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누기
4·11 총선이 막을 내렸다. 새누리당 152석, 민주통합당 127석, 통합진보당 13석. 당초 여소야대가 예상됐지만 결과는 여당의 과반의석 확보다. 여당의 압승과 야당의 참패다.
이는 18대 국회와 달라진 게 없는 지형이다. 18대 총선 당시 옛 한나라당은 153석을 얻었고 뒤늦게 미래희망연대(옛 친박연대)의 합류로 현재 162석이다. 지난 4년이 어땠던가. 거대 여당은 시도 때도 없이 힘의 우위로 법안과 예산을 강행처리(날치기) 해왔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나오는 이유다. 물론 이번엔 야권연대 세력인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을 합치면 140석으로 현재 87석(민주통합당 80석+통합진보당 7석)에 비해선 약진했지만 제1당 새누리당이 버티고 있는 국회 지형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난처한 처지에 빠진 양대노총
이로 인해 노동계도 난처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양대노총 모두 총선 승리를 통해 노조법 개정 등 주요 노동현안 해결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노총은 민주통합당을 세우는 데 직접 발을 담갔고 민주노총은 정치방침 논란 속에서 통합진보당을 지지했다.
하지만 여대야소라는 결과는 이 같은 정치방침을 채택했던 양대노총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당장 노조법 개정 투쟁에 차질이 빚어지게 됐고 정치방침을 두고 조직적 분란이 커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진보정치 또한 길을 잃고 말았다.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호언했던 통합진보당은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19대 총선 정당지지율도 지난 17대 총선의 옛 민주노동당의 13.1%에 훨씬 못 미치는 10.3%에 그치고 있다. 진보신당은 정당지지율(1.13%)이 2%에 미치지 못하면서 정당등록 취소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무엇보다 여당의 압승은 유력한 대선주자 박근혜 대세론에 힘을 보탰고 야권의 대선 가도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노동계에는 더 암울한 전망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노동계와 진보정치는 총선 이후의 위기를 어떻게 헤쳐가고 대선을 돌파하느냐가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총선 왜 실패했나
야권이 이번 총선에서 왜 실패했는지를 큰 틀에서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번 총선 결과는 예상치 못한 만큼 모두를 충격에 빠뜨리고 있다.
일차적 책임은 민주통합당에게 돌아가고 있다. 사실 국민은 정권심판과 야권승리를 위한 준비가 돼 있었다. 국민경선을 통해 한명숙 대표 등 민주통합당 지도부를 뽑아줬고 6주 연속 여당을 앞지르는 높은 지지율로 기대를 보였다. 하지만 정작 민주통합당은 오만하고 무능력했다. 친노니 비친노니 하며 계파갈등 속에서 공천파동, 말바꾸기 논란, 막말사태가 잇따라 발생했지만 이를 정리해낼 리더십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한미FTA, 제주해군기지 말바꾸기 논란에서 보여지 듯 지난 노무현 정권을 넘어서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시켰다.
또한 혁신과 개혁의 실종이었다. 국민의 요구는 경제민주화, 보편복지, 노동존중 등 혁신과 개혁이었다. 하지만 이번 총선은 정책선거가 되지 못했다. 결국 총선결과에 책임을 지고 한명숙 대표가 퇴진했지만 민주통합당은 아직도 계파갈등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통합진보당도 총선실패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관악을 사태는 진보정치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민주주의 기본에 대한 둔감성이 지적되고 있다. 노동중심성 상실도 꼽히고 있다. 노동·진보진영을 아우르지 못하면서 진보정치 1번지 창원·울산서 패배했다.
한국노총 정치방침 실험 위기
한국노총은 2012년 새로운 정치방침을 채택했다. 그간 한국노총의 정치방침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전통적 친여성향의 한국노총은 97년 대선서 김대중 후보 지지선언 했고 2004년 녹색사민당이란 독자정당 건설 실험을 했으나 실패했다. 2007년 이명박 후보와의 정책연대를 통해 여당지지로 선회했다. 그러나 한국노총은 지난해 여당과의 정책연대를 파기하고 그해 말 민주통합당 창당에 조직적으로 결합을 했다. 이용득 위원장은 당연직 최고위원으로 지도부의 일원이 됐다. 이 같은 정치방침은 여태껏 해보지 않은 또 다른 새로운 실험이었다.
그러나 총선 성적이 한국노총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한국노총 출신 비례대표 당선자 2명 이외엔 지역구 당선자 3명은 한국노총의 조직적 힘으로 당선시켰다고 말하기 곤란하다.
