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영향을 줬는데 지금 나 몰라라 하는 그것이 잘못됐고”
– 진폐환자 김상전의 이야기 –
당신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가? 광부의 얼굴, 광산노동자의 얼굴을 그려보라. 탄가루가 묻은 검은 얼굴, 순박한 눈빛, 어쩌면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탄광촌은 박광수의 영화 이 그려낸 것처럼 실패한 운동권 지식인이 숨어들어간 은신처이거나, 영국 영화 에서처럼 발레를 꿈꾸는 소년이 상실과 성장을 경험하는 공간으로 그려지곤 한다. 최소한 필자에겐.
이런 낭만적인 이미지는 태백에서 아직도 석탄을 캐내는 광산현장을 보고, 진폐환자의 고생스런 말년을 마주하고, 또 석탄박물관에서 굳어진 폐를 보아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조지오웰의 에서 영국 광산촌의 비참한 주거시설을 묘사한 대목을 읽고서야 탄광촌의 낭만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되었다고나 할까?
오늘 만난 김상전 님(한국진폐재해자협회 서울경기지부 총무부장)은 탄광에서 일한다면 당연히 캐는 당연히 광부들만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일면적 이해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김상전 님은 발파전문가로서 관리자였고, 굴진업체를 운영하던 사업주이기도 했다. 그의 이력을 들으면서 당시 막 태동하던 한국적 자본주의 축적체제의 개척자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었다. 6,70년대 태백으로 모여들었던 이들이 모두 가난한 농민의 아들은 아니었다. 어느 시대에든 그 내부에는 불균질한 배경을 가진 계급계층이 존재하고, 그 충돌을 이해하는 것은 현실을 단면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것을 김상전 님의 이야기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김상전 님은 진폐환자이긴 하지만 어떠한 사회보험의 도움도 받지 못한 환자이다. 한국의 진폐요양제도는 10~30년 간 광산에서 젊음을 보내고 늙어가는 퇴직노동자들을 적대적인 두 세력으로 갈라놓았다. 진폐증의 인정요건에 해당하는 9가지의 합병증 가운데 하나 이상의 합병증이 발견되면 요양대상자가 되어 병원에 입원조치되며 동시에 월 250~300만원의 급여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 9개의 합병증 가운데 한 가지 증상도 없는 진폐환자들은 직업병 환자이되 집에 ‘방치되는’ 재가(在家) 진폐 환자가 된다.
앞의 요양환자들은 (이하 ‘전국 진폐’)회원이 되어 원하든 원치 않은 보험급여를 깎이지 않기 위해 투쟁하는 투사들이 되었고, 뒤의 재가 진폐환자들은 (이하 ‘한국 진폐’)의 회원이 되어 치료권과 생활권 보장을 위해 투쟁하는 투사가 되었다. 전자에는 3,500~4,000명의 회원이 있고, 후자에는 1만 5천~2만 명의 회원이 등록되어 있다. 또, 이 두 조직 어디에서 속하지 않거나 그 존재를 모르는, 혹은 사망한 수만 명의 광산 퇴직노동자들도 있을 것이다.
는 2000년대 중반부터 재가 진폐환자들의 권리를 위해 사회전면에 나서서 투쟁하였다. 영화 에서 죽어간 동료노동자의 모습에 분노하여 갱도를 뛰쳐나오던 광산노동자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탄광촌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올해 12월(2010)부터 재가 진폐환자들은 최저생계비 정도의 보험급여를 매달 지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개정을 통해서이다. 김상전 님은 이를 쟁취하기까지의 과정을 비상한 기억력으로 들려주셨다. 이 분들이 거리로 나섰던 기록들은 2008년 일간지의 사회면을 검색하면 볼 수 있을 것이다.
? 법 통과되기 전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요?
