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도 적은 데 일하러 오는 의사라면 의식 있는 의사입니다”
– 텐묘 요시오미 선생 –
지난 10월 28일 백발의 신사가 노동건강연대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여든의 나이가 무색하게 단정한 용모의 신사는 일본에서 50여 년 간 농촌노동자, 이주노동자 진료활동을 해온 상징적 인물인 텐묘 요시오미 선생입니다. 텐묘 선생은 노동건강연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셔서 많은 후배들을 만나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일본노동자의 정신건강문제”를 주제로 강의하고,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만나 한국노동자들의 정리해고 투쟁과 정신건강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신문, 여성주의 인터넷 언론 와 인터뷰까지 진행한 텐묘 선생은 노동건강연대 회원들과의 만남을 마지막 일정으로 서울을 떠났습니다. 통역은 일본에서 텐묘 선생과 함께 활동했던 스즈키 아키라 노동건강연대 활동가가 맡아 주었습니다. 스즈키 씨는 감개무량하다고 말하였습니다. |
§ 텐묘 선생의 이야기
이렇게 후배들에게 말씀드리는 자리를 만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몇 번 한국을 방문했었지만 스즈키 씨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니 좋습니다. 노동건강연대 사무실도 처음 왔습니다. 가나가와 직업병센터보다 여기가 조금 넓군요. 가나가와 직업병센터는 여성 2명, 남성 3명이 일하고 있는데 11월 남성 1명을 새로 채용했습니다.
제가 의사가 된 지 50년이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의사가 되려고 한 게 아니라 경제학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친구들 사이에 사회 하부구조를 파괴하지 않으면 상부구조를 만들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했는데 고민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2차 대전에서 패전하고 구제도 중학교가 신제도 고등학교로 변화되는 시기였습니다. 어제까지 군국주의를 가르친 선생들이 계속 가르치고 있었죠. 교과서 자체도 검열로 군데군데 까맣게 된 교과서밖에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제국주의 교육이 180도 뒤집어지게 되고 그때까지 선생님 말은 다 옳다는 교육만 받았지만 선생님 말도 틀린 점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두 눈을 가리고 있던 장막이 걷히면서 올바르게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적 유물론이나 마르크스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하부구조가 중요하다고 한 친구는 조용한 사람이었는데 선생님과 논쟁하고 이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도 유물론에 대해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았는데 제게 아주 중요한 친구였어요.
저는 중산계급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대학 진학은 당연시되었어요. 대학에서 경제학 하겠다고 진학했는데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제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하부구조, 상부구조 공부하지 않아도 운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가 1954년이었습니다. 일본 천황이 살고 있는 지역 광장에서 학생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망자가 나오고 친구가 다리에 총을 맞아서 쓰러졌습니다. 그 때가 대학 3년 때였는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온몸으로 학생 운동을 해야 하는 내가 회사 입사시험을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미군정 상황에서 의대에 들어가려면, 대학에서 교양 2년 하면 의대 입시자격이 생겨요. 3학년 때 주변에서 의대 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의사하면 입사 안 해도 되니까… 직업혁명가를 하려고 해도 나하고는 안 어울려서. 의대 가려면 부모양해를 받아야 하는데, 국립대는 어렵고 사립대 가야 하는데 돈이 드는데 괜찮은가 물었어요. 부모님은 너무 기뻐하셨죠. 한번 나가면 일주일씩 안 들어오던 아들이 의사 한다고 하니까 좋아하시죠. 자식이 뭘 공부하는 지도 모르셨는데.
결국 치바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하다가 물리학 시험 계산을 안 해도 되는 동방대에 입시를 보고 들어갔어요. 물리학 시험은 정의만 쓰고 계산은 백지로 내고 들어갔죠. 의대 4년, 인턴 1년하고 진로를 고민했어요.
교수를 정상에 두고 피라미드 식으로 한 단계라도 계급이 다르면 차별을 하는 의국제도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어요.
하야시 준이치 라는 농촌의학소설을 쓴 작가가 있었는데 공산주의자였고 훌륭한 의사였어요. 그분이 아키다 동북 농촌지방에서 일하면서 쓴 농촌의학소설을 읽고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이라는 책을 읽고 영향을 받았지만. 하야시 선생이 도쿄에 들어와서 의료생협 원장을 한다는 말을 듣고 진로 상담을 하러 찾아 갔어요. 전화해서 선생님 책도 읽었고 상담하고 싶다고 했더니 오라고 해요. 1955년 이야기입니다.
