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에 전세대란에, 멀리는 리비아 민중혁명 소식까지 겹쳐지면서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한 뉴스가 있었다. 2월 말에 접어들어 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이 일제히 단협 해지를 선언한 것이다. 지난 2009년 노동연구원에서 시작된 공공기관의 단협 해지 행렬이 끝내기 한 판에 돌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측의 일방적인 단협 해지라는 게 한국 사회에서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보니, 사실 아주 놀랍지는 않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이 비슷한 사안을 두고 미국,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유시장주의의 선두주자 바로 그 미국에서, 10만 명의 노동자들이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11월에 선출된 공화당 주지사 스캇 워커 (Scott Walker)가 2월에 예산 수정법안을 제출하면서 주 (state), 군 (county), 읍/면/동 (municipality)에 속한 공공 노동자들의 단체 교섭권을 폐기하는 내용을 끼워 넣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주지사는 상하원 모두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1월에 적극적인 감세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그런데 2월에  갑자기 주 정부의 재정 파산을 공표하면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해고는 물론 임금삭감과 연금/건강보험 같은 부가급여의 노동자 분담율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도록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단체교섭권을 없애겠다고 했다. 주지사는 금요일에 법안을 제안하고 다음 주 목요일에 하원 투표를 하겠다고 했으며, 심지어 이런 중대 사안을 흔히 15분 사전 토론이 배정되는 예산 일부 수정법안 뒤에 덧붙임으로써 의회에서의 논쟁 자체를 차단하려 했다. 노동자들의 저항까지 예상하고, 일찌감치 주방위군 소집 명령을 내려두기까지 했다.

이러한 내용이 알려지면서 즉각적인 반발이 일어났다. 2월 14일, 한국에서 초콜렛과 사탕이 불티나게 팔리던 발렌타인데이에 가장 먼저 거리로 뛰쳐나온 것은 조교 노조 (Teaching Assistant Association)에 소속된 대학원생들이었다. 이어서 교사들과 학생들을 비롯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이 법안에 항의하기 위해 의사당으로 집결했고, 학교들은 문을 닫았으며, 사건은 순식간에 전국 이슈가 되어버렸다. Democracy Now 같은 미국의 대표적 독립 언론은 아예 매디슨 시에 위치한 주 의회 앞에 스튜디오를 열고 현장을 생중계하고 있으며, 오바마 대통령마저도 단체교섭권은 노동자의 기본권이며 주의 재정파탄 원인을 노동자에게 돌리지 말라고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하원에 상정된 법안은 60시간이 넘는 긴 논쟁이 벌어지던 가운데 새벽 두 시, 공화당 측의 갑작스런 토론 중단과 날치기 투표로 순식간에 통과되어 버렸다.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아예 투표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당시 의사당 바깥에서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철야시위를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의사당 안팎에서는 ‘Shame! (부끄러운 줄 알아라!)’이라는 함성이 넘쳐났지만, 공화당 의원들은 경호 속에 의사당을 빠져나갔다.
이제 법안은 상원으로 넘어왔고, 민주당의 의석수는 공화당보다 적은 상황에서 민주당 상원의원 14명은 이웃 일리노이 주로 피신했다. 아예 의원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도록 하자는 전략이다. 주지사는 투표 강행을 위해 상원의원 자택으로 경찰들을 파견하여 의원들을 데려오도록 했지만, 그들은 이미 집을 떠나고 없는 상태였다.
이 와중에 시위 참여자는 점점 더 늘어나서 2월 28일에는 10만 명이 모였다. 이는 베트남 전 반대 시위 이래 최대 규모라고 한다. 참가자들 스스로, 또 서로에게 놀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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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의사당 실내를 가득 메운 시위대 모습을 보도하는 뉴욕타임즈 

 

 

과연 무엇이 이들을 거리로 불러냈을까? 이들은 무슨 생각으로 싸우고 있는 것일까?
놀랍게도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조합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임금삭감이나 연금, 보험료 부담 증가 문제가 아니다. 바로 단체교섭권의 박탈이 핵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2008년 경제위기 이래 많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이미 임금삭감이나 보험료 부담 증가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는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예 단체교섭권을 없앤다는 것은 노동자들이 사용자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테이블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것이고, 이는 노동자의 기본권을 말살하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돈은 가져가라. 하지만 우리의 권리는 안 돼! (Take the money, but don’t take our right)” 라는 구호는 문제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위스콘신 주의 재정이 어려워진 것은, 부자와 기업들에 대한 엄청난 감세정책에 기인한 바가 큰데다, 실제로 ‘위기’라고 부를 만큼 심각한 상황도 아니라고 한다. 또한 그들이 주장하듯 소위 귀족 노동자들의 해고, 임금과 부가급여 삭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예산절감의 규모에 대해서는 아무도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한 공화당 의원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예산 절감 효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며, 그냥 이것이 자신의 철학이라고 솔직하게 답했다.

