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노동자건강권운동, 전망은 어디에

산별노조와 지역활동으로 새로운 운동을

이상윤 / 노동건강연대 정책국장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노동조합 조직률이 하락함에 따라 전체 노동자 건강권 운동에서 노동조합이 가지는 역할에 대해 비관적이거나 비판적인 시선이 늘고 있는 듯하다. 어차피 현재 노동조합은 조직된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을 펼 수밖에 없고, 조직노동자들 대부분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인 현실에서 노동조합의 노동자 건강권 운동도 그 범위와 역할이 한정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이다.

문제 제기는 나름 현실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노동조합이 기업별 노동조합 체계를 근간으로 하던 시기에는 당연히 노조운동의 한계라는 측면이 있었고, 최근 산별노조로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한계를 벗어나려 노력했지만, 아직까지 그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10년 사이 ‘노동운동의 위기’가 거론될 정도로 민주노조 운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기에 노조운동에 대한 비관적 ? 비판적 시각은 더욱 현실적 힘을 얻는 것 같다.

하지만 이는 힘들더라도 인내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타개해야 할 성질의 것이지 노동조합의 노동자 건강권 운동은 안 된다고 포기하고 다른 방안을 모색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노동자 건강권 운동은 전문가나 사회운동 단체 활동가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집단으로 모여 투쟁하지 않으면 자본의 거대한 힘에 대응하여 싸움조차 할 수 없다. 노동자 개인이 혹은 의식적인 전문가나 사회운동 단체 활동가들이 특정 국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계기를 만드는 것은 역시 노동조합이고, 노동조합이 운동을 이끌어 가지 못한다면 시작된 운동도 용두사미가 될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노동자 건강을 위한 제도와 시스템은 오직 노동자들의 집단적 투쟁과 참여에 의해서만 발전해 왔다. 노동자 건강을 위한 제도 및 노동자의 건강 수준은 노동운동의 역사적 역량의 반영이다. 각 나라의 노동안전보건 시스템을 비교론적 시각에서 연구한 연구 결과를 보면 노동조합 조직률과 노동자 정당의 역량을 종합한 변수와 그 나라의 노동자 건강 수준은 정확히 비례하였다.

노동조합이 바로 서고 노동조합 역량이 강화되며 노동조합 조직률이 높아져야 노동자 건강도 보장된다. 다른 방안은 없다. 현재 노조의 노동자 건강권 운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를 바꿔서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 글은 이를 위해 노동조합에게 던지는 고언의 성격이 짙다.

기업별 노조 아래서의 노동조합 노동안전보건 활동은 담당 간부들이 자신을 ‘자판기 간부’라고 표현할 정도로 특정 사안에 매몰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간 대부분의 노동안전보건 담당 간부들이 하는 일은 건강 검진, 작업환경 측정시 기관 선정에 관여하거나, 산재 환자들의 민원을 해결해 주는 것이었다. 이런 정도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인식되어 있었기에 노동조합에 노동안전보건을 전담하는 간부가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러한 활동 내용 및 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문제 제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조합원들과 함께 하는 현장 활동’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민이 더욱 확장되고 심화될 필요가 있다. ‘제대로 된’ 노동조합이 되기 위해서는 노동안전보건 활동도 바뀔 필요가 있다.

첫째, 산업별 노조 중앙의 정책 기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현장의 역동성을 극대화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간 기업별 노조 연맹의 중앙 조직은 단위 노동조합의 단체협약시 노동안전보건 관련 협약 내용을 지원하는 수준의 정책 활동을 해 왔다. 산업별 노동안전보건 정책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고 정부와 자본이 파상적으로 밀어붙이는 공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더 이상 이와 같은 상황이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산업별 노동안전보건 정책을 생산해내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투쟁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노조 중앙이 마련해야 한다. 산업별 노조 중앙에 노동안전보건 정책을 담당하는 상근 역량을 집중 배치하고 그를 매개로 다양한 전문가 그룹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산업별 노동안전보건 정책을 생산하고, 자본의 공세에 대응하는 틀을 구축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인력과 재정이 문제라면 지역본부와 지회에는 노동안전보건을 전담하는 상근 인력을 두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본다. 실제로 현재 기업별 노조의 전담 상근 활동가들이 하고 있는 업무는 다른 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여지가 없지 않다. 지회와 지역본부에 분산되어 있는 인력과 재정을 모아 중앙의 정책 역량을 강화할 수 있도록 우선순위를 삼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산업별로 다양해지고 증가하고 있는 노동안전보건 사안들을 제대로 감당하기 힘들다.

