객관적 장애물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러한 오해와 몰이해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러한 경향을 책임지는 주체들의 순진함과 정치적 미숙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주장과 정책이 있다면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연대와 연합의 전략전술을 구사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을 펴는 주체들은 그러한 것을 하다가 포기하거나 아예 실천하지도 못했다.
“업무상 질병판정위원회의 결정에 항의하는 집회 (출처: 오마이뉴스 2009.09.12)”
두 번째 경향은 산재보험을 구체적인 노사관계의 투쟁 도구로 활용하는 경향이다. 생산의 지점, 생산의 현장에서는 구체적인 노자 관계의 대립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착취와 억압은 생산의 지점에서 발생하고 그것을 인식한 노동자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행동에 나선다. 그래서 다양한 수준의 현장 투쟁이 발생한다. 이는 임금, 고용, 노동기준 등을 둘러싸고 이루어지지만, 때때로 산재보험을 둘러싼 투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산재를 은폐하고자 하는 사업주와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노동자 간의 갈등, 사업주에게 책임을 묻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요구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업주 간의 싸움 등이 산재보험을 매개로 현장에서 발생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사업장의 다양한 측면의 문제들을 드러내고자 산재보험이 활용되기도 한다. 가령 사업주의 비인간적, 비인권적 경영 문제를 드러내고자 노동자 건강 문제를 고발하고 이를 산재 승인까지 연결하려는 운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운동의 장점은 구체성, 현장성에 있으며 대중 투쟁의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노동자의 현장 권력 확대 수단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 구체적 현장과 구체적 쟁점을 가지고 투쟁이 형성되기 때문에, 이러한 운동은 일정 정도의 투쟁 동력과 주체를 확보하기에 이로운 장점이 있다. 눈에 보이는 모순과 대립을 구도로 투쟁이 형성되기에 그 폭발력도 상당히 크다. 이러한 운동은 그 투쟁의 헌신성과 끈질김으로 인해 대중의 관심을 받고, 노동운동의 귀감이 된다. 이러한 투쟁이 승리할 경우 특정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의 현장 권력 확장 효과가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하지만 한계도 있다. 투쟁 의제를 확장하기 힘들다는 것이고, 그에 따라 투쟁의 공감을 얻어내는 데에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그 폭발력에 비해 성과가 특정 현장에 한정되거나, 제도 개선이 되더라도 부분적인 경향이 있다. 산재보험 문제의 보다 근본적 치부를 드러내고 그것에 칼을 대게 하기까지가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의 한계는 이러한 성격의 운동 자체가 의도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차피 이러한 운동 자체가 산재보험 제도 개선이나 개혁 자체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사업주의 착취와 억압 관계를 드러내고, 그것을 투쟁하는 과정에서 노동자 현장 권력의 확대를 의도하는 것이니만큼 이 운동이 산재보험 개혁에 도움이 되냐 안 되느냐로 평가할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일면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투쟁도 모두 그간 산재보험 개혁 투쟁으로 간주되었던 현실을 고려하면,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운동 성향 자체가 중앙의 집중적 정치 투쟁을 방기하고 현장의 중심성만을 강조하는 아나코-생디칼리즘의 한 변형으로 비판받을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 번째 경향은 현실에서의 산재보험 구조를 인정하고 여기서 현실 가능한 대안을 찾자는 흐름이다. 이러한 경향은 사실 ‘운동적’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과거 운동의 흐름 속에서 일정하게 존재하고 있는 운동세력이 취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러한 경향은 현실적으로 한국의 산재보험이 사회보험적 성격과 사업주 책임 배상보험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으니만큼, 그러한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세부적인 개혁을 이루자는 것이다. 이는 산재보험 구조의 변혁을 꾀하기 보다는 현재의 구조 속에서 일부 제도 개선을 꾀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강하게 비판되어야 한다. 이러한 경향은 현재의 노동운동과 산재보험 개혁 운동의 힘을 패배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변화하지 않는 상수로 여기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는 근시안적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러한 일부 개선과 개혁으로는 오히려 제도 자체의 불형평성이 심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3. 산재보험 개혁을 위해서는 더 큰 운동이 필요하다
그간의 운동을 비판적으로 살펴보았지만, 그간의 운동이 오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옳은 방향임에도 힘이 부족했거나, 힘을 모으지 못했다는 것이 어쩌면 가장 큰 문제일 수도 있다. 산재보험 개혁을 위해서는 더 큰 힘이 필요했다. 사실 2005-6년 산재보험 개혁 논의 당시 노동안전보건 운동 진영은 최대로 힘을 모아 부딪쳐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관련 전문가들을 동원해서 법안을 만들었고, 현장에 이슈를 교육했고, 그것을 발판으로 몇 번의 대중집회도 진행했다.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민주노총의 3대 핵심 요구 사항으로 산재보험 개혁 요구가 들어가기도 했다. 말하자면 할 만큼 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했어도 힘이 부족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산재보험을 자신의 사안이라고 느끼고 나서는 이들을 조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과 단위 노조는 개혁안의 당위성에 대해 동의했지만, 당위만으로 운동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님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당시 산재보험 개혁안의 핵심은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도 아무런 진입 장벽 없이 산재보험을 자유롭게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에는 당연히 동의하지만 이를 자신의 운동으로 만들어 갈 조직은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명백하다. 조직된 노동조합이 이를 주요한 이해관계가 달린 사안이라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재에도 산재 신청에 큰 어려움이 없는 사업장 의 노조들은 이 운동으로 얻을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산재 진입 장벽이 철폐된들 기존의 대공장 노조는 얻을 게 별로 없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고 운동을 만들어 나갔어야 했지만 산재보험 개혁 운동 주체들은 그러지 못했다. 잘 나서지 않는 노조들을 욕이나 하면서 말이다.
