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재보험과 직업 관련성

산재보험제도는 국가에 의한 강제적 사회보험제도로서 보험가입자들로부터 보험료를 징수하여 노동자에게 업무상 사고나 질병이 발생했을 때 국가 행정기구를 통해 소정의 급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건강보험이 가진 사회보험의 일반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현행 산재보험은 산재를 당한 노동자가 요양 급여 신청을 했을 때, 행정 당국이 직업과의 인과관계를 따져 승인 또는 불승인 조치를 내린 후 승인된 경우에 한정해 보상을 해준다는 점에서 건강보험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보상은 몇 가지 측면에서 근본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

첫째, 이는 잘못된 질병 모형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질병의 원인을 직업 때문이라고 입증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쉽지 않다. 질병의 원인을 단일한 인자로 설명하는 ‘질병의 단일 병인론설’은 이미 오래 전에 폐기된 비과학적 설명 방식이다. 질병 발생에는 숙주 요인, 환경 요인, 매개 요인 등 다양한 요인 등이 관계된다. 즉, 어떤 요인이 주요한, 혹은 상대적으로 중요한 위험요인은 될 수 있어도 그것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적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요인이 영향을 크게 미쳤을 것이라고 추론은 가능하지만, 그것 때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폐암에서 담배의 영향이 크다고 해도, 특정한 개별 사례에서 폐암 발생의 원인이 반드시 담배였다고 단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역설적으로, 오랫동안 많은 담배를 피운 사람이 폐암에 걸리지 않은 사례만 있어도 이러한 인과관계 가설은 깨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산재보험은 질병의 원인이 직업에 기인하고 있냐를 따지는 업무기인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 매우 잘못된 원칙이 아닐 수 없다. 최근 고혈압, 당뇨병 등 전통적 직업병으로 분류되지 않았던 일반 질환들도 직업 관련성이 크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데, 어느 정도나 영향을 미쳐야 기인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지 그 잣대는 매우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둘째, 작업 때문이든 아니든, 어떤 원인으로 발병했든 노동자가 불건강 상태를 벗어나 건강하게 직장 또는 사회로 돌아가고자 하는 필요나 욕구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건강할 권리에 차이를 구조화하는 현행 보상 방식은 잘못된 접근방식이라 할 수 있다. 사회권으로서 건강권이 등장한 이래 건강권은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로 인식되어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산재냐 아니냐에 따라 보상의 수준이 달라지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셋째, 사업주의 책임을 산재에만 국한하고 있다는 점은 잘못이다. 현행 산재보험은 산재로 승인된 재해 또는 질병에 대해서만 사업주 책임을 특정화하고 있다. 물론, 그것도 보상에 국한되고 있지만, 현행 산재보험체계가 안전보건에서의 사업주 책임 범위에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산재로 승인된 질병만 사업주의 책임인가? 일반 질병은 사업주의 책임이 아닌가? 많은 연구 결과에 의하면, 통상적으로 직업성 질환으로 분류되지 않던 일반 질환들도 사업주 책임 영역인 근무 환경 및 조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저체중 출생아의 출산은 여성노동자의 장시간노동 및 교대근무와 관련이 있으며, 고혈압 및 고혈압성 합병증의 발병도 직업스트레스 요인과 관련되었다는 연구보고들이 있다.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산재가 반드시 사업주의 책임이라고 보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건설 현장에서 발생하는 잦은 사망사고와 중대재해는 건설업의 뿌리 깊은 하청-재하청 관계에 기인한 바가 큰데, 정부 정책이 그러한 경향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정부 정책이 산재발생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이처럼, 산재를 직업에 기인한 것인지 여부에 따라 보상하는 방식은 원칙적으로 타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매우 불합리한 결과를 낳고 있다.