작년에 국회에, 민주당 조정식 의원을 통해서 질의서를 냈어요. 진폐라는 것은 불치병이라고. 죽을 때까지 낫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판정을 받고 나서 재검사를 받으면 9급이 11급으로 내려가는 것은 잘못된 거 아니냐고 말이야… 의사판정인데 하향이 되냐고. 의사들, 박사들인데 말이야. 노동부는 잘못이 없다는 거야. 우리는 대항할 힘이 없잖아. 한나라당은 맨날 똑같고. 그래서 민주당으로 질의했단 말이야.
* 사진 2. 2008년 9월 24일 에 실린 회원의 청와대 앞 일인시위 모습
? 진폐증 판정에 문제가 많다는 말씀이죠?
현재 판정이 잘못된 것은, 우리가 약자다 보니까 재심을 신청하면 기각이 반수 이상이고, 재심이 안 되는 거지. 위에서 억압하니까 판정의사들은 그대로 따라가는 거지. 진폐 판정 의사들이 모인 판정협회가 있는데, 의사들이 8명에서 15명으로 늘었다고 해서 그러면 나아지겠지 했는데 결과는 한가지예요. 두 명씩 돌아가면서 판정을 한다는데. 그래서 우리가 그랬어요. “실명제로 합시다” 그랬어요. 노동부에서 안 된다 그래. 왜 안되냐 했더니, 실명제 하면 마음 잘못먹은 사람이 칼부림 할 수도 있지 않냐 하는 거야. “칼부림 안 당할 수 있게 판정하면 되지 않냐” 했지. (엑스레이) 사진이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고, 앞에서 보는 거 하고 옆에서 보는 게 다르다고 하더라고. 그쪽에서.
? 판정이 그렇게 어려워야 한다는 게 이해가 잘 안 가는데요
아무리 투쟁해도 안 들어주는구나, 사람은 계속 죽어나가는데. 재가 진폐환자들은 100명 죽어도 한 사람 진폐로 인정받기가 힘들어. 죽으면 진폐가 아니라 다른 병으로 죽었다고 진단을 내려버려요. 지금은 (기준이) 더 강해져서 요양환자도 진폐 아닌 사망원인이 나오는 경우가 있어. 9가지 합병증 중 하나로 죽은 게 아니라, 고혈압으로 죽었다… 그러면 유족급여가 안 나와요. 장례비 120일분이 안 나와. 진폐 사망이라야 나오지. 그런 게 억울하고.
? 열심히 일하셨는데 이제 와서 이렇게 싸워야 한다는 게…
과거로 갑시다, 6,70년대에는 발달이 안 되고, 국가도 가난하고. 우리가 캐낸 탄을 일본으로 수출하면서 살림이 부흥한 거야. 탄을 조금 더 캐려고 사업주, 감독자, 광부에게 ‘산업전사’ 고상한 이름 붙여서 생산에만 열중하고. 보호장치 없이 앞이 안 보여도 도급제로 하다보니, 더 캐내야 돈을 많이 번다고, 그래서 병이 더 많이 걸렸어요. ‘산업역군’ 이라면서… 산업전사, 산업역군 신나지. 탄으로 정부 관료도 그 돈의 영향을 입었지. 연탄불, 온수, 밥 해 먹고, 모든 영향을 줬는데, 지금 나 몰라라 하는 그것이 잘 못됐고.
? 도급이라 하면…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도급이라 하면 기본급만 있는 거지. 출근비, 입항수당만 받고. 탄 10톤을 캐면 9톤 팀보다 많이 받고 그게 바로 도급이예요. 내가 했던 굴진도 마찬가지예요. 저쪽 1미터를 파고, 이쪽이 1미터 20을 팠으면 돈을 더 받는 거예요. 그래서 죽자사자 하는 거지. 산업전사, 역군 이런 말에 실제로 자부심을 갖고 그랬죠. 양복 입고 이래 가면 술 외상 먹자 그래도 안 돼. 시커먼 얼굴에 장화신고 가면 금방 외상을 줘요. 그래 인기가 많았다고.
? 탄을 캐는 광부가 아니라 굴진사업을 하셨다는 거네요.
