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니 고향이 중심이야, 변방은 없어”

– 김이찬 감독


전수경 / 노동건강연대 상근활동가

 숨이 멎을 것 같은 폭염이 조금은 수그러든 8월 중순의 안산역. 평일 한 낮 인데도 이주노동자로 보이는 외국인들이 제법 많다. 역지하도에는 노점들이 유달리 많고, 상가마다 서너개 나라 언어가 기본으로 붙어있다. 안산역 맞은 편 ‘국경없는 마을‘ 에 도착하기 전이지만 안산역 자체가 국경없는 마을의 정거장이었다.

‘국경없는 마을’에서 김이찬 감독을 만나 쌀국수집으로 간다. 한국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가끔 사먹던 쌀국수와는 다르다. 베트남 사람이 만들어 준 베트남 쌀국수다. 오리지날 쌀국수와 비빔쌀국수, 볶음밥까지 베트남식으로 배불리 먹었다. 맞은 편 파키스탄 찾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짜이와 라씨를 주문했다. 베트남식 식사에 파키스탄식 디저트. 


으로 가는 길. ‘국경없는 마을’의 끄트머리에 2층짜리 다세대 건물에 이 있다. 좁은 마당을 가로지르는데 작은 방들이 여러 개 보인다. 1층은 한국인 주민들이 산다. 2층 계단을 돌아 올라가니 제법 큰 집이다. 넓은 마루 한 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사람, 쇼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두 남자, 안쪽 방에 누워 낮잠에 빠져있는 사람… 이주노동자다. 모두.    

주방에는 설거지된 그릇이 한 소쿠리 쌓여있고, 화구 두 개짜리 구형 가스레인지가 있다. 냉장고 옆에 쌀포대가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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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주노동자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_ 이주노동자에 대한 관심은 10여년 전 버마민주화 운동에 대한 다큐를 찍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버마 민주화 운동을 하는 이들은 월급의 1/3을 내놓으면서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깊은 인상을 받았죠. 2000년에 베트남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베트남전의 상처를 접하면서 국경의 안과 밖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긴 것 같아요.

2007년 안산에 정부가 지원하는 이주노동자센터가 만들어졌어요. 센터 안에 미디어팀을 만들어서 영상교육을 하면서 안산에서 이주노동자들과 미디어활동을 시작하게 됐어요,

활동비도 없이 일했지만 2008년에 이주노동자들과 30여편의 영상을 만들기도 했어요. 대통령이 바뀌면서 센터에서 이주노동자에게 왜 카메라교육이 필요하냐, 나가달라 고 하더군요.결국 압력으로 센터를 나오게 됐는데 이 때 ‘지구인의 정류장’이라는 연작 다큐를 구상하고 있었어요. 결국 ‘이 별에서 살다’ 라는 다큐 한편을 찍고 연작은 중단되었죠.

흠 다큐제목이 단체이름이 된 건가요, 이주노동자에게 카메라가 왜 필요한가 라는 압력으로  활동도 중단되었다니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군요.

_ ‘지구인의 정류장’이라는 다큐를 구상할 때는 문화, 습성, 사고방식 등 노동자정체성을 담는 걸 생각했어요. 이주노동자 쉼터를 관찰하면서 구상한 것인데요. 요새 다문화를 많이들 말하는데 다문화는 한국인과 결혼한 이주민과 그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고요, 한국문화를 강요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죠. 우리가 평소에 한복을 입나요? 태권도 공연하면 다문화인가요. ‘오늘 여기 현재의 삶’이 없는 다문화는 국가정체성을 주입하는 이미테이션 장사죠.

저는 2009년 안산역 앞 다른 단체 사무실에 방 한칸을 얻어 다시 다큐작업을 시작했어요. 센터에서 나가라고 할 때는 장비를 갖고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장롱에 있던 옛날카메라까지 모아서 작업을 했죠.

아 듣기만 해도 그 열악한 상황이 짐작이 됩니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다큐를 계속 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_ 이주노동자에 대한 다큐라기보다 이주노동자에게 미디어교육을 제공하고 그들이 직접 자기표현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은 거죠. 당사자의 자기표현이 중요하니까요. 그 과정에서 정체성도 생기는 것이고요.

그 때부터 안산에 계속 있어야겠다, 왜 있고 싶은가? 할 얘기를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외부자의 시선으로는,  ‘하더라’ 는 이야기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죠. 이주노동자들이 일만 하는 임금노동자가 아니라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말 할 수 있는 의미있는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생각, 다른 기획을 할 수 있는.