재정과 인력을 중앙으로 집중시키자고 하면, 현장이 비어버릴 수 있는데 어쩔 것이냐는 물음이 당장 제기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이와 같은 구조만을 만들어 놓고 현장의 역동성을 강화할 구조적 대안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중앙 조직의 관료화만을 부추기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이러한 부작용을 예방하기 위하여 현장의 투쟁력을 보존하고 확대할 방안이 같이 고민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제안해 온 것은 ‘노동안전보건 대표제’의 도입이다. 노동안전보건 대표제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제도이다. 노동안전보건 대표는 단위 사업장 혹은 지역 수준에서 노동자 20명 혹은 50명당 한 명꼴로 해당 노동자의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이들이 하는 일은 현장 순회, 현장 점검, 현장 의견 수렴, 개선안 마련 등이다. 이들은 이러한 활동을 위하여 법적으로 유급 활동 시간을 보장받고, 노동안전보건 지식과 활동 능력을 갖추기 위한 교육 시간 역시 유급으로 보장받는다.

유럽에서 시행하는 ‘노동안전보건 대표’는 형식적으로는 노동조합의 간부 혹은 활동가가 아니지만, 내용적으로 노동조합과 긴밀히 소통하고 연계하여 활동을 벌이게 된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제도를 원용하여, 일부 대기업에서는 근골격계 질환 예방을 위하여 사업장별로 ‘실행위원’ 혹은 ‘추진위원’이란 명칭으로 노동안전보건 대표를 두고 현장 활동을 벌여본 바 있다. ‘명예 산업안전보건 감독관’ 제도를 활용하여 이러한 역할을 강화하려는 시도도 지속되고 있다.

산업별 노조 중앙은 정책 기능 수행과 더불어 지역과 지회 차원에서 이러한 노동안전보건 대표를 교육하고, 이들이 지역과 지회에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기반 조성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활동이 법적 ? 제도적 근거를 가지고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동안전보건 대표제 도입 투쟁을 벌여야 한다.

 

둘째, 노동조합의 투쟁 의제 측면에서 산업별 노조의 노동안전보건 운동은 노동조합이 없는 노동자에 대한 투쟁 의제를 중심으로 지역 차원의 의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존 기업별 노조 연맹의 투쟁 의제는 인력과 재정이 뒷받침되고 발언권이 큰 일부 대기업 노조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산업 차원에서 그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적지 않은데도, 돈과 사람을 움직이는 노조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정규직, 이주, 여성, 영세사업장 노동자에 대한 노동안전보건 운동이 이루어지기 힘들고, 임금이나 노동 조건뿐 아니라 노동안전보건의 측면에서도 이들은 불평등한 조건에 방치되어 왔다.

산업별 노조는 환경과 건강이 취약한 노동 계층을 지원하고 이들이 투쟁에 나설 수 있는  의제를 가지고 노동안전보건 운동을 전개해 나갈 필요가 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전노협에 이르는 시기까지 노동안전보건 사안으로 폭발적이고 비타협적인 투쟁이 전개되었던 것을 돌아본다면 현재에도 이러한 투쟁을 만들어 나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미조직 노동자들의 상태와 조건이 그 당시 노동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 차원에서 공동 대응을 기획할 수 있는 투쟁 의제를 개발하고 집중해야 한다. 산업별 노조 투쟁의 진원지는 단위 기업의 담장 안이 아니고 지역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노동안전보건 운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간 의제가 단위 기업 담장 안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발상을 전환하여 기업이름에 관계없이 지역의 산업별 노조 조합원이 모두 같이 관심을 가질 만한 투쟁 의제를 발굴해야 한다. 지역 차원에서 공동으로 일/휴식 시간의 적정 균형을 요구한다든지, 지역 차원에서 유해 물질의 공장 안과 밖의 노출 수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투쟁은 지역의 노동자뿐 아니라 주민과 함께하는 정치적인 운동의 매개가 될 수도 있다.

한국의 노동조합은 아직은 기업별 노조에서 산별 노조로 가는 과도기이다. 과도기에는 진통과 더불어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노동조합의 노동안전보건 운동가들은 기업이라는 담장 안에 속박되어 있던 상상력을 해방시켜 전체 산업, 지역 차원에서 투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의제 발굴과 구조 만들기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실질적인 산업별 노동조합과 지역의제 개발 활동을 통해 노동운동이 살아날 때 노동자의 건강도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