2. 산재보험 보상의 배제와 차별

? 사전승인제도와 구조적 배제

2007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발간된 보고서에 의하면, 2006년 우리나라의 총 직업성 손상 규모가 2,853,761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2006년 건강보험 급여를 통해 진료를 받은 손상환자 자료를 근거로 표본조사를 실시한 결과, 그 해 건강보험 손상 환자 중 22.5%가 직업 및 경제활동에 의해 손상을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활동 인구가 모두 산재보험 적용 대상은 아니기 때문에 농민 등 자영업을 제외하고 운전 등의 경계 영역을 제외하여 보수적으로 추계하더라도, 산재보험 적용 직업성 손상 규모는 1,091,12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산재보험으로 일 년간 승인된 사고성 재해 건수의 10배가 넘는 수치다.

표 1. 2006년 건강보험을 통해 치료받은 직업성 손상 추정건수

조건

(A) 건강보험 이용

직업성손상 추정건수

(B) 산재보험 이용

직업성 손상자수3)

(A+B)

비 

(A/B)

전체 직업성 손상

2,774,086

79,675

2,853,761

34.8

산재보험 적용 근로자로 제한1)

(보정계수 0.518)

1,436,977

79,675

1,516,652

18.0

산재보험 적용 근로자중 사고원인이 교통사고인 경우 제외2)

(보정계수 0.361)

1,001,445

79,675

1,081,120

12.6

1) 사고 당시 직업이 농림어업, 자영업, 공무원, 군인인 경우를 제외하고, 타인에게 고용되어 임금을 받고 일하는 임금근로자만 포함한 경우는 2,094명으로 전체 응답자 4,045명의 51.8%에 해당되므로 보정계수 0.518을 곱하여 추정함.

2) 임금근로자 2,094명 중 사고원인이 교통사고인 경우를 제외하면 1,460명으로 전체 응답자 4,045명의 36.1%에 해당하므로 보정계수 0.361을 곱하여 추정함..

3) 2006년 산재보험을 이용한 근로자는 89,910명이나 이 중 업무상 질환자 10,235명을 제외한 직업성 손상자 수는 79,675명이었음.



뿐만 아니라 질병관리본부의 의뢰로 신상도 등(2010)이 수행한 손상감시연구에 따르면, 산재 때문에 응급실을 방문하여 사망한 환자 중 일부가 건강보험 또는 공상으로 처리된 경우도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직업관련성 질환에 비해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기가 상대적으로 쉽다고 알려진 손상의 경우에도 많은 수가 건강보험 또는 공상으로 이전된다고 하면, 직업성질환의 경우는 물어보나 마나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렇게 직업 때문에 발생한 재해인데도 산재보험으로 보상을 못 받는 이유는 산재보험의 사전승인제도에 기인한 바가 크다. 현 제도 하에서 사고성 재해와 직업성질환으로 치료를 받게 된 노동자가 산재 보상을 받으려면 본인 또는 보호자가 직접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해서 사전에 승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 재해가 업무 때문에 발생했는지, 업무 수행 중에 발생했는지 따져서 인과관계가 명확해야 산재로 인정된다. 이처럼 사전승인 절차가 있다는 사실과 업무 관련성에 대한 입증을 재해노동자가 직접 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산재로 인정해 주는 기준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 등 여러 이유로 인해 직업성 재해임에도 불구하고 산재보험 보상에서 배제되는 사례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고성 재해나 직업병이 발생하여 치료와 요양이 필요한 경우, 재해노동자는 본인과 회사의 날인, 병원의사의 소견서 등이 포함된 요양신청서 3부를 작성하고, 재해경위서와 목격자 진술서 등 증빙서류를 함께 작성하여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후 근로복지공단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근로복지공단 지사는 요양신청서가 접수되면 회사의 담당자를 불러 작업관련성에 대해 조사 하고 필요에 따라 해당 자문의사에게 작업관련성에 대한 자문을 받은 후 최종적인 승인 여부를 결정한다. 이 때 사고성 재해처럼 인과관계가 비교적 명확한 경우에는 1-2주 안에 승인이 이루어질 수 있지만, 직업병의 경우는 작업관련성 여부에 대한 다툼이 커서 승인과정이 한정 없이 길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렇게 될 경우 요양이 인정되기 전까지 건강보험을 통해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이 경우 본인부담 비율이 50%에 달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만일 산재 신청이 불승인될 경우, 행정심판절차를 밟든지 아니면 바로 행정소송에 들어가는데, 이러한 과정은 최소 6개월에서 1년까지 걸린다. 재해노동자 본인과 가계에 심각한 후유증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업무상 재해와 질병으로 인정되는 기준이 제한적이고 엄격하다는 점도 문제점이다. 작업관련성이 확실한데도 산재보험에서 인정되는 업무상 질병의 범위가 좁고 기준이 엄격하여 실제 적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산재보험의 혜택을 받아야 할 재해노동자가 건강보험으로 요양급여를 제공받거나 자기 부담으로 치료를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더욱이 건강보험의 급여수준이 매우 낮고 산재발생 후 재취업을 하거나 온전한 사회복귀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인정기준마저 까다롭다는 것은 재해노동자에게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산재보험은 산재은폐를 유인하는 기전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산재가 발생한 사업장은 그 정도에 따라 영업정지나 벌금 같은 행정처분을 받기도 하고, 미납 산재보험료에 대한 추징은 물론 요율의 인상이 일어날 수도 있으며, 건설업의 경우 관급 공사 배제 같은 패널티를 부과받기도 한다. 따라서 개별 사업장은 산재가 발생하면 공상으로 처리할망정, 산재사실을 은폐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정부와 보험자 입장에서 보면 단기적으로 보험 재정을 절감할 수 있지만, 산재보험이 노동자의 건강 안전망 기능을 하지 못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사회 전체적으로 질병 부담을 증가시키고 보험 재정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 산재보험 사각지대와 차별


