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이다. 

바다로, 계곡으로, 누군가는 머나먼 이국으로 더위를 피해 떠나는 계절이다.

신문을 펼쳐도, 온라인 포털에 접속해도, TV를 틀어도, 온통 휴가, 여행, 보양식 이야기들이다.

때마침 런던 올림픽까지 맞아, 그야말로 대한민국이 들썩이고 있다.

교통체증, 바가지요금, ‘물 반 사람 반’의 고통마저도 추억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여름휴가란 바야흐로 전(全) 국민적인 신성한 의식이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와 노동건강연대는

이른 바 “본격적인 여름휴가철”을 맞아

우리 사회 일하는 사람들의 삶과 휴식은 어떠한지 돌아보았다.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 다같이 쉬었다 가자!

그리고 제대로 쉬어보자!

§ 노동자의 가계부…

한 달 6,000원. 어느 노동자의 가계부를 들여다 보았다.

문화비에 6,000원이 적혀 있었다. 한 달 154만원을 벌어서 주거비, 식비, 의료비, 교통비 등을 지출하고 나니 16만원이 적자였다. 

이 노동자는 6,000원으로 어떤 문화 활동을 했을까? 당신이 가난한 노동자라면 여름휴가는 애초부터 가계부항목에 없는 말일지도 모른다.

“알바생활 4년 만에 받은 첫 여름 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지금, 라디오에서 들려온 하소연이다.

바라고 원하던 며칠간의 휴가였을 것이다. 휴일이나 휴가 사용에 작은 권력이라도 써 볼 기회가 없던 노동자에게 시간의 주인이 되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한 달에 문화비 6,000원을 쓴 노동자는 일반 가구에 비해 교통비도 적게 썼다. 여행을 간 적이 없고, 갈 수 있는 시간도 없어서 교통비가 별로 안 들었다고 설명했다. 

돈이 먼저일까, 시간이 먼저일까?

6,000원은 2011년 민주노총이 저임금노동자 14명의 가계부 기록 결과를 발표했을 때 나온 14명 노동자의 문화비 평균지출액이다. 이 자료는 최저임금 제도의 비현실성을 보여주기 위해 조사한 것이었다.1) 저임금노동자에게는 여가를 위한 돈이 매우 부족하거나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휴식, 여가를 위한 시간, 시간 사용에 대한 자율성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아마도 이런 저임금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길 것이고, 휴일이나 휴가는 거의 쓰지 못할 것이며, 일터에서 휴일/휴가가 제도적으로 보장된 경우도 드물 것이다.

ILO의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전체 노동자의 1/4에 달한다.2) 많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도 월등하다. 이들은 아마도 여름휴가를 떠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림 1).

1.jpg

그림 1) 저임금 노동자 비율 (출처: ILO 2010)

“휴가지는 강원도, 비용은 00만원, 날짜는 7월말~8월초”.

해마다 연도만 살짝 바꿔 내보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똑같았던 TV 뉴스, 신문기사조차  전체 노동자의 4분의 1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라는 셈이다. 정부조사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월 소득 100만원 미만인 가구의 3분의 2, 100~200만원 사이 가구의 절반이 휴가를 써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림 2).3) 

2.jpg

그림 2) 지난 1년 간 휴가를 보냈는지의 여부 (출처: 문화관광체육부 2010)

§ 쉴 시간, 놀 시간이 없다…

지난해 5인 이상 사업장에서 일하는 제조업 노동자들은 연 평균 2,287시간을 일했다. 숙박/음식업에서 일하는 이들은 2,234시간, 부동산/임대업에서 일하는 이들의 근로 시간도 연 2,330 시간에 달했다. 전체 노동자의 평균은 2,116시간이었다.4) 이것조차 5인 이상 사업장만을 대상으로 한 통계이기에, 한두 명이 일하는 영세사업장까지 포함한다면 근로시간은 더 늘어날 것이다. 한국의 장시간 노동은 OECD 국가들 중에서도 압도적이다 (그림 3). 고용노동부는 2012년까지 실 노동시간을 2천 시간 아래로 낮추겠다고 했었는데, 어떻게 할지 궁금할 따름이다.

