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건 왼손 엄지 하나, 다친 몸보다 힘든 건…
[병원에서 배우는 노동인권④] 산재사고 노동자 한아무개씨
산재보험은 일하다 사고를 입거나 아픈 노동자에 대해서 의료보장, 소득보장을 확실히 해주어야 합니다. 이 기능을 못하면 다친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빈곤이 찾아오고 가족관계가 불안해집니다.
지금 쓰려는 노동자 한아무개씨의 이야기는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여러 일자리를 떠돌다가 정착한 공장에서 안 자고, 안 먹으며 저축만 하던 청년은 1987년 한 손을 프레스에 잃고, 1992년에 다시 다른 한 손을 다쳤습니다. 모두 한 공장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산재보험은 매정했습니다. 두 번의 사고로 한 손가락만 겨우 남아있게 된 노동자가 겪었을 충격, 가족의 슬픔을 어루만져 주지도 않았습니다. 재활과 취업, 생계문제 어느 것도 사회보험 노릇을 한 게 없습니다. 그저 사업주, 사장님이 들어놓은 사보험처럼 굴었을 뿐입니다. 일하다가 장애를 입었지만 절망에서 빠져나와 다시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이야기는 2000년대까지 계속됩니다.
보험 운영기관이 노동부에서 근로복지공단으로 바뀌고, 50년 전 500인 이상 기업에서 시작하여 1인 이상 모든 사업체에 적용되고 있지만, 산재보험의 마인드는 50년 전 군사정권이 산업화의 부작용을 무마하기 위해 도입했던 출발점에 멈춰있습니다.
치료, 보상, 재활, 원직장 복귀로 순환할 수 있는 사회보장 시스템으로 나아가지 않고, 산재여부 판정, 부정수급자 색출, 직업병 인정기준 강화 같은 기업이 원하고, 사업주가 좋아하는 기능만 비대화시켜 왔습니다.
노동자면 누구나 책임없이 산재보험 보장… 현실은 “도장받아오세요”
▲ 산재보험은 매정했습니다. 두 번의 사고로 한 손가락만 겨우 남아있게 된 노동자가 겪었을 충격, 가족의 슬픔을 어루만져 주지도 않았습니다. | |
ⓒ 노동건강연대 |
사회보험은 안전판이기도 하지만 소득재분배의 기능도 갖습니다. 그저 인정 기준만 엄격히 하고 수급자 기준만 따져서는 노동자가 빈민으로 밀려나는 일을 막아줄 수 없습니다. 일자리를 떠도는 비정규직, 알바, 영세공장, 특수고용직노동자, 영세자영업자들은 사고가 나거나 병에 걸리면 사회보험이 제 역할을 해주어야 사회적인 삶을 유지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산재보험은 문구로는 노동자의 책임없이 모든 사고에 적용된다고 하면서, 신청서를 쓰게 하고 사업주의 도장을 받아오게 합니다.
사업주가 누군지도 모르는 제조업 파견노동자들, 불법인지도 모르고 인력업체를 통해서 공장으로 가는 노동자들이 어디로 가서 도장을 받아올까요. 계약기간이 정해져 있는 노동자들, 재계약을 걱정하는 이들은 어디로 가서 사장 도장을 받아올까요.
이 같은 현실을 정부가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보장의 사회적 순기능 같은 것은 눈 딱 감고 외면한 채 기업의 금고를 지켜주는 보험회사처럼 굴고 있을 뿐입니다.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한아무개님은 이같은 경험을 나눔으로써 좀 더 나은 사회가 되길 바랐습니다.
아프게 살아온 날들을 타인에게 들려주는 것은 어느 자본가의 이웃돕기보다, 예술가의 재능기부보다 값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생으로부터 사회가 배우고 후배노동자들이 덜 힘들길 바라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두 번의 산재사고를 입은 한아무개님의 말을 받아적은 것입니다.
“고아원에서 자라 남의 집 머슬살이를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도망쳐 나왔어요. 정비 공장에서 일하다가 완행타고 12시간 걸려 서울로 왔지요. 용산역에서 중국집 배달원 일을 구해서 장승백이에 정착했어요. 거기서 배달을 열심히 했어요. 일년 배달 일을 하니 어떤 양반이 영등포에서 개업한다고 스카우트 해서 갔어요. 그때가 81년이었어요.
영등포에서 일하다가 장승백이, 방배동, 여기저기 중국집, 한식 배달 일을 하다가 주방 그릇닦이를 시작했어요. 외식 전문이라 주말에는 1만 개 이상을 닦아요. 식당을 그만두고 세진정밀이라는 프레스공장에 들어갔어요. 3개월은 있어야 프레스기계를 주는데 내가 남들보다 한두 시간 일찍 나가서 일하고 그러니까 보름 만에 기계를 내줬어요.