그나마 산재보험으로 치료를 받는 노동자는 행복한 편에 속할지도 모른다. 법률적으로는 5인 미만 사업장까지 적용되지만, 아직까지 농업 등 업종별로 적용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소규모 음식점처럼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동일한 재해 위험을 안고 있는 1인 사업장 또는 자영업자들도 산재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학습지교사, 골프장경기보조원 등으로 일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실질적으로 사업주에 고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1인 사업자로 등록되어 있다는 형식적 이유로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그런데, 산재보험 적용 대상 사업장이더라도 모두 산재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산재보험은 건강보험과 달리 사업주의 자진 신고에 의해 적용 대상이 정해지고 산재 보험료를 전액 사업주에게 부과하고 있어서, 전체 취업자 중에서 실제 적용 대상이 되는 노동자의 비율은 매우 낮다. 물론 사업주가 신고를 하지 않고 산재보험료를 내지 않았더라도 재해노동자가 신청을 하면 적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사업주에게 밀린 산재보험료를 한꺼번에 납부하도록 하거나, 행정 처분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사업주는 이러한 불이익을 피하기 위하여 산재 은폐를 하는 경우가 많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주로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산재 적용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만 산재보험에 가입해주지 않는 사업주가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정규노동자가 재해나 직업병으로 치료를 받게 되면, 본인이 산재 적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라 신청을 하지 않거나, 사업주가 산재 신청을 꺼린다는 점 때문에 스스로 산재 신청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래저래 산재보험 적용에서 배제되기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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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수고용 노동자 산재보험 적용 촉구 기자회견 (출처: 민중의 소리 2010.10.28)”

보장성 측면에서도 산재보험은 차별을 내포하고 있다. 2005년 10월 10일자 한겨레신문을 보면, 가스폭발 사고로 전신 화상을 입은 한 재해노동자가 피부 이식 등에 들어가는 치료비를 제대로 보상해주지 않아서 3년 동안 수천만 원이 넘는 치료비를 부담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 과정에서 결국 빚을 얻게 된 노동자의 집이 가압류되고 가족이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극소수의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재해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산재보험에서 제공해 주는 치료비, 즉 요양급여의 범위는 건강보험에 준한다. 하지만 건강보험과 다른 점은 건강보험의 경우 요양급여 범위 내에서도 치료비 중 본인부담이 있지만 산재보험은 본인부담이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반적으로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게 되면 치료비를 한 푼도 내지 않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건강보험의 요양급여 범위를 벗어나는 고가의 시술이나 검사 등은 재해 노동자가 직접 치료비를 마련해야 하고 그 비용이 상당한 수준이다. 물론 특진료 같은 일부 항목은 건강보험과 달리 산재보험에서 보장을 받기도 하지만, 평균적으로 치료비의 약 20% 정도는 본인부담이 존재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산재보험에서 소득보전 차원으로 제공하는 휴업급여는 평균보수월액(임금)의 70%이기 때문에, 재해를 당한 이후 실질소득이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고, 그 결과 빈곤에 빠지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특히, 저임금의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들은 대부분 맞벌이 가구인데, 배우자의 간병 때문에 가계의 실질 임금이 줄어드는 폭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일부 대기업들은 단체협약에서 산재 이후 소득 보전에 관한 별도의 규정을 두고 있지만, 대부분의 중소 사업장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산재에 따른 가계소득의 급격한 후퇴를 막지 못하고 있다.