자신의 이해관계가 명확히 걸려있지 않은 사안에 나서지 않는 것을 뭐라 하기 힘들다. 물론 이렇게 중요한데 왜 이것밖에 못하냐고 당위적으로 윽박지를 수는 있겠으나, 그렇게 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 대공장 노동자도 산재보험을 자신의 사안으로 인식하고 나설 수 있도록 요구와 운동을 만드는 게 정답이다. 그리고 민주노총과 단위 노조를 넘어 더 많은 운동 동력을 확보하는 게 정답이다. 우리의 산재보험 개혁안으로 실질적 이익을 얻을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를 핵심 세력으로 삼을 도리를 마련해야 한다. 물론 이들은 조직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운동 세력으로 세우기 힘들다. 하지만 조직되어 있지 않더라도 이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를 보낼 수 있는 경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 이 사안이 단지 조직된 노동자를 위한 사안이라고 생각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 다양한 사회운동 세력들에게 이 운동의 의미와 중요성을 알리고 연대를 호소해야 한다. 문제는 정책이 아니라 정치다. 더 많은 이들이 이 사안의 중요성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과 전술이 문제인 것이다.
4. 더 많은 운동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 – 세 가지 경로
바람직한 산재보험 개혁 방향과 경로는 보편적 사회보장제도로 가는 것이다. 그 궁극적 길은 산재보험 해체가 될지도 모른다. 보편적 사회보장제도는 기본적으로 특정한 결과에 대해 그 원인과 계층을 불문하고 사회적 보장을 해 주는 제도이다. 그러므로 상해와 질병, 질병으로 인한 임금손실, 장해, 사망 등의 원인이 무엇이건, 다시 말해 그것이 산재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급여를 제공하는 제도가 이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제도로 가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다른 사회보장제도가 산재보험 제도만큼의 보장성과 적용대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가 충족되지 않은상태에서 보편성만을 강조해 모든 사회보장제도가 통합된다면, 이는 하향평준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건강보험 보장성이 산재보험 수준이라는 전제 하에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요양급여의 통합을 고려할 수 있고, 국민연금 장해연금, 유족연금 등의 수준이 산재보험 장해급여, 유족급여 수준이 되었을 때 이들 급여의 통합을 고려할 수 있다. 그리고 고용보험의 훈련지원 급여, 고용촉진금 등이 산재보험의 재활급여와 비교해 큰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각 사회보험에 비해 산재보험의 보장성이 크고 적용범위가 넓어 통합 논의를 꺼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고 있다. 무상의료 논의의 진전 때문이다. 보편적 복지 논의가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이제는 민주당마저 입원 환자의 보장성 90%라는 ‘무상의료’를 공약하고 있다. 그리고 보편적 복지 제도 형성을 위한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러한 논의에 박차를 가하고 산재보험 개혁 논의를 촉발시키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통합 논의를 제기하자는 게 한 가지 경로가 될 수 있다.