혼자 프레스기계를 잡고 일당 3000원 받고 일했어요. 잔업 조금씩 하고 그러니 한 달에 10~15만 원 정도 벌었지요. 그때 프레스 업종은 일이 많았어요. 고급화가 덜 된 상태라 일이 어마어마했어요. 85년부터는 한 달에 잔업을 180시간 정도 했어요. 평상시는 새벽 2~3시에 끝나고 금토일은 무조건 철야.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아줌마, 나 손이 없어졌어”
공장 수위실에서 쪽잠 자고 살았어요. 라면 하나씩 먹고. 일당이 5000원이었는데, 남들보다 더 받는 편이었어요. 담배값 빼고 다 저금해서 돈이 모이니까, 86년 말에 회사 앞 구로동에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3만원씩 내기로 하고 처음 방을 얻었어요.
회사 친구 놈이 방이 없어 같이 살았는데, 87년에 물난리가 났어요. 잠을 안 자고 퍼냈지만 못 당하고 물이 차올라서 학교로 피신 가서 일주일을 살았어요. 거기서 못살겠다 싶어 대림동, 보증금 50만 원에 5만 원짜리 2층집으로 갔어요.
▲ 그날도 그 기계를 잡고 일하는데 어느 순간 손에 느낌이 이상한 거예요. 보니까 왼손이 없어요. | |
ⓒ freeimages |
그때 첫 번째 사고가 났어요, 87년 9월 추석 전. 프레스 기계가 계속 말썽이길래 반장한테 말했는데 안 고쳐주더라고요. 그날도 그 기계를 잡고 일하는데 어느 순간 손에 느낌이 이상한 거예요. 보니까 왼손이 없어요. 왼손 손가락이 없는 거야. 아프지도 않았어요. 그냥 손가락이 없어서 놀랐고, ‘아줌마 나 손이 없어졌어’ 그랬더니 ‘뭔 소리야’ 하면서 달려오더라고. 그게 첫 번째 사고였어요.
병원에 입원했는데, 수술하고 입원해 있는 동안 회사 아줌마들이 매일 돌아가며 간병해 줬어요. 절단 사고라 오래는 안 있고 한두 달 있으면서 물리치료 받고 그랬어요. 그땐 보상 이런 것을 모르니 하나도 못 받았고, 산재급여만 300만 원 정도 받았어요.
치료 끝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갔어요. 일하는 데 큰 지장 없으니까. 회사에서도 일 잘한다고 인정받고. 좀 지나니까 라인 장을 시켜주더라고요. 라인 장은 작업반장인데, 이즈음 일당제에서 월급제로 바뀌었어요.
잘린 손 살려달라고 하니, 의사 “그러게 왜 다쳐왔나”
프레스업종은 3D 업종이에요. 힘들고 더럽고 위험하고. 돈은 많이 못 받고. 그래도 이 손으로 똑같이 일을 했어요. 그런데서 회사에서 계속 사고가 났어요. 사고 나는 걸 보니 무서운 생각이 나서 그래서 그만 둬야겠다 생각하고 사직서를 썼는데 회사에서 안 받아주는 거예요. 나보다 위에 있던 사람들도 쉽게 그만두는데 내가 사직서 들고 가니까 바로 찢어버리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도 내가 할 일은 책임감 있게 했어요. 내가 쉬는 날에도 나와서 일을 하니까 한 마디로 일꾼을 놓치기 싫어서 그런 거죠.
92년, 두 번째 사고가 났어요. 그때가 토요일인데 전날 금요일에 안 쓰는 금형을 나 혼자 200개 가까이 정리했어요. 무지 힘들었어요. 무거운 건 100킬로그램 나가는 것도 있으니까. 무리해서 일하고 나서 다음날 안 나가고 쉬어야 하는데 내가 안 나가면 계장이 혼자 고생하니까 힘들지만 무리해서 나갔어요.
그날따라 내 라인 사람도 아니고 평상시 말도 잘 안 하던 아줌마가, 나한테 와서 일 다 했으니 재료를 교체해달라고 해요. 자동기계고 내 담당이 아닌데 나한테 와서 말하는 거예요. 작업을 다하면 찌꺼기를 빼야 되는데 그게 잘 안 빠져서 실랑이 하다가 발로 클러치를 살짝 스쳤는데, 기계가 바로 내려오더라고요. 오른손이 잘렸어요.
어마어마하게 아팠어요. 피가 철철나고 내가 소리 지르니까 아줌마들이 놀라서 달려오고 병원으로 가고. 응급 처치를 하는데 내가 내 손을 보니까 ‘이 손으로 이 세상을 어찌 살아가야 하나’ 앞이 깜깜하고. 의사 다리 붙들고 ‘선생님 제발 이 손 좀 어떻게 살려주십시오’ 빌었어요. 그러니 의사가 참,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지, “그러길래 왜 다쳐서 왔냐”고.