현행 산재보험은 치료가 완전히 종결된 후에도 남는 장애에 의한 소득 손실에 대해 장해등급 판정에 기초하여 장해급여로 보상하고 있다. 그러나 장해등급 판정 기준 또한 현실에 맞지 않고, 직장을 얻기 어려울 정도로 중증 장애를 입은 노동자의 보상 수준조차 최저 생계를 꾸려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낮다.

이렇게 산재보험의 낮은 보장성은 재해노동자가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받고 직장 및 사회로 복귀하는 것을 가로막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며, 산재보험의 배제와 차별을 구조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인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초래된다.



3. 산재보험과 건강보험의 통합


? 단일한 노동자 건강보장제도의 필요성

앞서 살펴본 것처럼, 직업관련성을 구체적으로 확정하기도 어렵고, 그 과정에서 많은 재해노동자이 배제되며, 발병 원인에 따라 차등적 권리를 부여하는 현행 제도를 그대로 유지해야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노동자에게 건강 문제가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이든 치료는 받아야 하고, 일을 못해 소득이 줄어든다면 소득 손실에 대해 보전을 받아야 하며,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는 아프고 다친 이유를 엄격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의적인 잣대로 평가하여 업무관련성 유무에 따라 보장의 내용을 달리 하고 있다. 이는 복잡한 행정 절차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비용 문제 뿐 아니라 건강할 권리의 평등한 보장이라는 측면에서도 적절하지 않다. 이미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불건강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가 동일하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동일하게 보장해야 한다는 보편주의 원칙을 산재보험에도 적용하고 있다. 질병의 원인을 한 두 개로 국한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고, 거의 모든 질병이 많든 적든 업무관련성을 갖는 상황에서 엄격하게 업무의 내용과 질병의 인과관계를 추적하여 특정 질병만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는 현행 산재보험은 매우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이다. 건강할 권리가 노동자, 더 나아가 모든 이의 보편적 권리라고 한다면, 불건강으로 인한 고통을 줄이고 최대한 이전 상태로 복귀할 수 있도록 사회가 최대한의 노력과 지원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원인의 종류와 대상의 차이는 존재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이런 측면에서 한국에서도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제도를 통합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통합의 전제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적지 않다. 제도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조달하고, 그 재원을 누가 부담하느냐의 문제가 통합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산재보험은 사업주가 모두 부담을 하는데, 건강보험과 통합할 경우 사업주의 부담이 줄어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산재 보험료를 모두 사업주가 부담한다고 해서 사업주가 자신이나 주주 몫으로 돌아가는 이윤 중 일부를 보험료로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노동자의 임금으로 전가시켜 왔다면, 사업주와 노동자의 부담 비율 문제는 결정적인 게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사회임금에 대한 보편적 동의가 확보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노동자 부담 비율을 줄이고 사업주 부담 비율을 늘리는 작업, 즉 사회임금의 영역을 넓히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건강보험과 산재보험의 제도적 통합을 부정하는 결정적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왜 노동자는 불건강 상태라는 동일한 문제에 대해 다른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혹은 임금 노동자가 아닌 사람은 왜 불건강 상태라는 동일한 상황에서 노동자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근본적 의구심을 가지고, 이를 바꾸기 위해 각각의 제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좀 더 명확히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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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 거리서명운동 선포식 (출처: 매일노동뉴스 2010.11.01)”

