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치. 누구는 라 하고, 누구는 이라 한다.

위키피디아에 들어가 보니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느냐’가 정치라 한다. 정치는 나누는 것, 분배의 문제라는 위키피디아의 정의대로라면 정치얘기가 아무리 재미있고 술자리 안주거리가 많아져도, 이 나라 정치는 아직 할 일이 많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2011년의 키워드와도 같았던 무상급식, 반값등록금, 청년실업, 경제위기, 99% 대 1% 시위, 한미FTA 까지 떠올려보면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느냐’와 관련이 없는 이슈가 없다. 그런 면에서 2011년의 대중은 어느 때보다 정치의 본질에 다가섰다고 할 수 있겠다.


거기에 비추어보면 2011년의 노동운동은 정치적 언어를 갖지 못하였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죽어갈 때, 대우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공장 아치에 올라갔을 때,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통지서를 받고 눈물 흘릴 때, 불법이라는 법관의 판결을 조롱하며 비정규노동자들을 고통으로 몰아가는 현대자동차 자본에 대하여 정치적 언어로 말하지 못하였다.


공장 울타리 안의 문제가 아니라 너와 나의 문제이다, 나에게 일어났듯이 너에게 일어날 일이다. 너의 고통을 내가 알듯이 나의 고통에 공감해 달라. 그러나 노동운동은 못하였다. 배타적 지지 관계에 있는 진보정당이 이를 하였는가. 농성이 일어나면 뛰어가서 앞줄에 앉아있고, 기자들 앞에서 침울한 표정을 짓는 것이 진보정당의 노동운동 지원방식인가.


노동을 모르는 자들, 관심 없는 자들이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정치라면 플래카드 앞에 서는 일보다 나를 모르는 곳, 진보정당을 모르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 정치일 것이다.

노동으로 향하는 정치는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아직은 연대이고 공감일지라도 타인에 대한 연대와 공감이 정치의식의 시작일 테니 2011년의 SNS 야말로 정치의 시작이요 끝이었다. 막다른 삶의 고비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정서적 지원을 하자는 운동이 결실을 맺어 치유센터를 세웠다 한다.


이 지원활동이 있기 전에 노동운동 내부의 조직으로 쌍용차 노동자들의 심리치유활동을 폈지만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한 채 지친 바 있다. 성공과 실패는 어디서 갈리는가, 노동운동의 조직과 언어, SNS의 언어와 네트워크 사이에 무엇이 놓여있어 결실의 차이를 보였는가 짚어볼 일이다.     


현대자동차 자본이 2011년 차를 *0000대 팔아치우고 연말 성과급 잔치를 벌일 때, 같이 차를 만들었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하청비정규노동자들의 존재를 누가 떠들어줄까. 현대 자본을 괴롭게 하고 망신 주는 것은 주가 해주는가. 아무도 못하였다. 당사자들이 꿈틀거리고 부르짖고 있지만 울림으로 연대로 되돌려주지 못하고 있다. 노동운동 조직은 조직내부 정치와 의식을 치르느라 바쁘고, SNS에서도 너무 급진적으로 나가면 흥미도 재미도 잃고 찬바람만 날릴 것인가.  


연합을 해도 좋다. 통합을 해도 좋다. 홀로 남겠다 하여도 좋다. 그러나 계급의 정치라야 사회경제적 삶을 나아지게 할 것이 아닌가. 계급 간 연합이고 계급 간 타협이고 계급의 쟁투이다. 어정쩡하게 섞어 놓으면 내편도 잃고 네 편도 잡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진보정당이 누구의 편인지 대중들은 지켜본다. 안다.

이 나라 이 민족의 역사를 봐도 실패하여 반역이 되었건, 성공하여 정권을 잡았건 바닥에서 부글거리고 끓고 있는 민중의 원한, 민중의 꿈을 잡아채어 자기 것으로 하는 자가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가.  


복지. 2011년 복지담론은 부상하는 단계를 넘어 대세가 되었고, 흐름이 되었다. 복지 자체를 궁극의 사회체제로 격상하는 세력이든, 생산체제를 건드리지 않는다고 폄훼하는 세력이든 복지가 대세가 되었고,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사회제도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때이다. 개인이 생존하고자 몸부림쳐도 국가가 나서서 벼랑으로 몰고 자본이 나서서 낭떠러지로 밀어버리는 공포체험이 뉴스거리도 안 되는 체제이기 때문인 걸까. 지친 대중들이 자기개발과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내려놓고자 하는가. 


