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상근활동가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그들의 권익을 주장하면서 어떤 안도감을 느낀 적인 있는가. 하는 일이 그렇다 보니 비정규 노동자·사각지대·안전망·권리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사실은 잘 모른다. 투쟁하는 노동자의 분노, 간절한 바람 같은 것에 대해…. 그 절박함을 혀끝으로 흉내만 내면서 따라다니는 건 아닌지 돌아볼 때가 있다.

그런데 깊이 이해하고 연대할 수 있다고 느끼게 하는 언어를 만날 때가 있다. 단말마의 구호보다 현실을 절절히 보여 주는 스토리텔링이 관심을 부르고 변화를 부르는 좋은 전략일 수 있는 것이다. 은 여성의 돌봄노동에 대한 스토리텔링이다.

지난해 “간병·요양 노동자에게 따뜻한 밥 한 끼와 근로기준법을, 환자와 노인에게 따뜻한 돌봄을” 이라는 슬로건으로 시작한 은 여성노동의 특성(!)을 한껏 살린 생생한 노동의 이야기가 살아 있는 캠페인이다. 올해 두 번째 캠페인을 시작한다.

병원에서 가정에서 거동이 불편한 환자와 노인을 보살피는 간병 요양노동자들은, 아시겠지만 나이 지긋한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경제형편이 괜찮은데도 용돈벌이를 하려고 이 일에 뛰어드시는 분들은 많지 않다. 열 중 다섯은 본인이 가족의 생계를 부양한다. 열 중 셋은 본인과 가족이 모두 벌어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가정으로 일하러 온 간병인에게 빨래를 하라, 반찬을 하라, 걸레질을 하라, 간병일이 아닌 일을 지시하면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노동력을 빼먹을 궁리를 한다. 병실에서 일하는 요양노동자가 새우잠을 자도 쪽잠을 자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꽁꽁 언 밥을 비닐봉지째 전자레인지에 넣어도 그러려니 한다.

가정에서 병원에서 노인과 환자를 돌보면서 그들은 아프다. 가정에서 병실에서 온몸이 쑤시도록, 잠을 못자면서, 감염의 위험 속에서 돌본다. 휴일이니 휴가니 법정노동시간이니 하는 고급어휘는 이들의 것이 아니다. 산재 직업병, 인정받아야 한다. 근로기준법 적용해야 한다. 그리 되면 이 사회가 여성의 돌봄노동을 보는 사회적 시선을 달리하고 존중할까. 씻겨 주고 먹여 주고 굳은 몸을 돌려 주고 산책을 하도록 도와주는 이 여성들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최고의 임금을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돌봄노동은 자기의 몸을 돌보고 스스로 챙겨야 하는 노동을 타인에게 부탁하는 일이다. 왜 싸게 헐값으로 부리려 하는가. 왜 존중하지 않는가. 돌봄노동이야말로 소중한 노동, 귀한 노동으로 존중받아야 할 텐데 말이다. 시급으로 치면 최저임금의 반밖에 안 되는 급여로 나와 내 가족 돌보는 사람을 산다. 나는 우리는 왜 돌봄노동에 헐값을 매길까.

엄마가 할머니가 가족을 돌볼 때 ‘장한 어머니상’이니 ‘착한 며느리상’이니 칭송하던 사회가 정작 여성의 돌봄노동이 직업의 형태로 공식화하자 여성을 몰인격의 타자로 밀어내 버린다. 여성의 돌봄을 낭만화하거나 미화하는 언술의 화자들은 이 전하는 여성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일이다.

얼마 전 작은 북콘서트에 갔다가 인상적인 말을 들었다. “청소노동자가 연봉 7천만원을 받는다면, 그걸 인정할 수 있을 때 내 안의 이명박을 거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청소노동자를 돌봄으로 바꿔 보시라.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