3.jpg

그림 3) OECD 국가들의 연간 노동시간 (출처: OECD Stat.Extracts)

1년 전 “밤에는 자자”고 외치며 심야노동 철폐와 주간 2교대제 실현을 위해 싸웠던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이 여름을 나고 있다. 부분파업, 직장폐쇄, 해고, 법원의 부당해고 판결, 회사의 버티기… 우리 사회에 야간노동 문제를 환기시키며 큰 호응을 얻었던 이들은 익숙하고도 강경한 노동탄압 매뉴얼 앞에 좌절하고 있다 (그림 4).

유성기업의 원청사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 또한 심야노동 철폐와 주간 2교대제 도입을 두고 노?사가 엎치락뒤치락 중이다. 

4.jpg

그림 4) 지난 6월 28일, 유성기업 서울사무소 앞에서 집회 중인

금속노조 조합원들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2012.06.29)


§ 교수는 되고, 노동자는 안 되는 것…

한숨 돌리고 다시 휴가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어쨌든 많은 노동자들, 이른바 ‘직장인들’은 여름휴가를 ‘갈’ 것이다. 일단 집을 떠나 어디로든 ‘가’는 행위, 도시를 ‘탈출’하는 것 자체가 한국 사회 여름휴가의 거룩한 계율이다. 집에서 빈둥거리면서 허투루 보내기엔 너무도 아까운 시간인 것이다. 

인터넷의 숙박시설 예약 사이트를 다녀 보시라. 2012년 7월 28일 토요일부터 8월 3일 금요일까지 전국의 콘도, 펜션, 민박 중에 ‘예약 완료’ 표시가 되어있지 않은 곳이 있다면, 그곳은 분명 무언가 문제가 있는 곳일 게다. 조금씩 분산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7월 마지막 주 아니면 8월 첫째 주에 휴가를 떠나는 이들이 전 시민의 50%를 넘는다고 한다. 경총의 조사에서도 중소기업은 94.4%, 대기업은 87.8%가 여름휴가제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5) 수백만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동시에 휴가를 떠나는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휴가철인 7월 말부터 8월초는 예년보다 무덥고 비는 적을 것이라는 날씨 예보도 진작에 나와 있다.


사람마다 취향과 개성이 다른 법인데, 왜 이렇게 같은 시기에, 마치 생산량 할당을 채우기라도 하듯, 모두 엇비슷한 방식으로 휴가를 보내는 것일까?

사실, 연중 자유롭게 시기를 정할 수 있고 기간도 충분하다면 굳이 이렇게 집중적이고 경쟁적인 휴가 의식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나?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기업들이 이 때로 휴가를 한정해두고 있기 때문이다. 연중으로 휴가를 골고루 쓰게 하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관리와 비용 측면에서 효율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달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구분하기 어려우나, 학원과 보육시설의 방학이 이때라는 점도 중요하다. 아이들이 있는 가정은 좋든 싫든 이 일정에 맞춰 휴가를 잡아야 한다. 맞벌이 가구라면, 자칫 아동방임의 위기가 올 수도 있는 ‘긴급 상황’이다. 몇몇 중요한 사회적 ‘갑’들이 이 시기를 일단 휴가로 정하고 나면 나머지 ‘을’들은 따라갈 수밖에 없다. 교통 전쟁, 예약 대란, 바가지 전쟁을 치를 걸 알면서도 범국민적 휴가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법적으로 연차휴가가 보장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나마 사나흘의 기간이 용인되는 여름휴가와 달리 연차 휴가를 며칠씩 붙여 쓰는 것은 영 눈치가 보인다. 설령 누가 뭐라 하지 않더라도, 일거리가 많은 상황에서 나의 장기 휴가는 곧 다른 동료의 고통이니 차마 그리 못한다. 그래서 히말라야 트래킹이나 오지 탐험 같은 장기 해외 여행을 하는 한국인들은 학생이나 프리랜서,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죄다 ‘사표를 던지고 훌쩍 떠난’ 직장인들이다. 한국 노동자들에게 열흘의 여행이란 돈 말고, 사표도 필요한 대모험이다. 그런 곳에서 만난 유럽의 여행자들이 한 달 휴가 운운하면 슬퍼진다. ‘우린 사표 던지고 왔단 말이야…’   