김해공병학교를 다녔는데, 많이 배웠다고 들어가서 소위가 됐어요. 발파학을 배우고 나니 상급 장교가 같이 사업을 하자고 해서, 전라도 진안, 충청도 다니면서 금맥 찾는 거, 시멘트 찾는 거를 하게 됐어요. 그러다 망하고 태백까지 가서 도계에서 석공(대한석탄공사) 관리직을 하게 된 거지. 아침에 한번, 저녁에 한번씩 항내에 들어가 훑어봐야 돼요.
처음에 화약 관리하면서 보니까 감독이 내가 받는 돈의 두 배를 받는 거야. 가까이 가서 물었어. 감독은 어떻게 되냐, 시험 친다고 하더라고. 생산문제, 위험문제 공부하면 된다고 하면서 공부하던 책을 주는 거야. 2, 3개월 공부해서 시험 쳐서 합격하고 관리직을 하다가, 굴진업자를 보니 돈을 물 쓰듯 하더라고… 그래서, 굴진업체 하청을 나를 달라 해서 굴진업자가 됐지.
? 석탄공사의 하청회사를 운영하다 진폐증에 걸리신 거군요…?
진폐에 걸리는 것은, 내가 관리자였으니까 생각도 안 했어요. 99년 목에 가래가 끓고… 2000년 검사신청해서 받으니까 11급이 나오더라고. 하루 두 번 감독하는데, 굴진업자가 돼도 하루 두 번 감독이랑 교대해서 들어가 보고 둘러보고 하거든.
그렇게 도계에서 석탄공사 하청을 하다가 굴진 마구리(갱도)가 3~4개는 되야 하는데, 측량하고 탐사해보고 희망이 없으면 중지하기도 하고, 두 세 곳 되다가 한 곳도 되고. 그런데 한 곳으로는 밥 못 먹어. 그래서 81년인가 큰 아이 초등 3학년 때 안 되겠다, 서울 가면 밥은 먹겠지, 애들 공부도 시키고… 해서 서울로 온거야. 현대건설 정무과에서 3년, 서울우유 교육관에서 실장 4년 하니까 나가라고 하더라고. 나이 많다고… 막을 내린 거지.
?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는데 좀 더 빨리 법개정 투쟁이 있었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2002년 김대중 정권 말기 때, 재가환자 월 73만원씩 주자고 했었어요. 신문에 났어요. 노동부공문을 내가 갖고 있어요. 이것이 끝을 못 맺고 노무현 정부로 넘어갔는데, 없어져버렸어요. 없어진 공문을 찾아서 전해준 사람이 있어요. 그 공문 갖고 찾아다니는데 말이 안 먹혔어요. 나중에 노동부 사람이 잘못을 인정하더라고. 힘을 내서 투쟁에 박차를 가해서, 2007년 공청회를 태백에서 하는데, 처음에 한 달에 53만원 주자는 거에서 40만원으로 내리자고 하더라고, 노동부 조OO 과장이. 우리가 허락을 안했어요.
서울 올라와서 인권위 시위도 하고, 올림픽 파크텔에서 2008년 공청회를 하고, 계속 밀고 땅기면서 싸우다가 2009년 말에 국회통과를 약속했어요. 국회도 많이 방문했어요. 통과 가능성이 많았는데 당시에 추미애 의원이 환노위 의장이었어요. 이 사람이 전임자 임금문제를 독단적으로 통과시켰나봐요. 민주당 징계를 받고, 정세균은 추미애가 처리하는 걸 결사반대하는 거야. 그래서 통과가 안 되고 넘어갔는데… 2월 국회에서 통과된다고 약속하더니, 또 추미애 때문에 김재윤 의원인가가 반대를 하고.
? 정말 험난하군요, 국회의원 싸움에 끼여서 법안 처리가 밀리고, 또 밀리고…
그래서 신문기사 난 걸 다 모아서 잘랐어요. 요리저리 붙여서 복사를 수백 장 해서 병원, 정밀검사 하는 데 우편으로 보내서, 국회에 편지를 써라, 글씨 잘 쓰는 것도 필요 없고, 자기 실력대로 활자 틀려도 관계없고, 4월에 국회통과가 안 되면 3만이 넘는 재가 진폐환자들, 가족, 친인척 들이 어떠한 선거에도 불참하겠다 써라, 했죠.
