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한강의 얼음강바람
2. 현관문에 박힌 얼음
3. 눈 치우는 군인들
4. -18°c 수은주
5. 얼어터진 보일러

6시 30분 기상.

창문은 아직 어둡다. 해가 떠서 밝아오려면 30분 더 있어야 한다.
온기가 남은 이불속에서 겨우 일어났다.
조끼와 두툼한 덧버선을 신고, 바지도 한 겹 더 입었다.
며칠째 고장 난 채 버려진 보일러, 마룻바닥은 냉골이다. 파이프가 어는 것을 막기 위해 목화 솜이불을 잔뜩 깔아놓은 마루를 지나 미닫이문을 열고 부엌으로 간다.
부엌 뒷문을 열자 새벽바람이 훅~들어온다. 순간 콧속에 얼음이 언다. 숨을 내쉬고 들이 쉴 때마다 콧속의 수분은 얼었다 녹았다 를 반복한다.
아침을 먹은 후, 설거지를 하는데 짝꿍이 도시락 들고 출근하는 소리가 들린다.
‘깡깡깡’ 망치로 얼음을 깨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도 현관이 얼어붙었나보다. 얼음 깨는 데는 망치가 제격이다. 남한강에서 불어온 강바람은 우리 집 현관문을 통째로 얼음으로 얼려버렸다. 1월 들어 매일 아침 현관의 얼음을 깨야 밖으로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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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1: “현관문을 열고 나온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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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2: “얼어버린 문고리”
 
오늘은 보일러를 고치는 날이다.
아래 마을 설비업체 아저씨들이 들이닥쳤다. 이미 1월 초부터 수도관이 두 번이나 얼어버리는 통에 이집을 들락날락 하신 분들이라 행보에 거침이 없다. 오늘로 세 번째 공사인데 이번엔 보일러가 문제다.
농촌지역의 난방은 심야전기 혹은 기름보일러이다. 치솟는 기름 값을 생각하면 우리 집이 심야전기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지만, 이 거대한 보일러 기계도 상대하기 만만치 않은 놈이다. 이놈의 작동원리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집 채만한 물탱크 두 개와 각각의 물탱크에 붙어있는 수 십 개의 전기차단기와 버튼, 전선다발들, 탱크로 연결되는 몇 개의 파이프는 마치 우주선 같다.
이 기계와 친해져야 한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  -18°c의 자연환경 하에서는 보일러가 생명유지의 기본조건이 된다.

보일러가 고장 나면서부터 하루 종일 머리가 아프다. 추운데서 자느라 어깨와 허리근육이 뭉치는 것은 기본이고, 부엌에서 서서 설거지 하는 동안 올라온 냉기로 발목이 시큰거린다. 과거에 다쳤던 발목이 유난히 더 시큰거린다.
집을 탈출해 사무실에 출근해 있어도 머릿속은 복잡하고 골치 아프다. 거대 보일러가 머리  속으로 들어와 정신을 못 차리겠다.
‘뭐가 문제일까. 주인집에 말할까. 괜히 말했다가 욕먹고 집세 올리면 어쩌나. 그냥 내가 알아서 설비업자를 부를까. 수리비가 많이 나오면 어쩌나. 수리비를 주인집에 청구하면 줄까, 며칠 더 참아볼까, 그러다 바닥파이프까지 얼어 터지면 감당 못할 텐데…’

보름 넘게 고장 난 채 방치된 보일러와, 이런저런 걱정과, 얼음냉기가 서린 방바닥 때문에 마침내 나는 슬슬 부아가 나기 시작했다. 분노의 대상은 딱히 없었다. 울고 싶어졌다. 오늘도 냉골 방에서 잘 생각을 하면 퇴근길이 괴로울 뿐.

더 끔찍한 건? 그 와중에 새벽밥을 해먹어야 한다는 것. 밤새 추위에 시달리다 새벽에 일어나 부엌으로 나가면 거기는 얼음의 나라. 물 떠놓은 그릇도, 설거지거리도, 행주도 다 얼어있다.
‘이게 사람 사는 집이야? 주거 공간은 이러면 안 되잖아! 사람이 쉴 수 있어야지, 이건 무슨 개고생이냐구!’

 

난방과 함께 나를 괴롭히는 것은 또 하나는 수도.
혹독한 한파에 사람만 고생하는 것은 아닌가보다. 집의 이곳저곳이 얼어터지고 있다.
결국 마당아래 땅 밑의 상수도관마저 얼어버렸다. 이건 우리가 손 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임시대용으로 우물(시골집이라 우물이 있다)의 모터를 작동시켜 땅 밑 지하수를 끌어올렸다.
그런데 몇 년 동안 방치한 시설이라 온통 녹물이다. 몇 시간을 틀어도 녹물 뿐 이다. 이 물로 세수하고 이 닦고 빨래를 했다. 말 할 때 입안에서 녹물냄새가 났다. 빨래한 새 옷인데 녹물 냄새가 난다. 머리를 움직일 때 마다 머리카락에 배어있는 녹물냄새가 진동을 한다.
녹물은 벌건 빛깔도 그렇고, 냄새도 비릿한 것이 꼭 핏물 같다. 핏물? 구제역 매몰지가 생각났다. 혹시… 이 지역에 매몰지가 있다는데 핏물이 섞여 있는 게 아닐까, 불안하기도 하다.
녹물은 보름동안 계속되었다.

집이 살아있는 생물 같다. 추운 날씨에 집도 울부짖는다. 어디선가 얼음 박힌 수도관이 떵~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리다. 날씨가 풀리면 상처에서 고름진 물이 흐르듯 집 곳곳 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앞집 은영이 네와 옆집 민준이 네는 별 탈 없는 것을 보면 집을 관리하는데도 관심과 노하우(혹은 경험)가 필요한 것 같다. 마치 엄마가 관심과 정보를 가지고 돌보는 아이가 잘 아프지 않듯이. 우리처럼 초짜를 만나면 집도 고생하는 법. 도시의 이로움을 버리고 시골에서 살려면 그만큼의 노력과 공부가 필요한가 보다. 특히나 남한강의 강바람과 양평의 눈 덮인 산의 겨울바람 앞에서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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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3: “눈의 여왕이 다녀간 듯한 마을 풍경”

 

자연의 혹독함을 배우는 것이 시골의 겨울이다. 문 하나만 열고 나서면 바로 강과 산과 벌판의 한가운데다. 자연과 기후환경에 온 몸으로 부딪치는 것이다. 무장 해제된 기분이랄까. 그래서 더더욱 난방시설과 수도시설의 소중함을 눈물로 배우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살려면 이 줄을 꼭 붙들고 있어야 한다. 겨울, 혹한 속에서. 남한강의 겨울은 잔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