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감정노동


‘소비의 지점’과 보건의료노동자의 감정노동

임준 /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

1. 패러다임의 변화

한국의 산업안전보건법은 제조업의 안전보건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해도 될 정도로 제조업에서 발생하는 위험물질 및 위험공정에 대한 세세한 규정과 그에 대한 사업주의 예방의무 등을 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 건설업의 안전보건 문제를 추가하고 있는 정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규정이 다른 업종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제조업만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기본적으로 측정 가능한 물리화학적 위험 인자 및 공정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안전보건 조치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조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이 제조업의 물리화학적 위험 인자 및 공정에 대한 안전보건 조치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산업안전보건법은 전체적으로 매우 나열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렇게 제반 위험 요인을 열거해 놓은 규정은 그에 해당하는 인자 및 공정에 대한 안전보건 조치에 대해서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해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수 있지만, 그에 해당하지 않는 위험 인자나 공정, 또는 환경에 대해서는 취약하다는 단점을 갖는다. 제조업만 하더라도 신기술의 도입 등으로 새로운 공정과 새로운 물질을 노동자가 다루어야 하는데, 현재의 법적 근거로 이러한 공정에 대한 사전 예방이 어렵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또한, 산업이 제조업 등 이차 산업에서 서비스업과 같은 삼차 산업으로 바뀌고 있다. 1990년대부터 노동자의 산업별 구성을 보면, 서비스업 종사자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인구의 노령화와 맞물려 사회적 필요가 커지고 있는 보건업 및 사회복지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은 제조업과 같은 이차 산업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서비스업 비중의 증가와 더불어 비정규직이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점도 현행 안전보건 패러다임의 변화를 예고하는 지점이다. 비정규직의 확대가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에 의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구조화된 위기 또는 전 지구적 자본축적을 위한 새로운 노동 포섭의 경향적 흐름이고 상당히 구조화되어 있어서 지속적으로 강화될 것이 예상된다는 점에서도 정규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이 노동자 특히 보건의료노동자의 건강 안전망이 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산업안전보건의 궁극적인 목적 또는 지향점이 노동자의 건강에 있다고 할 때 당연하게 그 주체와 대상은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데, 그 주체와 대상의 면모가 과거와 달라졌다면 산업안전보건이 과거의 틀과 달라져야 한다. 제조업이 주도하는 산업 구조와 정규직 중심의 사업장에서 주로 나타났던 안전보건의 문제와 틀은 서비스 산업 등이 확대되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중이 커지고 있는 현실에서 적합하지 않다. 새로운 내용과 형식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2. ‘소비의 지점’과 보건의료노동자의 건강

산재보험 통계에 기초한 한국의 재해율은 점차 낮아지고 있는 추세다. 사망자수는 크게 줄어들지 않고 있지만, 사망만인율 역시 줄어들고 있다. 특히 산재보험 통계에 기초한 공식적인 보건의료부문의 재해율과 사망만인율을 보면, 보건의료 등 서비스 업종의 재해율이 제조업, 건설업 등 전통적인 산재가 많이 발생하는 업종에 비해 매우 낮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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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업종별 재해율 및 사망만인율

자료: 노동부, 2009년도 산업재해분석, 2010

그러면, 보건의료 부문에서 산재가 정말 적게 발생하는 것일까? 2007년 발간된 한국산업안전공단의 연구보고서를 보더라도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보고서는 건강보험 손상 환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를 통해 산재보험 통계로 잡힌 직업성 손상자수가 전체 직업성손상자의 2.5%에 불과하고 산재보험 적용 대상이면서도 산재보험에 누락된 직업성 손상자수가 전체의 35.1%에 이르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보건의료 노동자 중 상당수도 실제 직업성 손상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재보험으로 치료 받지 않고 건강보험으로 치료를 받았을 개연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건강보험 손상 환자를 통해 주청한 직업성 손상자 분포 _ 임준2.jpg

그림 2. 건강보험 손상 환자를 통해 추정한 직업성손상자 분포(2006)

자료: 한국산업안전공단 2007

미국의 통계를 보더라도 한국의 보건의료노동자에게 산재가 적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수가 은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2002년 통계를 보면, 병원부문 노동자의 재해율이 9.7%로 다른 산업 노동자 평균인 5.3%에 비해 훨씬 높다. 이러한 재해율 수치는 과거 재해율이 높았던 산업인 광업, 제조업, 건설업의 재해율인 4.0%, 7.2%, 7.1%보다 높은 수준이다. 특히, 다른 산업의 재해율은 감소 추세이지만, 보건의료 부문 노동자의 재해율은 정체 또는 증가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한 지점이다.

