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직업’ 물어보는 의사가 좋은 의사인 이유
[병원에서 배우는 노동인권⑥] 직업병 판정은 의학이 아닌 사회적 판정
노동건강연대는 2013년 산재를 입고 치료 재활중인 노동자들, 치료가 끝나고 생업으로 돌아간 노동자들의 생활실태를 조사하는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산재 노동자들은 몸과 마음에 입은 상처를 충분히 치료받지 못한 채 힘겨워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개인의 질병도 사회구조와 떨어져서 볼 수 없기에 의료인들이 노동자를 진료할 때 더 많은 질문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가이드를 만들었습니다. [편집자말] |
한 번은 제가 자동차 공장에 순회점검을 하러 갔는데, “손목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노동자를 만났어요. 병원에 갔더니 원인을 알 수 없고 치료도 안 되는 병이라고 했다면서 제게 물어보더라고요.
환자들은 병원에 와서 “자신이 왜 아픈가”를 물어보지만, 의사들은 ‘어떻게 치료해야 하느냐’를 배우거든요. 그래서 “원인을 잘 모르겠다”고 답변하는 의사들이 종종 있어요.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손목에 힘을 주어 제품을 누르는 작업을 하루에 2천 번이나 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손목이 안 아플 수가 있나요. 반복 작업으로 손목에 염좌가 생긴 거죠.
이런 경우 충분히 쉬고, 회복을 도와주고, 통증관리 하는 것이 치료인데, 손목에 부담이 되는 작업을 계속 하니 당연히 안 낫고 자주 의사를 찾아가게 된 거죠. ‘의사가 원인불명 난치병이라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저한테 질문을 해요.
다행히 그 환자는 회사랑 얘기가 잘 돼서 손목 부담이 덜한 작업으로 옮겨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원래 하던 작업은 누군가 하루 종일 하면 아플 수밖에 없는 유해 작업이니까 다른 작업자들이 교대로 일하게 되었어요.
손목 아파서 왔는데, “일 그만 둬야 낫는다”고 말하는 의사
▲ 병원 청소노동자가 일하는 모습. | |
ⓒ 노동건강연대 |
이 대목에서 동료 의사나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의사한테 오는 환자의 반 이상은 월급받는 노동자라는 점을 항상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환자의 직업을 물어보세요. 의사들이 환자의 직업이나 사회·경제적인 수준을 이해하면 더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냥 회사 다닌다고 하면, 어떤 일을 하는지 한 번 더 물어봐 주세요.
반복 작업을 계속 해서 손목 염좌가 생겼다는 것을 아는 경우에도 의사들은 “일을 그만둬야 낫는다”고 설명할 때가 많아요. 이런 말을 들으면 환자는 속이 상합니다. 그럼 어떻게 먹고 사느냐는 거죠. 어쩔 수 없이 일을 중단하고 치료를 해야 할 정도의 상황이면, 산재신청을 해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일하면서 계속 치료를 받는 경우에는 가급적 작업을 조정할 수 있게 알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임상의사가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도 아닌데 어떻게 작업 조정 방법까지 어떻게 알려주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업 부담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일반적인 원리를 알려주고 노동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물어볼 수는 있지요. 예를 들면 건물 청소하시는 분이 어깨가 아프다 할 때는 이렇게 말해보세요.
“일을 한꺼번에 몰아서 하지 말고 짬짬이 쉬었다 하는 작업 습관이 필요하거든요.”
“가능하면 같은 작업을 오래하지 않도록 하세요.”
“마대 작업을 두 시간 쌈박하게 하고 손걸레질을 또 한 번에 몰아서 하고 이러면 더 아픈 거예요, 번갈아가면서 하세요.”
이 정도만 말해줘도 도움이 돼요. 그리고 치료해도 잘 낫지 않고, 일을 쉬면서 치료해야 하는 경우에는 산재보험처리를 할 수 있도록 직업환경의학 전문의한테 의뢰해 주세요.