병원 문 열자마자 석탄난로가 있고 슬리퍼가 싸여 있어요. 당시 기준으로도 지저분한 병원이었어요. 하야시 선생은 의료공부는 못하지만 현장의료에 대해서는 공부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대학교 의국에 들어가면 급여도 안 나오는데 의료생협은 초급이 2만 5천 엔이라고 하니, 마침 내과의사 비어있다고 해서 들어가게 되었어요. 당시 아내는 치바 대학교 연구소에 있었는데 내가 돈을 벌면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있어요.
의료생협에는 선배외과의가 2명이 있었는데 의학적 조수로서 모든 수술에 관여하게 되었어요. 외과라면 제대로 수술이 되어야 객관적으로 의사로 인정받을 수 있는데 내과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독일말로 ‘문트 테라피’ (입으로만 하는 치료)만 하는 의사가 되고 싶진 않았어요.
노동자 동네이고 오는 사람도 가난한 사람이 많았어요. 아주 가난한 할아버지가 식욕이 없다고 왔는데 포도주에 물 섞어서 주었더니 아주 좋아해서 약을 더 달라고 하는 일도 있었어요. 당시 상당히 충격 받은 사건이, 고등학교 친구가 도쿄대 법대를 갔는데 결핵 때문에 1년도 못가서 전문 병동에 입원을 했어요.
가끔 문병을 가서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어려운 암이 있어도 알려주지도 못하는 환자하고 나날이 만나는 게 힘들다고 하였더니, 그 친구가 조용히 말하길 ‘의사는 좋다, 일단 병원일이 끝나고 나가면 일상생활을 하니까. 환자는 사망시기가 다가오는 환자하고 (병원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 어떤 호흡이 오면 간호사 방 가까이 이동하고, 그리로 이동하면 7~10일 안에 사망한다는 걸 알고 있다’ 고 말하는 거예요. 저는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어요.
지금도 그 친구 말을 생각하고 그 친구가 간호사실 옆방에 어떤 심정으로 갔는지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저는 예방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의료생협에 7년 정도 있다가 예방에 대해서 연구하고 싶어서 대학교를 옮겼어요. 의료생협이 있던 노동자동네에 겨울이 되면 농사일이 없는 농민들이 일하러 도시로 나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런 분들 문제를 생각하게 됐어요. 당시 노동기준법에서는 1년 이하 단기노동자는 검진을 안 해도 된다는 조항이 있어서 검진을 안했어요.
당시 나는 병을 조기발견하고 조기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기발견은 2차문제고, 1차 예방을 알게 되면서 그런 주장에 결함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국내 이주노동자 문제를 생각할 때, 시골에서 도시로 나올 때 고향에서 정치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쿄에서도 선거권에 관심이 없어요. 진보지사가 정치하고 있었는데도 노동자들이 표가 안 되는 거예요. 그들의 고향에서 먼저 무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후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의 노동자들의 투쟁과 노동자안전보건에 대해서 공부하고 의사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했어요.
법을 지키고 있으면 노동자 건강이 지켜지나요? 그렇지 않아요. 기술혁신 속도가 너무 빠르니까요. 법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노동자 건강을 지킬 수 없죠. 정보통신 사회, 컴퓨터사회가 되면서 컴퓨터와 어떻게 어울려 나가야 할지도 문제예요. 컴퓨터는 24시간 일해도 피곤함이 없어요. 인간이 컴퓨터 기준으로 일하면 안 되는데 이 훌륭한 발명품을 잘 이용하는지가 과제입니다.
§ 노동건강연대 회원들의 질문에 답하다
? 활동하시면서 영향을 받은 조직, 애정이 많은 조직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가나가와 근로자 의료생협이 작년에 30주년을 맞았어요. 애착이 많은 조직이죠. 가나가와 직업병센터도 아주 애착이 많아요. 노동과학연구소도 설립 90주년이 되었어요. 제가 거기 객원연구원인데 외국 논문 공짜로 읽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연구소에 일주일 한 번씩 다녔는데 아니었다면 세계적인 흐름을 놓쳤을 거예요.