통합 노동자 건강보장 제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예상되는 문제점과 전제조건들을 살펴보자. 우선, 현행 건강보험제도는 엄밀하게 말해서 사회보험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많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보편성을 제외하면, 보장성 수준이 매우 낮아서 질병으로 인해 발생하는 치료비 부담으로부터 가계를 보호하는 데 한참이나 모자란다. 또한 병원에 입원하거나 통원치료 상황에서 발생하는 임금의 손실, 혹은 간병을 하는 가족의 임금손실에 대해서는 전혀 보장하지 않는다. 많은 국가들이 건강보험에서도 산재보험과 같이 소득보장을 해주는 것과 비견된다. 그래서 한국의 건강보험제도는 진료비 할인제도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소득보장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동일한 질환에 대해서도 의료이용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 별도의 소득 보장 규정이 없는 직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은 일정 기간 재활과 요양이 필요하더라도, 치료비 부담과 소득손실 때문에 중도에 서둘러 직장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반면, 아예 직장에 돌아가기 어려운 심각한 상태이거나 임금노동자가 아닌 이들은 적극적인 재활 요양 체계가 없는 상황에서 일반 병원에서 장기간 요양하는 상황에  빠진다. 더욱이 직업 관련성 질환임에도 산재로 승인받지 못한 경우에는 충분한 치료와 재활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당연히 상황은 더 악화되기 마련이다. 건강보험의 낮은 보장성은 노동자의 건강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직업성 질환이라는 좁은 범위에서만 보더라도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건강보험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산재보험과 건강보험의 통합 또는 보편적인 건강보장제도를 논의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한편 산재보험은 노동자 건강을 보호하기 어려운 낡은 틀일 뿐 아니라, 고용 불안정성 문제와의 관련성을 극복해나갈 틀을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사실 기존의 산재보험은 불건강 상태에 처한 노동자가 건강을 회복하고 이전 생활로 복귀하도록 돕는다는, 혹은 노동자 건강권을 실현하겠다는 철학과 목표에 기반해서 성립되거나 발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산업재해에서 사업주의 책임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개별 자본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생산과정의 급격한 변동을 막아 자본주의 생산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목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발전으로 인해 사회적 권리 의식이 커지면서, 그러한 산재보험의 틀로는 변화된 권리 의식을 담아내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선진국들이 모두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엄격한 원인주의에 기초한 과거의 틀을 벗고 노동자와 시민의 건강권을 어떻게 평등하게 향상시킬지에 초점을 둔 제도 개혁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독립적인 산재보험제도 운영의 전통이 강한 국가들에서도 자영업자 등 기존에 포괄하지 않던 집단을 산재보험의 틀에 포함시켜 나가고 있고, 북유럽 등 국가주의적 전통을 가진 나라들은 통합적인 건강보장제도를 정착시켜가는 상황이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산재보험은 사업주배상 책임보험적 성격을 한결같이 유지해오고 있다. 웃지 못 할 일은 산재보험을 담당하는 근로복지공단의 일부 임직원들이 산재보험이 사회보험이라는 사실조차 부정한 채, 자신들이 사업주의 업무를 대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산재보험은 엄격한 인정기준과 사전승인제도를 완고하게 유지하면서 노동자 건강의 안전판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4. 산재보험의 패러다임 변화와 과제