 

위스콘신은 미국 내에서도 상당히 노동조합 운동이 강력한 지역이다. 노조 조직률은 상위 10개 주에 속하며, 모든 공공부문은 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있다. 1932년에 AFCME (American Federation of State, County, and Municipal Employees)가 가장 먼저 설립된 곳이자, 여성노동자 보호와 아동노동 금지, 실업보험을 처음으로 도입한 곳도 위스콘신이다. 물론 이는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의 역사 속에서 이룬 것들이다. 지난 50여 년 동안 공공 부문 노동자들은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해왔으며, 미국 전역에서 공공부문의 노조 조직률은 36%에 달한다 (민간 부문 약 7%). 이들 공공 노동자들은 대개 부유하지는 않지만 전형적인 미국의 중산층 혹은 서민 계층으로서, ‘공익’의 수호자라는 자부심도 상당하다. 실제로 필자가 만나본 미국의 보건소 직원들 중 자신을 ‘공공의 옹호자 (public advocate)’라고 표현한 이들이 드물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이 아닌 단체교섭권이 공격을 받은 것은 초유의 사태로, 이는 노동권에 대한 침해일 뿐 아니라 사회 공공성 전반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다. 이곳에서의 투쟁 결과가 다른 지역으로 급속하게 확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파 진영과 노동계급 모두 촉각을 세우고 있다. 오하이오 같은 인근 주에서 연대 집회가 열리고 있을 뿐 아니라, 멀리 캘리포니아의 노동자들이 연대를 위해 위스콘신으로 집결하기도 했다.
 
이번 법안에는 소방직과 경찰 노조만을 예외로 두었는데, 이들 노조가 지난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를 지지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노조의 노동자들도 분명한 연대의사를 표명하며 현장을 함께 지키고 있다. 경찰 노동자들은 ‘노동자를 위한 경찰 (Cops for Labor)’이라는 티셔츠를 입고 함께 행진했다. 심지어 의사당 경찰은 주지사의 시위대 퇴거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시위가 평화적이라는 이유로 강제집행을 거부했다. 뿐만 아니다. 미국 전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저항에 대한 지지와 연대의 물결이 넘치고 있다. 최근 독재자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이집트에서 익명의 지지자가 의사당 근처 피자가게에 전화하여 시위대에게 피자를 배달시킨 것이 큰 화제가 되면서, 근처 피자 가게와 도넛 가게들은 미국 전역, 외국의 지지자들로부터 주문을 받느라 북새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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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당 내 시위대에게 피자배달을 하느라 분주한 모습을 보도한 뉴욕타임즈

 

사실 한국의 진보진영이 보기에 공화당이나 민주당이나 반(反) 노동적이기는 매한가지라지만, 최소한 이번 투쟁에서 나타난 민주당의 태도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물론 ‘더 네이션 (The Nation)’의 기자 존 니콜스 (John Nichols)가 지적했다시피, 이런 강력한 저항이 없었다면 민주당이 문제제기야 했겠지만, 이런저런 사유를 달아 결국 법안에 동의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밤새도록 의사당을 점거하고 거리를 메운 군중들의 행렬은 민주당에게 큰 압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하원 투표 시 공화당 의원 4명도 반대표를 던졌다. 니콜스는 위스콘신 주의 명망 높은 진보적 정치지도자 로버트 라폴럿 (Robert LaFollete)의 “민주주의는 생활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민주주의란 투표만 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선출된 이들이 우리를 지배하는 게 아닌, 우리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우리를 제대로 대표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이번 사례만큼 사회운동이 제도권 정당을 성공적으로 ‘견인’해간 사례도 드물 것이다. 운동을 결국 ‘법안’과 ‘제도’로 협소화시킨다는 비판을 제기할 수도 있겠으나, 이 투쟁의 과정에서 진정한 연대감을 맛본 현장의 10만 명, 단체교섭권이 노동자의 소중한 권리라는 것을 배운 다음 세대의 노동자들의 경험 자체를 폄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집회 현장 노동자들의 발언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매디슨 시 경찰노조의 조합원인 브라이언 오스틴 (Brian Austin)은 Democracy Now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이 직업에 투신했을 때, 우리는 이 지역사회 성원들을 받들고 봉사하며 보호하겠다고 선언했다. 우리가 지금 이들과 함께 여기에 나와 있음으로써 하고자 하는 바로 그 일이다.” 중고등학교 선생님들, 음악대학원 박사과정의 대학원생들, 소방 노동자들과 경찰들, 간호사들, 기간통신망 노동자들이 자기는 어느 지부의 조합원 아무개라 자랑삼아 이야기하고 함께 구호를 외치며 지구 반대쪽 노동자가 보내온 피자를 나눠먹는 연대의 모습은 단식투쟁과 고공크레인, 죽음을 무기로 싸워야 하는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머나먼 것이다.

10만 명이 모인 지난 토요일 (2월 27일)의 집회 이후에도 주지사는 강경한 태도를 거두지 않고 있다. 주(州) 건강보장 프로그램의 대폭 축소와 소속 지자체의 재정지원 감소를 공언했고, 민주당 상원의원들이 돌아와 법안처리를 하지 않으면 1,500명에 달하는 공공 노동자들의 해고절차를 시작하겠단다. 위스콘신 노동계는 이에 맞서 총파업을 심각하게 논의 중이다. 이 사건이 과연 어떻게 귀결될지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