또 본인이 해야 할 일 자체가 많아서 며칠 씩 자리를 비울 수도 없고, 또 그렇게 다녀오면 밀린 일을 감당할 수가 없기에 지레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한 취업사이트가 직장인 1,300여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58.7%의 노동자가 ‘휴가 중 일 때문에 출근하거나 휴가지에서 회사 일을 한 적이 있’고 52.4%는 ‘내가 없으면 회사가 곤란할 것이라는 생각에 휴가를 잘 사용하지 못’한다고 답했다.6)

휴가를 자유롭게, 제대로 사용하려면 우선 평소의 업무량 자체가 줄어야 한다. 사채 이자도 아닌데, 며칠만 휴가를 다녀와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이 쌓여 있다면, 혹은 동료에게 그 부담이 온전히 전가된다면 그게 무슨 휴가인가?

한국의 장시간 노동은 이미 악명 높은 만큼 근로시간을 줄이고, 적정 노동시간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생활임금을 보장하는 것 – 상투적인 이야기이지만, 이것이 해결책이다. 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지 않고, 휴가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두루미를 초대해서 접시에 음식을 대접하는 여우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또 중요한 것은 노동자에게 쉴 권리, 휴식의 권리가 있음을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대학의 교수들에게는 안식년 혹은 연구년 제도라는 것이 있다.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수 년을 근무하면, 1년의 유급 휴가가 주어지곤 한다. 이는 평소의 강의와 행정업무에서 벗어나 재충전의 기회로 활용된다. 연구와 집필활동에 매진하는 이들도 있고, 해외 기관에서 연수를 하는 이들도 많다. 물론 ‘공부는 뒷전이고 골프에 빠졌다더라’, ‘연구가 아니라 아이들 영어연수가 목적이라더라’ 는 식의 뒷담화도 종종 들려오지만, 이것이 윤리적인가의 논쟁은 일단 여기에서 뒤로 미뤄둔다. 생계 걱정에 노심초사하지 않으면서 휴식과 재충전, 혹은 자신이 원하는 활동에의 몰입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어쨌든 바람직한 것 아닌가?

굳이 안식년까지는 아니더라도, 몇 년에 한번이라도 유급 안식월이 노동자들, 일반 직장인들에게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표를 던지지 않고도 장기 여행을 떠나고, 귀농 준비도 해보고, 하고 싶었던 공부도 해보고, 혹은 가족들을 위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심지어 빈둥거리며 게으름도 피워보고….

이것이 혀를 끌끌 찰 만한 노동윤리 실종사건이 아니라, 모든 일하는 사람들이 가슴 설레며 기다릴 수 있는 그 무엇이라면 좋겠다.

혹시나 안식년이나 안식월을 도입한 일터들이 있을까 싶어 구글을 뒤지는데, 밭을 7년간 경작하면 1년은 쉬게 해주어야 한다는 성경구절에서 안식년이 유래했다는 자랑 뒤에 영혼을 살찌우라는 기도문들 뿐이다. 밭도 쉬게 해주어야 한다는데, 사람은 쉬게 해 주면 안 되나? 

우리 다같이 쉬었다 가자!


그리고 제대로 쉬어보자!



images.jpg

(끝)

* 휴가와 관련된 노동과 건강 기획 기사 

1. 경쟁력의 언어에 휩쌓인 휴가    http://laborhealth.or.kr/32114

2. 더 많은 휴가가 필요하다          http://laborhealth.or.kr/32138

3. 7일의 휴가에 감추어진 진실      http://laborhealth.or.kr/32156


1) 민주노총. 저임금 노동자 가계부 분석 2011.4.12.

2) ILO. Global Wage Report 2010/11: Wage policies in times of crisis. Geneva, International Labour Office, 2010


3) 문화관광체육부. 2010 국민여가활동조사 2010.11


4) KOSIS – 사업체노동력 조사결과


5) 매일경제 2012.07.15


6) 위키트리 2012.07.10 (http://www.wikitree.co.kr/main/ann_ring.php?id=75598&alid=101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