그런데 어쩌다가 이주노동자들이 모여 숙식을 할 수 있는 공동체까지 오게 된 것인가요?

_ 처음부터 생활공간을 생각한 것도 아니었고, 쉼터를 유지한다는 게 날마다 새로운 경험이고 날마다 처음 일어나는 일들인 상황인데요, 그 전까지는 다큐를 어떻게 할까 구상하고 있던 상태였어요. 이주노동자들과 문화컨텐츠 교육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제일 많이 만나게 되는 캄보디아 노동자들과, 한국 사람들에게 교육도 하고 국가정체성으로가 아니라 정말 다양한 문화를 교류할 수 있는 교육을 만들어야 겠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더 절박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거리를 두고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는 여유가 없어지고 대학교 때 보던 노동법 책을 20년만에 다시 펴보게 되었네요. 제가 법학과를 나왔거든요(웃음).

그러니까 은 애초에 미디어교육과 영상작품을 이주노동자가 주도하여 창작하는 공동체를 꿈꾸었으나 현재의 모습은 찾아오는 이주노동자들에게 닥친 문제들을 해결하는 단체처럼 되고 있다는 말씀 아닌가. 임금체불, 폭행, 성희롱, 산재, 등록노동자와 미등록 노동자의 처지에 따라서 다른 도움요청들. 이런 문제들에 파묻혀 지내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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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나 정부지원을 받는 단체들은 왜 이주노동자가 카메라 잡는 것을 싫어할까요.

_ 이주노동자가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죠. ‘한국에 일하러 왔는데 왜 돈 안 벌어?’ 이렇게 말하죠.

어떤 사장이 말하길 자기 공장에 베트남 여성노동자가 숙소에 남자친구를 자주 데려와서 노는데 풍기문란이라면서 ‘짤라야겠다’ 고 하더라고요. 제가 베트남 여성노동자가 주말에, 일 끝난 시간에 남자친구 데려오는 게 뭐가 문제냐, 다른 노동자들도 그러지 않냐 물었더니 ‘자주 와’ 이래요. 사장이 계속 베트남 여성노동자에게 남자친구 데려오지 말라고 협박하길래 제가 근로감독관에게 전화했더니 “사장이 때린 것도 아니고 어디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뭘 그러냐” 이럽니다. 

이주노동자가 많이 찾아올수록 저도 노동부와 말싸움할 일이 늘어나죠.  으로 도망온 노동자가 있는데 사장은 노동부에 ‘걔가 자해하고 도망갔다’ 이럽니다. 

 

카메라를 잡아본 이주노동자들은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_ 미디어는 일차적 수요는 아니에요. 보통 사람들은 ‘내가 카메라에 잘 찍히나 예쁘게 나오나’ 관심을 갖긴 하지만 카메라 앞에서 사회적 발언의 주체로 자기 표현하는 경험을 하기는 어렵죠. 이게 중요한데요. 프레임의 문제인데요, 내 문제를 내가 표현하면 누구라도 함부로 하지 않죠. 인권개선에 도움이 돼요. 

저희 공간에 오는 노동자들 중에도 자기 얘기를 야무지게 표현하는 노동자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카메라로 자기 숙소를 찍어와서는 ‘여기가 돼지 키우는 데냐’ 멘트도 하고요.

저 역시 이주노동자를 그저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온 사람들, 돈 많이 벌어서 돌아가야 할 사람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네요. 자기 발언권 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_ 여기서 처음에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오기 시작하니까 알음알음으로 계속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모이고 있어요. 캄보디아에는 최저임금제가 없어서 한국에 와서도 근로기준법 개념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일이 힘들기는 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거죠. 충분히 항변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럴 때 통신의 권리가 중요해요. 통신을 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 하죠. 통신, SNS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해요. 얼마 전에 김포 쪽에서 일하던 베트남노동자가 말라리아에 걸려서 사망했어요. 발병하고 나서 일주일 정도 있다가 병원에 간 모양이에요. 미열이 나기 시작할 때 바로 병원에 가 봤어야 하는데 정보가 없었죠.

전북 익산에서 22만원 주고 택시타고 찾아온 여성노동자가 있어요. ‘안산역에 있어요’ 라는 말만 듣고 찾아온 거예요. 도움 받을 곳이 없어서. 양계장에 취업한 여성노동자인데 돈을 덜 받았어요. 한 달에 90만원 받고 매일 열 시간도 넘게 일을 했어요.