산재신청 서류 작업의 의미, 한번 더 생각해요
▲ 대부분의 의사들이 산재신청 서류 작업을 부담스러워 하지요. | |
ⓒ sxc |
흔히 의사들은 산재 노동자를 진료할 때 부담스러워 하고, 산재 노동자들은 의사를 만날 때 불안하거나 서운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노동자들이 근골격계 질환이나 뇌심혈관질환 같은 직업병(업무상 질병)으로 산재 신청을 하는 경우는 이미 치료비가 많이 나가 경제적으로 힘든 상태입니다. 또 회사에서 직업병이 아니라고 하니까 억울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산재보험은 직업병이라는 것을 노동자가 입증해야 하기 때문에 회사하고 갈등하면서 마음을 다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는 누구나 아프지 않고 오래 일하는 것을 바라죠. 병원에 오는 노동자 역시 마찬가지고요. 현재 제도가 산재로 인정받아 보상 받기 어렵고, 환경이 개선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회사로 돌아가면 또 아프게 되는 악순환, 이게 문제입니다.
산재로 치료 받으러 온 사람들은 만성적 통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요. 의사들에게 계속해서 아프다는 것을 호소하죠. 만성 통증이 있으면 우울증이 생기게 돼요. 의사가 환자의 심리적 원인에 대해 정확하게 평가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료 의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산재신청서 같은 서류 작업을 해야 해서 산재환자들은 부담스럽다고들 해요. 바쁜 일상 중에서 하려고 하니 시간적 부담도 만만치 않아요. 좋아할 만한 업무가 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업무와 관련해서 병이 생기거나 악화된 질병 때문에 병원에 온 노동자들에게, 일을 중단하고 치료를 받는 것 만큼 좋은 치료 효과를 내는 건 없습니다. 환자가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고 더 잘 나을 수 있다는 점에서 산재신청 서류 작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주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직업병, 즉 업무상 질병이라고 생각해서 산재신청을 하면, 근로복지공단은 업무상 질병 판정위원회를 열어서 심의를 합니다. 거기에 참여하는 의사들은 보통 사회봉사를 한다는 생각으로 옵니다. 그 바쁜 진료 시간 중에 시간을 낸다는 것은 엄청난 성의를 가지고 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산재 판정, 사업주의 노동자 건강 관리 의무도 따집시다
▲ 업무상 질병 판정위원회에 참여하는 선생님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판단과 자연과학적 판단을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직업병 판정은 사회적 판단입니다. | |
ⓒ freeimages |
그런데 업무상 질병 판정위원회에 참여하는 선생님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판단과 자연과학적 판단을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직업병 판정은 사회적 판단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는 취지를 가진 산재보상보험법에 근거해 의사가 전문 지식을 활용해서 평가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충분히 자연과학적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으면 업무상 질병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노동자 개인이 건강관리를 잘했는지 잘못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서 업무상 질병 여부를 평가하려는 위원들도 있습니다. 심혈관계질환 같은 경우 본인이 평소에 술 안 마시고 운동 잘하고 했으면 직업병 인정해 주고, 평소에 치료 안 받고 담배 피고 술 마시면 인정 안 해 주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걸 질병판정위원 본인의 소신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업주가 산업안전보건법이 정한 노동자의 건강관리 의무를 다했는지는 고려하지 않으면서 말이지요. 사업주는 근로자건강진단을 실시하고 고혈압, 당뇨병 등 질병자에 대해 건강관리를 할 의무가 있거든요.
특히 사회적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 질환이 뇌심혈관질환인데, 그 부분에선 자꾸 사회적 합의가 된 과로의 기준을 어겨가면서까지 본인의 소신에 따라서 판단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인정기준에 의해 주당 60시간 이상 일한 사람은 과로로 인정해주자, 우리가 사회적으로 합의한 바다, 이렇게 말을 해도 표결을 하면 다수결에 의해 불승인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직업병 판정 의미에 대한 판정 위원들의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직업병 판정을 하는 대대수 의사들은 공정하게 하려고 애쓴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산재보상의 취지를 생각해서 의학적 인과관계뿐 아니라 상당인과관계(어떤 원인이 있으면 그러한 결과가 발생하리라고 보통 인정되는 관계)에 해당한다면 아픈 노동자들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이 법의 취지에 맞는 ‘공정한’ 판단을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