진짜 한통씩 부친 거예요. 국회 갔더니 사무실에 편지가 쌓여 있어. 내 생각인데 거기서 안산에 이화수, 천정배, 시흥에 조정식, 한나랑 박정숙 같은 사람들이 타격을 받아요. 안산에 많이 사니까. 4월 28일 국회통과가 됐는데, 마지막 회의에 끝나기 6분전에… TV로 지켜봤어요. 213명 참가 중에 반대가 1, 기권이 1이고 나머지가 찬성이예요.
? 보험급여를 받으시면 생활이 좀 안정될까요?
지금 영향 받는 게, 재가환자 11급한테 만 1년이 지나면 복지공단에서 통보가 와요. ‘정밀검사’ 받으라고. 전에는 신청해도 안 되던 게, 이제는 깎을라고. 면목동 사는 구 아무개가 2년 동 의증을 받았는데 물어봐요. 이번에 검사받으려고 했다고. 작년과 변동 없으니 받지 마라 했어요. 급수가 있는 사람은 신청을 안 해도 받으라고 하고, 13급이 연금에 해당하니까 검사를 받으면 의증이나 정상으로 나올 거라고. 법 통과 후 그런 일이 많아요.
3급 이상은 연금이나 일시금 중에 선택할 수 있는데, 지장이 없으면 연금을 가입하는 게 좋잖아요. 그런데 열 중 아홉은 다음에 떨어져요. 3급이 안 되요. 내가 3급은 검사받지 마라 얘기하는데, 그게 받으면 떨어져요.
? 제도가 만들어지면 그 때부터 다시 싸움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어디서나.
복지공단 가서 싸움도 많이 했어요. 보험료 아끼려고 온갖 것을 다 하니까. 연금액수가 노동자 평균임금의 65%로 정해졌는데, 복지공단이 막 협박을 해요. 검사받으라고, 연금에 지장 있다고. 너무 불공평해, 참 너무 해.
12월에 연금이 나오는데, 12월에 연금 타고 내년에 투쟁해야 돼. 급수 하향조정하지 말라고. 박사님들이 불치병이라고 하는데, 하향조정에 반대해야죠.
? 급여 뿐만 아니라 치료받을 권리도 찾으셔야죠
‘의증’이라는 게 우리밖에 없어요. 일본, 독일 다 없어요. 의증에 ‘증’자가 있으니, 반이라도 주든가.
‘후유 증상 진료카드’가 있는데, 그 수첩이 단 한 병원에서만 쓸 수 있게 정해놨어요. 내가 알기로 독일, 일본은 인터넷으로 나온다는데. 우리는 내가 부산 갔다가 갑자기 아프다 그러면 서울까지 와서 처방전을 받아야 돼. 인터넷으로 큰 병원, 큰 약국에서 약을 타게끔 해야지.
갈 때마다 엑스레이를 찍는 것도 아니고 얘기 좀 하고 처방전 받는 건데, 왜 병원이 정해져야 하는지.
? 이 투쟁을 하시면서 하고 갈등이 많으셨지요?
요양환자들 모임인 에서 자기들 혜택이 줄어들까봐 방해를 해서 법이 결정될 때까지 요양환자는 손대지 마라, 당부했어요. 요양환자들은 2008년 7월 1일 이전 받은 사람들은 전이랑 똑같이 급여를 받는 거고, 이후 판정받은 사람들은 바뀐 법대로 연금을 받는 거예요.
? 어떻게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 기억을 하시나요? 비법이 있으면 가르쳐주세요.
내가 기억력이 좋은 거는 일기랑 메모를 매일 써요. 날마다 저녁에 정리를 해 놔야, 만나는 사람들한테 정확히 얘기를 해줘야 하니까.
