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건강연대는 2013년 산재를 입고 치료 재활 중인 노동자들, 치료가 끝나고 생업으로 돌아간 노동자들의 생활실태를 조사하는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산재 노동자들은 몸과 마음에 입은 상처를 충분히 치료받지 못한 채 힘겨워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개인의 질병도 사회구조와 떨어져서 볼 수 없기에 의료인들이 노동자를 진료할 때 더 많은 질문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하는 사람의 인권을 생각하는 의사를 위한 열 개의 가이드’를 만들었습니다. 독자 여러분과 이 열 개의 가이드를 나누고자 합니다. – 기자말 |
▲ 일하는 사람이 아프다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봐야 한다.
ⓒ 노동건강연대
일하는 사람이 아프면, 그것은 십중팔구 그 사람이 하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병원에 가는 분들은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의사에게 말하십시오. 병원의 의료진들은 진료받으러 온 분들에게 직업이 무엇인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물어봐 주십시오. 정부 관료, 보험기관 행정가들이 노동자가 치료받을 권리를 빼앗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의사가 환자에게 직업을 물어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출발선입니다. 하지만 이 출발의 룰이 안 지켜지는 게 현실입니다.
[가이드①-인권] “전기요금 나온다고 환기구멍 막아놓고 일하래요”
우리는 모두 다른 사회적 조건에서 살고 일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조건이 달라도 아프면 치료받을 수 있고, 동등한 건강 수준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체조건과 환경이 다른 상황에서 어떻게 동등한 건강수준이 가능하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도 건강의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플 때, 치료가 필요할 때 사회가 제공하는 최적의 서비스를 이용할 권리가 동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최근에는, 사회경제적 환경의 격차를 줄여야 하고 경제 조건이 다른 집단 사이에 나타나는 건강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건강권의 국제적 표준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장님이 전기요금 절약한다고, 공장 천장에 있는 환기통들을 전부 막아놓고 일을 시키고 있어요. 우리들은 지금 탁한 공기를 마시면서 일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가 일하는 직장의 환경으로 인해서 나의 건강이 침해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인권의 측면에서 당연한 나의 권리입니다. 일하는 환경, 내가 쓰는 물질, 나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조건에 대하여 나는 ‘알 권리’가 있습니다. 일을 하다 위험이 예상된다면 나를 보호하기 위하여 일을 중지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이는 일하는 사람이라면 보편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인권, 기본권입니다.
“고3 학생들이 취업을 하려고 업체에 몇 개월씩 실습을 하는데 4대보험 적용이 안 되기 때문에(사업주가 안 해준다는군요), 산재로 보상받을 길이 없어요. 미성년자 취업에 관한 근로기준법령도 알고 싶습니다.”
“상사가 욕을 해요. 이유가 어찌되었건 안 되는 거잖아요. 앞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요. 이건 뭐에 걸리는 거 없나요? 정말 수치스러워요.”
인권은 개인이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도록 법적 보호 장치를 두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개인의 인권을 사회와 국가가 보호하고 증진시켜야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입니다. 사회보장에서 노동자 건강을 보호하는 제도가 산재보험입니다.
유럽에서 사회보장이 시작될 때, 산재보험은 산재가 너무 많이 일어나 생기는 사회적 병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무서울 만큼 노동환경이 비인간적이었고 노동자들이 부상당하고 죽고 치명적인 병에 걸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자본주의 사회 유지에 큰 위협을 가져오기에 자본가들에게 산재보험이라도 들게 했던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인권에서 사회보장의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부터는 산재보험 역시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로 생각합니다.
[가이드②-계약] 사람을 기계로 보고 근로계약서를 쓰나요
월급의 받고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금을 받는 대신 고용주가 요구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근로계약을 맺습니다. 근로계약서에 일터의 환경이 내 생명과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하면서 건강에 침해를 받았을 때 이를 용인한다는 조항이나, 노동자 개인이 책임을 진다는 조항도 당연히 없습니다. 그런 조항이 있다면 그 자체로 윤리적 문제이며, 계약 자체가 무효가 될 것입니다.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하는데 직장 상사가 폭언과 폭행을 일삼아 힘듭니다. 제가 마음이 무거운 게 우울증이 아닐까 싶어요.”
“땀을 많이 흘리는 일을 하기 때문에 퇴근 전에 샤워를 하고 퇴근을 해왔어요. 관례적으로 계속 해왔던 일인데 샤워 시간을 체크해서 급여에서 공제한다고 합니다. 이대로 받아들여야 하나요.”
고용주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할 의무를 진다는 것이 근로계약서의 이면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일할 권리. 가장 기본적인 인권
ⓒ 노동건강연대
“전기작업이라 2인 1조로 일을 하고 있는데 회사에서 야간시간에 1인 1조로 작업을 하게 하려고 합니다. 혼자서 전기작업을 하면 매우 불안합니다. 감전위험, 사다리 타고 높은 곳 작업, 사고가 나도 후속조치가 어렵고….”