일터 밖에서 모든 노동자의 건강이 평등하게 다루어질 수 있도록 대전환이 필요하다. 노동자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아프고 다쳤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 어떻게 다쳤든 간에 노동자가 일을 못하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한데, 산재이기 때문에 조금 더 보상을 받고 건강보험이기 때문에 덜 보상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 건강보험과 산재보험의 보장성을 끌어올린 후 중장기적으로 보편적인 건강보장제도가 성립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의 첫 발은 어디에 디뎌야 할까? 산재보험의 보장성 강화, 재활체계 구축 등 많은 과제가 있지만, 우선적으로 원인주의에서 결과주의로 산재보험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직업병과 작업관련성 질환의 원인을 여타의 일반적인 질병원인들로부터 분리해내기 어려운 조건에서 원인주의에 기초하여 산재보험의 수급 자격을 규정하는 경우, 재해 인정은 소극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본래 원인주의 접근방식의 장점은 재해노동자에게 특별한 보상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초기 산재보험에서 일련의 급여들이 다른 사회보험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기술이 자동화되고 발전하면서 원인이 명확한 단순 사고성재해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직업병 및 작업관련성 질환처럼 원인이 복합적인 재해의 비중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소위 선진국형 산재의 모습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별 질환의 원인을 추적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비효율적인 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해외 선진국들에서는 원인주의적 접근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재해의 원인이 일과 관련이 있든 없든 동일하게 보호하는 결과주의적 접근방식을 채택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다른 사회보장프로그램의 보장성이 강화되면서 이러한 구분이 불필요해진 것도 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한국도 아직 크기는 하지만 단순 사고성재해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직업병 및 직업관련성 질환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결과주의적 접근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물론 다른 사회보험의 보장성 수준이 산재보험에 비해 낮기 때문에 당장 결과주의 접근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향후 건강보험과 타 사회보장 급여의 보장성 수준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산재보험을 결과주의적 방식으로 선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선보장 후평가’ 제도가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산재 요양을 받기 위해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사전승인절차를 없애고, 별도의 절차 없이 재해노동자가 산재보험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재해노동자가 신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에게 산재신고 의무를 부과할 필요가 있다. 의사가 재해노동자를 만나는 최초의 시점에서 산재보험과 건강보험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합리적 기준을 개발하고 이에 따라 산재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의사가 재해노동자를 진료실 또는 응급실에서 만나면, ‘건강보험으로 적용을 받아야 하는지’, ‘산재보험으로 적용을 받아야 하는지’를 산업재해분류기준표에 따라 판단하고, 이를 근로복지공단에 신고하는 체계로 급여 인정 절차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일단 산재보험 적용대상으로 분류되면 산재보험 급여를 통해 보장하고, 담당 의사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 산업의학전문의에게 평가를 의뢰하여 그 결과에 따라 급여가 제공될 수 있도록 한다면 부작용은 최소화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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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제도 개선에 따른 산재보험 및 건강보험의 급여 제공 체계

이러한 제도가 정책되려면 건강보험과 마찬가지로 모든 의료기관이 산재보험의 당연지정 기관이 되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그동안 근로복지공단과 재해노동자 간에 주요한 갈등 요인이었던 자문의 제도와 직업병 인정기준을 폐지해야 한다.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도가 마련되면 산재보험의 청구와 수급 절차가 대폭 간소화하여 재해노동자의 접근성을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동안 서울대병원 등 대형 3차병원의 일부가 산재요양기관 지정에서 제외됨으로써 발생했던 문제들도 해결될 수 있다.

반면,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도가 도입될 경우 산재노동자에게 적정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려운 요양기관도 서비스를 제공하게 됨으로써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산재노동자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 저하 문제는 병원급 이상의 요양기관이 아니라 주로 의원급의 입원서비스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시행규칙 등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의원급 요양기관은 외래서비스만 인정하고 입원서비스를 제한하는 규정을 두는 것으로 질 저하 문제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근로복지공단이 재활요양원 설치를 포함하여 재활사업을 강화한다면 재해노동자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이 더욱 향상될 수 있다.

현재 산재보험은 노동자의 보편적 건강보장제도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특성을 상실하고 있다.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큰 그림은 이미 만들어져 있다. 그렇다면 누가, 언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의 과제가 남아 있는 셈이다. 한편으로는 산재보험에 대한 노동자의 불신과 불만, 더 나아가 냉소가 팽배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지담론과 보편적 복지제도에 대한 사회적?정치적 관심이 커져가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활발한 논의와 실천을 조직할 때다.

* 참고문헌

?신상도. 응급실 기반 직업성 손상 감시체계 구축방안 연구. 국가손상통합감시체계 운영사업단 제 8차 손상정책포럼. 2010

?이인재 등. 사회보장론, 나남. 2010

?임준 등. 국가안전관리 전략 수립을 위한 직업안전 연구. 산업안전보건연구원.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