지금이야 검색해서 논문 다운로드 받으면 되지만 옛날에는 연구소 가서 WHO 논문 보고, 필사하면서 영어공부도 하고 했어요.
? 가나가와 의료생협은 어떻게 시작이 되었나요? 1979년이면 일본 노동운동이 하향세였을 시기인데 이 때문에 지역운동, 노동자 의료생협을 고민하신 건가요.
친구들하고 항만노동자 건강검진 시작한 게 계기가 되었어요. 이 사람들이 옷차림도 더럽고 말도 거칠고 병원도 안 가요. 항만노동조합하고 의사 그룹이 얘기하면서 항만노동자를 위한 병원, 거점을 만들자고 유인물을 냈어요. 과격하다고 소문이 났죠. 그러나 노동조합 사무처장 하는 사람이 강력하게 ‘제가 다 준비하겠다’고 하면서 진료소를 만들고 검진 의사 중에 제일 나이가 많았던 제가 진료소장이 되었어요.
? 의료생협이 지역별로 특성이 있는지요?
지역특성이 있습니다. 요코하마 항만노동자지역에 가 있고, 조선소가 있는 요코스카에 중앙진료소를 만들었습니다. 석면 관련 질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요코하마에서 가는데 전철타고 한 시간 거리라서 요코스카에도 따로 진료소를 만들었습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노동자진료 해 오신) 사이토 류타 선생이 하는 진료소가 개인병원이었지만 노동자 의료생협 이념에 동참해서 의료생협 산하로 들어오기도 했고요. 사이토 선생이 진료하는 지역에는 석면공장도 있었고 미군비행기장 있는 야마토 행정구역에 있었어요. 비행장 반대운동을 해서 소송해서 야간 비행을 중지시킨 싸움을 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미군기지는 야간비행을 금지했지만 결국 오키나와로 갔어요. 미군기지는 일본전체문제이기도 합니다.
? 일본 노동조합이 기업별노조를 벗어나서 지역, 연합 단체 활동이 활발하다고 하는데 어떤 흐름이 있습니까?
노조는 주로 자치단체노조, 공무원노조와 나머지는 기업노조예요. 최근 지역일반노조와 커뮤니티유니온이 만들어지고, 외국인 지부도 있어요. 기업노조에서 이탈한 사람이 들어오는 형태가 일본도 있고, 미국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형태가 기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컴퍼니유니온 상근자가 아스베스토 (석면) 유니온을 만들었어요. 아스베스토 유니온 위원장은 재일교포인데 교섭하면 기업이 교섭에 나오는 힘 있는 사람입니다.
? 일본이 과로사가 많았는데 노동시간 줄었는지 궁금합니다. 산재보험으로 하는데 어려움은 없나요?
중소영세 기업은 산재은폐가 많습니다. 대기업은 은폐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빨리 의료보험으로 가라고 하죠. 과로사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동료가 심하게 일하다가 쓰러져서 동료가 산재인정 투쟁을 하고 노조가 활성화된 사례도 있습니다.
? 예전에는 노동자 의료생협을 하는 의사들이 공산주의 운동도 하고 의식 있는 의사들이었는데 지금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의식 있는 젊은 의사들이 있는지, 전망은 밝은지 궁금합니다.
특징 있는 생협을 하면 젊은 의사들이 옵니다. 저도 언론에 나오고, 이주노동자 의료, 석면 등 특징 있는 생협에 의사가 오니까 의사모집에 어려움은 없어요. 월급은 공공의료기관 수준의 월급을 기준으로 합니다. 다른 공립 병원 의사와 같은 수준으로 하기 위해서 특별수당도 줍니다.
전망은 어떤 걸 말하는 건가요. 의사가 운동 마인드가 없는 게 아니에요. 의식 있는 의사라면 월급도 적은데 오는 게 의식 있는 의사입니다. 기초생활수준으로 월급을 받아도 산재직업병을 하겠다고 옵니다.
?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주십시오.
서울에 와서 페미니즘 언론도 만나고, 노동조합도 만나고, 서울대 강의, 한겨레 기자 등 여러분을 만났어요. 몸은 좀 피곤하지만 보람 있었어요. 서로 정보를 제공하면서 앞으로 나가면 좋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