물론 현 단계에서는 이는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요양급여의 통합이라는 요구로 한정될 것이다. 다시 말해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요양급여를 통합하여 병원 치료비는 산재건 아니건 간에 상관 없이 무상으로 제공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사후 조사와 평가를 통해 산재보험은 휴업급여, 장해급여, 유족급여 등 다른 현금급여 및 부가급여를 담당하자는 것이다. 이는 세 가지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첫째, 사회보장 제도에 대한 기업 부담 강화의 중요성을 부각시킬 수 있다. 한국의 사회보장 제도에서 기업 기여율이 낮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경총은 산재보험요율 산정 시 한국의 산재보험요율이 1.7-1.9% 정도로 다른 나라보다 결코 낮지 않다고 생색을 낸다. 하지만 이를 사회보험 전체에 대한 기업부담율로 따지면, 한국 기업은 다른 나라 기업에 비해 사회보험료를 훨씬 적게 내는 축에 속한다. 사회보험에 대한 기업과 노동자 부담률이 OECD 평균 5.4:3.1인데 비해, 한국은 2.4:3.2로 오히려 노동자가 기업보다 많이 내고 있다. OECD 평균적으로 기업이 국민연금, 건강보험료 등에서 노동자들보다 1.7배를 더 내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오히려 기업이 노동자가 내는 보험료의 4분의 3정도밖에 안내고 있다. 그런데도 산재보험료를 많이 낸다고 생색내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재보험료, 혹은 고용보험료, 건강보험료, 국민연금이든 기업이 내는 사회보장 분담 비용을 더 높이라는 주장을 해야 한다. 물론 현재로서는 그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에 맞는 설득력 있는 근거라는 것이 외국의 사례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요양급여 통합 논의를 하면서 자연스레 이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통합 시 기업이 건강보험에 더 내야할 비용에 대한 논의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현재 기업이 건강보험으로 떠넘기고 있는 산재 환자의 규모 문제를 짚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노동자가 산재를 당하고도 건강보험으로 진료를 받은 건수는 총 9만 3천 건으로, 180억 원이 부당하게 건강보험 재정에서 쓰여 환수 조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가천의대 임준 교수 등이 2007년에 시행한 연구에 따르면, 2006년 한 해에 일하다 다친 ‘업무 중 사고’ 사례는 108만 건으로, 2006년에 산재보험 적용 사례인 8만 9천여 건에 비해 12배나 더 많았다. 실제 산재 처리해야 할 건수의 12분의 1만이 산재 처리가 되고, 나머지는 다 건강보험으로 처리되고 있는 것이다. 이 연구는 이로 인한 건강보험 재정 손실 규모가 어림잡아 한 해에 2,000억 원 규모가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건강보험 재정 손실분은 아니지만, 산재보험 휴업급여, 장해급여 등을 지급하지 않은 것까지 따지면 기업이 이러한 방식으로 사회보험료를 떼먹는 돈의 규모는 더욱 크다.
한편, 현재 시스템과 의학 연구의 한계 때문에 산재보험 인정이 어려워 건강보험으로 치료받고 있지만, 그 원인을 작업에 돌릴 수 있는 질환의 규모는 상당하다. 그러한 질환들은 직업성 암, 직업성 호흡기계질환, 직업성 정신질환, 직업성 근골격계질환, 직업성 뇌심혈관계질환 등 수없이 많다. 이러한 질환에 대한 기업부담금 명목으로 기업의 건강보험료를 올리자는 요구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건강보험료의 기업 : 노동자 비율은 6:4로 높이자는 주장을 하면서, 이 재원으로 무상의료를 실현한다는 전제 아래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요양급여의 통합을 주장할 수 있다.
둘째, 산재보험에서 요양급여 수급의 장벽이 사라질 수 있다.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요양급여를 통합하면, 일단 다치거나 병들어 병원에 갔을 때 병원비는 무조건 건강보험으로, 개인의 부담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다치고 병든 사람이 산재건 아니건 간에 병원에서 치료받는 데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어진다. 상해와 질병 치료에 대해서는 보편적 급여가 실현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어도 산재보험 상 휴업급여, 장해급여, 유족급여 등을 수급하기 위한 평가와 결정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를 병원 요양 과정에서 정해진 규정에 따라 산재 및 직업관련성 질환 여부를 병원이 판단하여 급여 청구를 하도록 하면, 이에 대한 장벽도 상당 부분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5)
셋째. 이러한 주장과 요구로 보편적 복지 논의에 더해 노동자 복지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킬 수 있다.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요양급여의 통합 논의를 전면화하게 되면, 자연스레 산재보험에 대한 대중적 관심도 이전보다는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그간 산재보험을 이용하던 연 9만 여명 외에 무상의료에 관심 있는 많은 세력이 산재보험 제도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는 무상의료 논의에도 도움이 되고, 보편적 노동자 복지 논의에도 도움이 된다. 무상의료 주장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업 부담 측면을 강조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현재 산재보험에서 더 제공되는 급여의 포괄 여부를 사회적 의제로 올릴 수 있다. 휴업급여 및 간병급여 등이 그것이다. 현재 건강보험에서 제공되지 않는 상병급여, 간병급여 등이 보다 포괄적인 급여를 보장하는 건강보험을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논의를 촉발시킬 수 있다.