우리 조직이 서울경기에 회원이 1,200명이 있어요. 본부는 태백에 있고. 굉장히 힘이 드는 게 다 모이게 할 수도 없고… 월요일에 녹색병원, 화요일에 여의도성모병원, 수요일에 안산중앙병원, 세 개 병원을 돌면서 약 타러 오는 사람, 정밀검사 받으러 오는 사람 모아놓고 강의를 해요. 개정법 알려주고, 상담해주고.
1년에 두 번 총회를 하는데 돈 많이 들어가요. 점심도 먹여야 하고.
? 이 투쟁에 뛰어드신 계기가 궁금해요. 어떻게 시작하셨는지를 아직 안 여줘봤네요
이상하다 느껴서, 강원도 동해병원 요양환자실 관찰을 해봤어요. 밤에는 술 먹고, 밤새 고스톱 치고, 아침에는 얼굴이 형편없어지는 거야. 의사가 얼굴보고 많이 아프구나 느끼게. 약을 안 먹고 변기에 버려. 요양 종결이 겁나서. 가 2005년 10월 25일에 노동부 허가단체 339호 가 됐어요. 가 방해해서 기존환자는 손대지 않고.
요양판정 받으려고, 브로커가 많이 다녀요. 그걸 없애기 위해서 2006년부터 활동한 거예요.
요양환자가 되면 한 달에 250, 300만원이 나온다, 혜택을 많이 주니까 입원하려고 하죠.
선진국에는 진폐는 움직여야 된다고 나와 있대요. 요양한다고 침대에만 누워있으면 폐가 줄어든다고, 수명이 단축된다고.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여야 되는데.
한 번 요양 판정 받으면 절대로 안 나가려고 약도 안 먹고 밤새고 그래요. 2009년에 3천 8백명 정도가 요양을 하고 있어요. 코에 호스 끼고 있는 사람 제외하고, 3천명은 출퇴근하라는 거죠. 3천명에 3백만 원씩, 90억 원이 생기는데 산재 돈이 모자란다니 말이 안 되요.
내가 동해병원 가서 5일간 검사받기 전에는 사업도 해보고 했으니 보는 눈이 있는 거예요. 다음해 안산중앙병원 가서 또 5일을 검사받으면서 관찰을 한 거예요. 언젠가 투쟁해야 된다… 90억이면 재가환자들 연금이 나가요. 내가 교편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상한 거 안 지나쳐요. 국어선생을 했었어요.
? 몇 년 전까지는 태백지역 신문에 브로커 기사가 가끔 났던 것 같아요
브로커 지금은 거의 다 사라졌지. 그 어려운 환자들이 브로커한테 속아서 돈을 버려. 잘하는 브로커, 요양 잘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정선에 OO의원이라고 있었는데 거기서 무려 15년을 원장, 엑스레이 기사, 심폐기능 검사하는 사람이 짜고 해먹었어요. 2007년에도 태백에 브로커가 나타나서, 젊은 사람들은 도시 가고 없으니까, 멋지게 생긴 놈이 노동부에서 환자들 살피러 왔다고, 급수 받게 해준다고 30만원씩 한 20가구에서 받아갔대요. 새마을금고 가서 막 돈 빼다 주고. 그리고는 연락이 안 오는 거지.
? 석탄산업이 문들 닫고 태백을 떠난 사람들은…
서울 와서 노는 사람들 많아요. 엑스레이 하면 취업이 안 되고, 하루 노동밖에 안되고. 그게 어려움이예요. 지금 태백, 정선, 사북, 영월에 많이 남아있고, 반월공단에 공장이 많으니까 취업하려고 가고, 자식 따라 가고. (회원들) 주소를 보면 아파트로 되어 있어서 보면 전세고, 몇 달 있다가 보면 전세가 월세로 바뀌고 주소 바뀌고.
회원 1,200명 중에 7,8백 명은 급수가 있고, 나머지는 의증이거나 정상으로 나온 사람들이예요. 급수 없어도 협회 가입하는 거예요. 참 어렵지. 공사판 일일잡부, 공장 경비, 공장 청소를 70살에도 하고 있어요.