요새는 농촌에 취업한 이주노동자들에게 큰 사건이 많이 일어나요. 도시, 공장지역보다 감시감독이 거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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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원단체가 안 되려고, 센터가 안 되려고 애쓰고 있어요. 센터가 얼마나 많아요? 만원 받고 서류 한 장 써주는 센터가 안산에 넘쳐나요. 인력소개소도 간판에는 ‘센터’라고 붙여놔요. 센터, 중심이라는 소리인데 왜 여기가 센터냐, 이주노동자들에게 제가 그래요. ‘니 고향이 중심이야’ 변방과 중심이라는 이분법을 거부하고 싶어요.

도와주는 자와 받는 자의 지위를 거부하고 다른 관계를 만들어야죠. ‘너의 문제를 도와줄 사람은 너 뿐이야 네가 스스로 도와줄 방법을 모르면 누가 하냐’ 제가 자주 하는 말이에요.

많은 이주노동단체들이 도와주는 자의 지위에 있는 편이지요?

_ 그래요. 이제는 많은 조직들이 컨트롤이 안 되는 상태에 왔어요. 지원 조직의 90%가 교회인데 평등, 인권 등 다른 사회적 가치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본인의 삶을 극복할 기획을 해야죠. 목사의 시선, 자선의 시선으로 상담하는 게 아니라 싸워서 이기는 경험을 만들어야 해요. 개인의 경험과 집단의 경험을 사례로 남기는 일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에요.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가요?

_ 제가 참 우아하고 교양 있는 미디어, 문화 교육을 꿈꿨는데, 문화의 이질성을 서로 알고 가르쳐주고, 문화역량이 있는 다큐후배들을 발굴하고 문제제기 하는…. 지금은 급한 사건들 상담하랴 문제 해결하랴 본래 하고 싶었던 건 당분간 보류한 상태예요. 

활동가 구하기가 어려워요. 은 하반기를 어떻게 날 것인지 오늘 밤 회의가 있는데요,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할 것인지… 상반기 단체등록이 목표였거든요. 수입을 확보해서 전체 예산의 20%는 이주노동자들이 직접 쓸 곳을 정하고 했으면 좋겠네요. 지금 은 냉장고가 고장 났고, 밥 먹는 상다리가 부러졌어요(웃음).

음 돈이 많이 필요한 일인데요?

_ 즐겁게 해야죠, 내 마음이 후회할 수도 있는데. 돈을 내면 마음도 가잖아요.  옛날 친구들 만나면 후원하라고 명함을 내밀죠. 처음에는 못했는데. 그러면 대학교 때 친구들은 ‘정부 지원이이나 제도’ 이런 얘기 하면서 말이 많아져요. 오히려 중학교 때 친구들, 시골 친구들은 ‘반갑다 얼굴 그대로구나’ 하면서 별 말없이 후원을 하더라고요.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집단이 커지고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규율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고… 정비할 게 많아지네요. 그래서인지 요새는 카메라는 못 하고 돈 모을 궁리를 하고 있네요. ‘종교를 만들어라’ 그러면 돈이 모인다고 농담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지구인의 정류장 후원을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지구인의 정류장 상임역무원 김이찬입니다.

2009년 ‘이주노동자들의 영상공부방’으로 시작한 모임이 이제 ‘노동인권상담, 긴급피난자의 임시체류, 생활일기비디오 만들기, 기획영화 제작교실, 라디오교실, 그림이 있는 한국어교실, 북새통(인근 연극단)과 함께 하는 연극교실 등으로 확장되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곳의 활동과정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은 노동현장에서의 어처구니없는 인권침해들이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이에 대해 정부당국은 소극적이고 때론 비우호적이며 지나치게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잠재력을 발견하고 사회관계에 보다 깊이 성찰할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언어의 한계가 있지만 노동자에게 효과적인 노동인권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를 느낍니다.

요즘엔 20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정류장에 머물고 있습니다. 식사도 많이 합니다. 한 달에 쌀 두가마를 소모합니다. 쌀 보내주세요.

상시적으로 노동자들은 고용지원센터, 노동부감독관, 고용주 등과 때론 협의하며 항의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지 위해 할 일을 경험 속에서 배웁니다. 가능하다면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넘어서도록 유도합니다.

매주 20여명의 이주노동자가 노동상담을 하기위해, 다른 20여명의 이주노동자가 ‘그냥 들르러’ 다른 2~5명의 노동자가 동료를 도우러, 체류하거나 방문하거나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구인의 정류장 블로그 : http://ichan.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