일본에서 기계를 만들 때 적용되는 원칙이 있다고 합니다. 기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만져도 위험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프레스 작동법을 모르는 사람이 프레스를 잘못 만진다고 해서 기계에 손가락이 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경력 많은 노동자가 기계를 만질 때 속도를 높이기 위해 안전장치를 풀어놓고 일하는 공장이 많습니다. 이래서 손가락이 잘린 노동자가 많습니다. 일본과는 다른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일을 하다가 딴 생각을 합니다. 반복해서 같은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게 직장생활입니다. 당연히 딴 생각에 빠지기도 하고, 실수를 하기도 하죠. 딴 생각을 하지 않는 방법은 기계가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일을 하면서 큰 실수, 작은 실수를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딴 생각을 하더라도 사고가 나지 않도록 보호하고, 안전한 장치를 만드는 것이 노동자를 채용하고 근로계약서를 쓰는 고용주의 의무입니다.
사장이 내 삶을 지배하는 관계… 자신의 ‘인권’을 알아야 한다
이 글에선 열 개의 가이드 중에 첫 두 개를 살펴보았습니다. 담장에 만발한 개나리꽃을 발견하고서야 겨울은 이미 멀리 달아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는 봄을 두 손 힘껏 밀어내고 싶은 날입니다. 기업 회장이라는 자가 일당 5억 원짜리 종이봉투 만들기 노역을 한다는 뉴스가 터지는 동안, 조선소에서 철로에서 고속도로에서 노동자들이 죽었다는 기사도 조그맣게 실렸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배 만들다 족장에서 떨어지고, 기차 역사를 짓다가 열차에 치이고, 도로를 보수하다 차에 치이는 사고들이었다고 합니다. 일하는 조건, 일하는 공간의 특성 자체가 그대로 죽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을 이유가 될 수 없는, 성립되어서는 안 되는 인과관계로 사람이 죽었군요.
당신은 어떤가요. 별일 없나요. 당신 일터의 노동법, 근로기준법은 잘 있나요? 지키기 어려운 것이 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지켜야 할 최저선의 것이 법으로 만들어집니다. 법을 정의롭게 만들고, 그 법을 지키기만 해도, 이렇게 인권이라는 걸 공부해보자고 머리 맞대지 않아도 됩니다.
법이 보호하는 노동자의 권리는 노동자를 고용한 기업, 사장과 노동자의 계약관계가 대등한 일대일 관계가 될 수 없다는 걸 전제로 합니다. 사장이 내 월급을 정하고 기업이 내 삶의 거의 전부를 지배하는 관계입니다. 국가, 정부가 노동자에 대한 보호정책을 갖고 있지 않다면, 노동자가 한없이 작아지고 빼앗기는 관계는 브레이크 없이 질주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언론은 노동자와 기업 사이를 마치 기계적 평등이라도 있는 것처럼 교묘하게 자르고 붙여서 보도합니다. 노동건강연대는 대기업 사장님들을 고발하는 활동을 합니다. 하청노동자들이 일하다 죽는 사고가 나면 그 현장의 원청 대기업을 찾아서 대표이사를 고발합니다. 노동자가 사망한 사고현장을 언론이 보도할 때 원청 대기업의 이름은 99% 보도하지 않습니다. 사고 현장에서 가장 크게 보이는 원청 대기업의 로고도 촬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노동조합의 파업, 농성, 쟁의 기사들에는 기업 이름이 나옵니다. 노동운동을 비난하고, 기업에 유리하게 여론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노동자의 생존을 지키고,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해주길 바라는 마음은 식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내가 일하는 공간에서, 내 노동이 행해지는 현장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공부해야 합니다. 생각해야 합니다. 내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인권은 지금 보편적이고도 반박할 수 없는 가치이므로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권리를 지키고자 할 때, 나의 권리를 빼앗는 상대에게도 인권을 공부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전문성을 권력으로 갖고 있으면서 그 전문성으로 노동자의 생활, 생계를 멋대로 재단하는 관료들,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법제도는 시대의 산물입니다. 힘의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를 절대화하여 노동자를 곤경에 빠뜨리는 전문가와 정부 관료들은 목적과 수단을 뒤집지 말아야 합니다.
직업병 인정과 보상이라는 것도 사회보험·사회보장의 한 방편일 뿐입니다. 병이나 사고 때문에 불안해지는 노동자의 생활과 생계를 안정시키는 게 목적입니다. 얼마든지 넓힐 수 있고, 벽을 허물 수 있습니다. 사회보험·사회보장 제도의 기준에 맞추려고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보호하려고 제도가 있는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 가이드 1, 2는 노동건강연대 임준 회원(가천의대 교수)의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기사 원문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73710
연재기사
7. 50년된 산재보험, 과연 괜찮은 사회보장 제도 일까요? http://laborhealth.or.kr/38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