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희 노동건강연대 회원 / 시민건강증진연구소(health.re.kr) 상임연구원
20세기의 많은 과학소설들이 21세기를 ‘디스토피아’로 묘사했다. 힘든 노동은 모두 로봇이 대체하고 사람의 물질적 삶은 더할 나위 없이 윤택하지만, 지나친 기술발전 때문에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사회 혹은 로봇과 사람이 갈등하는 사회로 그린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 그린 것과 달리 오늘날에도 힘들고 어려운 일을 여전히 사람들이 한다. 바로 하청·비정규직·이주 노동자들이다. 지난 8월 경북 문경의 한 저수지에서 유명을 달리한 이해준씨의 사례는 상징적이다. 저수지 배수관로를 점검하던 폐회로텔레비전(CCTV) 로봇이 장애물에 가로막혔을 때, 로봇 대신 지름 1.5m의 배수관로에 들어간 사람은 19살 아르바이트 대학생이었다.
민경복 아주대 교수팀이 최근 에 발표한 논문은 이씨의 사례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일반적 현상임을 보여준다. 이 연구는 2010년에 실시된 ‘근로환경조사’ 자료를 이용했다.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1만여명의 조사 참여자 가운데 3282명의 원청노동자와 728명의 하청노동자를 대상으로 업무 관련 건강 문제, 질병으로 인한 결근의 빈도를 비교했다. 또 두 집단 사이의 건강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개인적 특성, 직업과 일자리 관련 특성들도 함께 분석했다.
그 결과 하청노동자들이 원청노동자들에 견줘 평균적으로 나이가 더 많고, 학력이나 소득 수준이 낮으며, 생산직이고, 영세사업장에 속해 있었다. 또 주 40시간 이상 일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아울러 소음이나 진동 같은 물리적 위험요인이나 각종 화학물질에도 더 노출됐다. 다른 요인들의 효과를 고려해 심층 분석한 결과 하청노동자들은 원청노동자들에 견줘 업무와 관련된 건강 문제를 더 많이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근육통·요통·두통·피로 등을 더 자주 겪었고, 특히 손상과 불안 및 우울은 원청노동자에 견줘 각각 2배와 3배 더 많았다. 그리고 건강 문제로 인한 결근 비율도 하청노동자에게서 3배 이상 높았다. 노동조합 존재 여부나 고용 불안정, 직무 만족도, 물리·화학적 요인 같은 근로 환경의 유해요인에 노출되는 비율의 차이가 이런 현상에 기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하청노동자들이 다단계 생산 구조의 최하층에 위치해 있다는 점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일터에서의 손상 경험은 하청노동자들이 더 많았지만 그 때문에 결근하는 정도는 더 낮았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하청노동자들의 ‘과소 보고’ 때문일 것이다. 원청에 알려질 것이 두려워 하청업체가 산재 발생을 숨기는 관행은 언론을 통해 이미 여러 차례 보도된 바 있다.
노동부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2008년 고용보험에 등록된 300명 이상 사업장 963곳에서 일하는 노동자 169만여명 가운데 22%가 사내하청 노동자였다. 사내하청 방식은 제조업뿐 아니라 서비스업에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번 연구가 보여준 것처럼 하청노동자들은 더욱 불리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일을 한다. 이들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원청기업의 책임을 강화하는 규제와 실질적 집행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