더불어 건강보험에 떼어주고 산재보험에만 남게 될 휴업급여, 장해급여, 재활급여 등을 진정으로 보편적인 노동 복지 제도로 발전시키기 위한 논의를 촉발할 수 있다. 급여의 수준과 질을 높이기 위한 논의는 필연적으로 한국의 노동시장에 대한 논의와 개별화된 기업별 노동 복지를 보편적 노동 복지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논의에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경로는 현재 직업성질병판정위원회 중심의 직업성 질환 인정 구조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조직된 노동조합을 견인하는 전략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들은 현재 진입장벽 철폐에 별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해관계가 결부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 싸워달라고 하기보다는, 현재 그나마 투쟁의 집중점을 가지고 있는 직업성질병판정위원회 변화를 고리로 투쟁에 동참하도록 호소하는 전략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직업성질병판정위원회를 해체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 투쟁이 산재보험에 대한 진입장벽 철폐 투쟁임을 강조하고 설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더 길게 논의하지 않겠다. 기존에 이에 대한 전략과 전술을 제출한 바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경로는 현재 산재보험 적용이 제외되어 있으나 보험이 필요한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다. 특수고용 노동자, 영세자영업자 등이 그 대상이 되겠다. 이들을 운동의 동력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산재보험!’ 정도가 메인 슬로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상술하지 않는다. 역시 기존 논의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4. 무엇을 할 것인가
지금까지 변화해가는 정세 속에서 산재보험 개혁과 관련된 논의를 어떻게 촉발하고 어떻게 질적 발전을 도모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고민을 털어 놓았다. 맨 앞의 각주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글은 논쟁을 촉발시키고 고민을 모으기 위해 쓰여졌기에 많은 부분의 논리가 엉성하고 추상적이며 성글다. 향후 산재보험 개혁 운동 진영에서 이러한 논의를 더욱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 정책을 가다듬고 필요한 조사와 연구가 있다면 이를 수행하여 자료를 보강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더욱 많은 사회운동 세력과 이러한 전망에 대해 토론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무상의료 운동 세력 및 보편적 복지를 주요한 운동 주제로 생각하고 있는 운동 그룹과는 문제의식 확장을 위해서든 문제의식 교정을 위해서든 적극적인 토론과 논쟁이 필요할 것이다. 향후 그 과정에서 희망적인 ‘그 무엇’이 배태된다면, 그리고 그것을 위한 동력을 마련할 수 있다면, 우리는 2011년부터 본격화되는 정치의 계절에 우리 목소리를 가지고 투쟁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1) 이 글은 산재보험 정책에 대한 글이 아니다. 산재보험을 진정한 사회보장제도로 만들기 위해 어떠한 주장과 전략이 필요한지를 논의하는 전략 페이퍼의 성격이 강하다. 논쟁을 촉발시키기 위해 논의를 추상화하고, 주장을 간결하고 선명하게 전달한 측면이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현실의 구체성과 복잡성을 사장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이는 의도된 것이니만큼 양해를 바라며, 이 글이 목적하고 있는 문제의식에 대해 집중하여 생산적 논쟁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 내용은 노동건강연대의 공식적 입장이 아님을 밝혀둔다. 산재보험 개혁운동 전략에 대한 노동건강연대의 입장은 보다 많은 토론을 통해 마련될 것이다.
2) 노동안전보건 운동의 영역은 그간 크게 산재보험 개혁 운동과 산재예방 운동의 영역으로 나뉘어져 왔다. 물론 주체는 많이 겹쳤고, 그래서 이 모든 영역의 운동이 노동안전보건 운동으로 불리어져 왔다. 여기서 서술하고 논의할 영역은 주로 산재보험 개혁 운동임을 밝혀둔다. 산재예방 운동 영역에 대한 평가와 논의는 따로 상술이 필요하지만 여기서 구체적으로 논의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3) 2005년 정부 주도의 산재보험 개혁 정국에서 산재보험 개혁 운동 진영이 어떤 포지션과 요구를 가지고 어떤 운동을 했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또다른 평가가 필요하다. 당시 일부는 정부 주도의 노사정위원회에 희망 섞인 기대를 가지고 있었고, 대다수는 민주노동당 입법안을 중심으로 장외 투쟁을 벌였다. 또다른 소수는 민주노동당 입법안도 탐탁치 않아했지만 다른 대안을 내지는 못했다.
4)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서술하자면, 향후 서술할 특정 운동 흐름은 특정한 운동 주체가 대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노동조합, 단체, 개인들은 향후 서술할 세 가지 경향을 때에 따라 다르게 가지면서 활동하여 왔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서술하고 있는 일정한 운동 진영 혹은 경향이라 함은 추상화된 개념으로 파악해 주기를 바란다.
5) 세부적인 정책은 보다 정교화되어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일단 그 논의는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