3. ‘소비의 지점’에서 발생하는 새롭고 다양한 건강 문제의 발생

보건의료노동자는 화학물질 등에 의한 산재와 중량물 취급 및 반복 작업, 그리고 불안전하고 부적합한 작업 과정 등에 기인한 근골격계질환, 작업 도구 등에 의한 알레르기성 피부염 등 제조업 등에서 발생하는 전통적인 유형의 산재에 노출되어 있다. 제조업 사업장의 두 배 이상인 300여종 이상의 화학물질이 병원에서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진국의 경우를 보면, 전체 산업 노동자 중 보건의료노동자에게 근골격계질환이 가장 많이 발생하고 있을 정도로 환자 및 기구의 운반, 장시간 기립 등 많은 위험요인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 보건의료노동자는 제조업 노동자와 같이 노동과정에서 위험에 노출될 뿐 아니라 보건의료서비스의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일어나는 환자의 접촉 지점에서도 심각한 건강 문제에 노출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환자의 접촉 지점에서 발생하는 위험요인은 전통적인 위험요인에 비해 건강 위험요인이 훨씬 다양하고 문제의 성격이 이질적이다. 특히,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위험요인에 보건의료노동자가 노출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폭력과 정서적 박탈이다.

 

미국만 하더라도 사업장 폭력의 32%가 보건의료노동자에게서 발생하고 있을 정도로 보건의료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폭력 문제가 심각하다. 이 중 51%가 환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폭력이다. 더욱 문제는 병원 경영자 또는 보건의료노동자들조차도 환자에 의한 폭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폭력은 노동자 개인의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건강 문제 뿐 아니라 환자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의 적절성 측면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지금 미국은 적은 수의 간호사 인력, 보안 시스템 미비, 경영진의 인식 결여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폭력 문제가 구조화되고 있다. 또한, 보건의료노동자는 장시간 노동 및 교대 노동 뿐 아니라 질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의 접촉 과정에서 부정적 스트레스 요인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아서 다른 업종에 비해 정서적 소진이 많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건강문제에 노출되어 있는 보건의료노동자는 대표적인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직업군이라고 할 수 있다.

 

감정노동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건강 문제는 보건의료 노동과정의 본질적 특성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 및 불만으로 내재화된 환자와 일상적으로 접촉해야 한 보건의료 노동자는 환자와 관계 속에서 구조적 갈등 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보건의료의 특성상 정보가 비대칭적이고 평가가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환자의 요구가 즉자적이고 공격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병원조직의 특성이 문제를 더 증폭시킨다. 병원조직은 다른 조직에 비해 가부장제에 기초한 성별 직종 분리가 구조화되어 있어서 성별 문제와 결합된 직종 간의 갈등이 크다는 점에서 특징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여성노동에 대한 비하와 저평가, 남성 중심적 조직 문화가 직위와 직종을 통해 관철되면서 환자의 접촉 지점에서 발생하는 정서적 박탈과 폭력이 증폭되거나 새로운 양상으로 표출된다. 이러한 갈등 관계는 성폭력을 포함한 다양한 폭력 문제를 유발하기도 하고, 심각한 정서적 소진을 유발하기도 하며, 결국 환자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 저하로 나타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치료행위 중심의 보건의료체계와 의사 중심의 병원 운영이 간호를 포함한 서비스 인력의 절대적 부족으로 나타나고 결국 환자 및 보호자와 갈등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점도 보건의료노동자의 건강 문제를 악화시키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업무의 특성상 교대 근무를 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정서적 소진 등 건강문제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김철웅 등(2010)이 수행한 연구에서 높은 정서적 소진 상태에 있는 간호사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큰 것으로 나타났는데, 앞에서 언급한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표 1. 간호사의 높은 정서적 소진 상태에 대한 국제 간 비교 결과

구분

 

미국

캐나다

영국

스코틀랜드

독일

한국

간호사

다른 

직종

전체

내과,

외과,

산부

인과

직무만족도

41

32.9

36.1

37.7

17.4

61.7

68.5

39.9

높은 수준의

정서적 소진 비율

43.2

36

36.2

29.1

15.2

62.9

70.4

35.1

이직 계획 비율

22.7

16.6

38.9

30.3

16.7

28.9

32.1

9.9

 

4. 환자권리 향상과 보건의료노동자의 건강을 위한 연대의 모색

‘소비의 지점’에서 발생하는 보건의료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환자의 건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김철웅 등(2010)이 수행한 연구에 의하면 환자의 부작용을 경험한 간호사의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큰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낙상사고의 경우 주요 과목의 간호사의 경우 58.8%가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환자 안전 문제는 일차적으로 병원 인력의 부족에 기인하게 되는데, 결국 병원 인력의 부족은 환자 안전 문제를 발생할 뿐 아니라 노동자와 환자 간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정서적 소진을 높이는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보건의료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다시 환자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 저하 문제로 연결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사실 인력의 부족 뿐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라도 정서적 소진 상태가 심각한 상황에서 환자에게 최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와 같이 보건의료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소비의 지점’에서 환자와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업무의 특수성 뿐 아니라 고통과 불만이 내재화되어 있는 환자의 특성, 그리고 병원조직의 전근대성 등 다양한 복합적 요인으로 인하여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을 뿐 아니라 보건의료의 특성상 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결국 환자의 건강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느 부문보다 노동자의 건강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보건의료노동자와 환자가 노동자의 건강권과 환자권리 및 서비스의 질을 매개로 연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첫 출발은 인력 문제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참고문헌


김철웅. 2010 대한민국 병원을 말한다! – 병원인력 확보, 의료 질 향상을 위한 연구발표회.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2010

노동부. 2009년도 산업재해분석. 2010

임준. 국가안전관리 전략 수립을 위한 직업안전 연구. 한국산업안전공단.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