? 여성회원도 있나요?
있어요. 여성이 5, 60명 있어요. 선탄, 잡석을 골라내야 되고, 탄을 부숴요. 탄 먼지가 말도 못해. 선탄을 100명이 하면 관리자만 남자야. 돈이 적어. 입항수당이 위험수당인데 그런 게 없으니까.
? 남편은 탄 캐고 부인은 선탄하고 그러는 사람들도 있었겠군요.
있지. 부부진폐증도 있어요. 아버지랑 아들도 있고, 아버지 어머니 둘 다도 있고. 너무 힘들어. 제도가 너무 잘못돼서 기초수급이 안돼요. 아들 있으니 안 되고, 아들이 직장 있으니 안 되고. 교육이 부족하니 서울 와서 뭘 해요…
많이 배우면 태백공고를 갔지. 태백공고가 유명한데 광산학과 나오면 3개월 연수받고 감독취업이 됐거든. 그게 제일 출세하는 거지. 도시의 공고나 상고랑 다르게 광산학과가 최고기술이었지.
? 조직 유지가 앞으로 큰 일일 것 같아요
2년 반 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마음이 더 바빠요. 대의원도 뽑아야지, 사무실도 얻어야지, 유지비도 들어가지. 회비를 받겠지만.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다르다고. 돈 나오면 연락 안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회비를 일일이 받을 수도 없고.
강원케어센터가 있어요. 들어갈 자격이, 기초수급자도 아니고 차상위도 아니면서 밥을 끓여줄 여자도 없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데, 한 달 20만원을 내야 돼. 고민이, 20만원을 누가 낼수 있냐고, 정부가 하는 건데도, 돈 나올 데가 없는데. 일반요양원은 한 달에 7, 80만원 내야 돼. 정말 못 내서 나온 사람도 있어요. 이번에 연금이 60만원 나오니까 20만원 내고 있을 수 있겠지.
?
임대료도 높고, 사무실 유지비도 많이 들어갈 텐데 사무공간이 별도로 필요한 이유가 있나요?
계속 환자가 나오고, 예비환자가 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발병하는 병이니까. 모르고 있어요. 권고하고, 설명하고, 가입하고, 보험, 급여 문제가 많이 생겨요. 같이 투쟁해서 찾아줘야 하니까 행정도 만만하지가 않아요. 사람은 많은데 시위참석도 나 아니라도 모이겠지 하고, 막상 돈 나오면 힘들어져요.
전국에 13개 지부가 있어요. 2만 명 가까이 되고. 어떻게 해야 환자 도움을 주나. 내 힘으로 안 되고 내 맘대로 안 되는데.
? 태백에 계실 당시 관리자로 일하셨고, 나는 노동자랑 다르다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열심히 활동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작년에 그만두고 싶었는데, 내가 장부 만들고 명부 만들고, 영수증 챙기고. 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 컴퓨터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1934년생, 77살인데 저녁에 집에 가면 누워있어요. 너무 힘들어. 글쓰는 게 일인데 글만 써서 그런가 어깨가 오른쪽 어깨, 팔이 아파서 걱정이예요. 컴퓨터 배워놨으면 좋을 걸. 전부 손으로 써서 기록을 하고 있으니.
내 형편이 큰아들이 사업하다 부도나고, 아내가 2002년에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서 아직도 병원 다녀서 어려워요. 나이 많아서 폐가 나빠서 일도 없고. 다른 건 할게 없잖아.
? 사회복지가 잘 돼 있으면 덜 힘드셨을 텐데…
우리 처가 다쳤을 때 동사무소에 구호 신청하러 갔었어요. 아들이 있어서 안 된대. 딸이 40대 중반인데 미국 가서 LA 살고 있거든. 그거까지 조회해서 무슨 구호대상이냐고, 현실을 모르고. 노부부가 자기 집 작은 거 갖고 있다고 해서 안 된다고 하고… 집 먹고 사나? 현실정치가. ‘굶어죽든 살든 손 안 벌리겠다’ 하고 나왔어요.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