분명한 것은 복지제도의 작은 변화조차 그것이 결핍되었던 이들에게는 보호막이 되고 희망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여태껏 본 복지담론, 복지논쟁은 선거 출마자들, 담론생산자들이 주로 제기해온 것이다. 허전한 이유는 노동운동의 복지담론, 복지논쟁이 없기 때문이다. 대를 이어 고용을 승계해주고 싶어서 자본과 협약을 맺는 아버지의 마음으로는 노동운동의 복지담론을 만들 수 없다.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도 줄 일자리가 없는 노동자, 한 부모로 아이를 키우며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여성비정규직노동자의 처지에서라야 복지의 흐름에 올라타야 한다는 절박함이 생기지 않겠는가. 일하는 사람 안에서도 더 힘들게 일하는 사람을 위하려면 노동운동 밑돌을 바닥부터 다시 깔아야 함을 알아야지만 우리가 얕보는 복지가 다수의 노동자에게 중요한 문제임도 깨닫게 되겠다. 노조 가입한 노동자가 백명 중 열이 안 되는 지금은 어려운 주문일 수 있겠다. 


나 노조원이요, 나 노동자요 하는 이들이 숫적으로 우세해야 계급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음은 물론이다. 아니면 대표성을 갖기 위해 가장 정치적인 의제를 내야 하는데.

비정규, 아르바이트, 하청, 백수, 실업자, 실업계고교생, 다수 여성노동자가 조합원이 된다면 복지문제를 아니 하면 무엇을 하겠는가. 그래서인가 2011년에 들은 가장 정치적인 말 가운데 하나, “모든 사업 다 중단하고 조직, 오로지 조직 하나만 살려서 해야 승부를 볼 수 있다” 는 전직 노조위원장의 말이다.   


고개를 돌려 여기 좁디 좁은 내부를 본다. 산재보험을 개혁하자고 외쳐왔지만 변변한 성과가 없다. 이유를 채 모르는 것인가. 개혁이라고 떠벌려놓고 직업병 인정기준 매만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정치적으로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 아닌가.


정치는 다수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를 걸고 바꾸고자 함인데, 노동조합 안의 구성원에게 걸린 문제와 전체 노동자에게 시급한 문제를 구별하지 못함이 이유이다. 산재보험이 무언지도 모르는 이가 일 닥치자 여기저기 읍소하러 다녀야 하는 게 지금의 썩은 보험제도다.

산재보험이 필요한 이들에게 보험이 찾아올 수 있도록 관료주의적, 기계적 장벽 일체를  없애는 일과 직업병 기준. 이 가운데 무엇이 우선한 정치적 과제이겠는가. 


2011년의 정치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노동자의 소리가 없었다는 것. 지난 대선에서 여당의 대통령후보였던 이가 크레인에 올라간 김진숙을 살리겠다고 동분서주할 때 많은 이들이 심드렁, 팔짱기고 냉소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게 정치가의 모양 아닌가. 변할 수 있다. 시절이 변하면 정치하는 사람도 변화를 받아들이면 된다. 더 가난한 사람들, 밀려난 사람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다가가야 한다.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기획은 실패하였다고 봐야 할까. 노동운동이 특정정당에 배타적지지를 고수하는 것이 죽은 명분을 붙잡고 살려보겠다고 하는 자기위안은 아닌가.

90%의 노동자. 노동조합이 없고, 노동조합을 모르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그들은 진보정당에 관심이 없어도 진보정당은 그들에게 가야 하는데. 


낮에 공장지역을 돌다 보면 철문에 기대어 담배를 문 젊은 노동자, 불 꺼진 공장에 앉아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는 젊은 노동자가 있다. 노동 상담 찌라시 한 장에 그들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본다. 글 모르는 사람, 안 배운 사람도 그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그것이 정치의 힘이요, 정치의 필요일 것이다. 많이 만나야 한다. 더 가난한 사람들, 밀려난 사람들. 생계의 최전선에서 흔들려도 지키는 이들을 찾아가야 한다. 당신이 밀려나지 않기에 내가 버틸 수 있는 것이라 말 해주어야 한다. 정치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가. 또는 정치이야기로부터는. 세상 더 나아져야 한다. 더 나누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