이렇게 오른손 전체가 잘리고, 왼손은 1차 사고 때 잘리고. 그래도 하느님이 완전 병신은 안 되게 하시려고 그랬는지 왼손 엄지 하나는 남겼어요. 이 왼손 엄지 없으면 나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엄지 하나가 남아서 나 혼자 할 수 있어요.
두 번째 사고가 난 게 아들이 6개월 때인 거예요. 내가 자포자기 생활을 2~3년 하니 아내가 많이 힘들어 했어요. 한 번은 아내가 내 이름 막 부르면서 “나는 너 보고 왔는데 너, 나한테 이러면 안 돼” 하고 우는 거예요. 나도 눈물 흘리고. 그렇게 힘든데 도망 안 가고 같이 살아 준 거 고마워요. 그런데 붕대를 푸는데 내가 내 손을 보니 눈앞이 까매져요. 그래도 수녀님 도움받고 어린 아들 떠올리면서 마음 고쳐 먹었어요. 다친 손은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전세 800만 원이던 집에서 2차 사고 직후까지 살았어요. 많은 돈을 모으지도 못했어요. 100만 원 정도 현금이 있었어요. 2차 사고 난 뒤 회사에서는 아무 말도 없고 나는 컴퓨터의 컴자도 모르는데 서울대 학생이 와서 컴퓨터를 가르쳐 주었어요.
그래서 직접 산출 내역서를 뽑아서 회사로 가 최종 7700만 원으로 합의했어요. 그 많은 사고에도 합의 안 해주던 회사가 쉽게 합의를 해준 건 내가 그만큼 청춘을 다 바쳐서 열심히 일했기에 그렇게 해주지 않았나 생각해요. 운도 좋았어요. 내가 92년에 사고 났는데 91년에 17살 애가 손목이 절단돼서 타격이 컸다고 하더라고요. 회사는 95년에 부도났어요.
몸이 불편한 것도 힘들지만 일할 기회 없는 게 제일 힘들어
우연히 구로시장에서 석유 가게 배달 일을 하다, 친구가 우유배달을 하는데 같이 하자고 해서 97년부터 목동에서 우유 배달을 했어요. 월 40만 원 정도 벌었지요. 새벽에는 우유배달, 낮에는 산재노동자협의회에서 노동조합 회보를 발송해주는 우편발송일을 했어요. 새벽에 우유배달하고 잠깐 자고 우편발송하러 나가고 그랬어요.
신문배달도 했어요. 신문배달이 좋았어요. 신문배달로 60만 원 벌었어요. 알바생 둘이서 4시간 하던 동네를 나 혼자 2시간도 안 걸리고 했으니까요. 막 뛰어다니고 계단도 뛰어다니고. 좋았어요. 단지 밤에 잠을 못 자서 낮밤이 바뀐다는 것만 안 좋았어요. 신문배달 하면서 느낀 건데 다른 분들도 새벽에 일하고 다 낮에 직장 또 나가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손이 이러니까 겨울에 눈 오면 힘들었어요. 눈이 엄청 많이 올 때 신문을 산처럼 싣고 가다가 미끄러진 적이 있어요. 너무 화가 나서 그대로 두고 와버렸어요. 그 길로 그만뒀어요. 손이 이러니까 이만한 데서 넘어지고 그러니까.
겨울에는 잘린 손가락 말도 못해요, 시려워서. 집에 돌아오면 얼었던 곳이 녹으면서 시렵고 아파서 눈물이 나요. 웬만하면 아픈 거 잘 참는데, 손도 한심하고 성질도 나고. 신문 60만 원, 연금 100만 원, 우편발송해서 시급제로 30만 원 정도 받았어요.
노동조합 회보를 발송해주는 일을 하다가 보니 노동자들을 만날 기회도 생겼어요. 병원에 아파서 누워 있는 노동자들을 상담하면 마음에 와 닿는다고 그래요. 난 비슷한 입장이니까. 얘기하기도 훨씬 편하고 마음에 와 닿는다고. 병원에 누워있는 노동자들이 노동법, 산재보험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고 그랬어요.
산재 치료하면 먼저 먹고 살 일 걱정이죠. 뭐 해 먹고 사나, 취직이 힘드니까. 기술도 없고. 나도 경비자리를 아는 사람 소개로 갔더니 내 손 보고 안 된다는 선입관을 갖고 있어요. 가장 큰 문제이고 이것이 현실이에요. 나는 할 수 있는데도 사용자 입장에서는 장애 상태만 보고 안 된다는 시각을 갖고, 우리는 취직이 하늘의 별따기예요.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