또 야권의 총선 참패는 한국노총이 기대했던 타임오프-창구단일화 폐지를 골자로 한 노조법 개정에 빨간불이 들어오게 했다. 이로 인해 조직적 어려움도 예상된다. 새누리당은 현 한국노총 집행부의 반대파 대표 격인 최봉홍 항운노련 위원장을 비례대표로 당선시켰다. 자칫 대선을 앞두고 외부 정치권으로 인한 조직분열 구도가 고착화될 수 있다는 우려다. 이는 상대적으로 한국노총이 민주통합당 내에서 입지가 축소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민주노총 후보 국회 입성 실패
전통적으로 옛 민주노동당 배타적 지지방침을 고수해왔던 민주노총은 지난 2008년 분당사태 이후 기존 정치방침의 유명무실화 위기에 놓여있었다. 이 같은 정치방침의 위기는 이번 총선에서 절정을 보여줬다. 민주노총은 통합진보당(옛 민주노동당·국민참여당·통합연대)의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통해 노조법 개정 등 주요 노동현안을 관철하겠다는 정치방침을 채택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통합진보당 지지에 반대하는 이른바 좌파블록은 이 같은 정치방침 채택에 반발했고 이는 창원과 울산의 선거결과에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결과적으로 통합진보당은 역대 가장 많은 의석수인 13석(지역구 7석+비례 6석)을 확보했지만 처음 호언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는 실패했다. 수도권에서는 새롭게 지역구 의석을 확보했지만 정작 노동자 밀집지역인 창원과 울산에서 의석을 잃었다.
민주노총은 또한 민주노총 출신 후보를 입성시키는 데도 실패했다는 한계를 보였다. 노회찬·심상정·김선동(재선) 당선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더 이상 민주노총 출신이라고 보긴 어렵다. 순전히 민주노총의 조직적 힘으로 당선시킨 이가 없는데다 민주노총 출신 비례대표 후보들도 모두 후순위로 밀리면서 통합진보당 내에서 민주노총의 지위를 상실케 했다는 평가다.
노동 없는 통합진보당의 한계
민주노총의 위기는 ‘노동 없는 통합진보당’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18대 총선에선 옛 민주노동당은 최소한 비정규직 청소노동자 출신 홍희덕 의원을 비례후보(일반명부 1번)로 전략 배치함으로써 노동자 후보를 배출한 바 있다. 또 현 통합진보당은 창원과 울산서도 의석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19대 총선서 통합진보당에선 정진후 전 전교조 위원장이 비례대표(비례 4번)로 당선됐으나 노동자 후보라는 상징성에선 미흡하다는 평가다. 이외의 민주노총 출신인 통합진보당 비례후보 이영희(비례 8번)·나순자(비례 11번)·윤갑인재(비례 20번) 후보는 모두 국회 입성에 실패했다.
반면 통합진보당에선 이른바 당권파라고 불리는 한 정파의 후보들이 지역구와 비례대표에서 대거 당선되면서 논란을 낳고 있다. 이들은 전체 당선자의 절반을 넘는다. 앞으로 당내 역학구도에서 자칫 당권파의 패권주의가 더 강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창원과 울산에서의 패배는 통합진보당을 더 노동중심성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더구나 창원과 울산의 패배가 노동·진보진영의 분열에서 기인한 만큼 이를 극복할 대책이 시급해 보인다.
옛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남았던 진보신당은 결국 정당지지율 1.13%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사회당과의 통합으로 좌파정당으로 거듭나려는 노력도 헛수고가 됐다. 이젠 당의 해산만이 남았다. 진보정당의 한 축이 이렇게 무너져버렸다.
노동·진보진영 아우르는 진보정치 절실
현재로선 야권의 총선 이후 대선 전망은 밝지 않다. 박근혜 대세론은 총선 이후 더욱 탄력을 받고 있다. 반면 야권은 박근혜에 대항할 뚜렷한 후보군이 안 보인다. 또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모두 새 지도부 선출이란 과정을 남겨두고 있다. 두 당 모두 계파 또는 정파 갈등이 존재하고 있는 상태이기에 이를 극복하고 진정한 리더십을 세울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노동계와 진보정치, 나아가 야권이 총선실패를 극복하고 대선승리를 위한 과제는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야권은 이번 총선에서 더 이상 형식적·기계적 야권연대만으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야권연대는 필수불가결 하지만 그 내용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절실한 시점이다. 특히 이번 총선실패의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된 정책실종은 앞으로 대선국면서 상기해야 할 점으로 꼽힌다. 경제민주화·보편복지·노동중심 등의 관철은 새누리당과의 차별성을 보이고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중요 대목으로 보인다.
진보정당의 재편 문제도 남은 과제다. 진보신당의 해산을 막을 수는 없지만 진보신당을 지지했던 세력은 여전히 남아있다. 민주노총 조합원의 3분의 1이 좌파블록으로 꼽힌다. 또한 통합진보당 내에도 지난 통합에 대한 불만과 불신의 목소리도 상당수 남아있는 상태다.
무엇보다 진보정당의 통합 또는 연대를 이루지 못하면 창원과 울산서 확인했듯이 노동자 밀집지역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로 인한 민주노총의 위기도 더욱 심화될 수 있다.
위기는 기회다, 실패를 약으로 삼겠다는 말을 흔히들 한다. 하지만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고 했던가. 노동계와 진보진영은 어느 때보다 분열을 극복하고 노동·진보진영을 아우르는 제대로 된 진보정치를 세워야만 대선승리도 엿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