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을 싸워야 산재 인정, 이게 정상인가요?
산재보험 50년과 삼성 반도체 노동자 첫 산재 인정 판결
지난 8월 21일, 7년 만에 딸과의 약속을 지킨 아버지가 있습니다. 삼성전자 반도체·LCD 부문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그 주인공입니다. 이날 서울고등법원은 삼성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두 명의 노동자(고 황유미씨, 고 이숙영씨)에 대해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산업재해를 선고했습니다.
▲ 21일 ‘삼성반도체 직업병’ 항소심 판결 직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고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 법원은 이날 황유미씨 등 2명의 산재는 인정했지만 다른 피해자 3명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2011년 1심과 같은 결과였다. | |
ⓒ 박소희 |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피고인 근로복지공단이 대법원에 상고를 하지 않아야 비로소 법적 효력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을 무려 7년이나 기다렸는데, 상고기한인 지난 11일까지 입이 마르는 기다림이 계속되었습니다. 다행히 근로복지공단이 최종 상고를 하지 않음으로써 산업재해 확정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정말 피말리는 추석이었습니다. 그 이후, 마음 놓고 어르신들께 축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근로복지공단에 화가 납니다.
‘왜 근로복지공단이 상고(2심 법원에서 3심 법원으로 항소하는 행위)를 할까봐 불안해하지? 올해는 산재보험 50주년이라고, 반백년의 행사를 거창하게 하고 있지 않나.’
근로복지공단이 대체 어떤 기관인지, 황상기 어르신의 인터뷰를 잠깐 들어보시죠(아래 인터뷰는, 팟캐스트 ‘시사통 김종배입니다’ – 특별대담, 세월호와 삼성백혈병 편(9월 5일)에서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은 노동자의 복지를 위해서 일하는 곳이기 때문에, 노동자가 작업 현장에서 일하다가 병에 걸렸는지 다쳤는지 이런 건 근로복지공단 스스로 찾아다니면서 알아보고 치료해주는 게 맞지요. 노동자가 병에 걸렸다고 근로복지공단에 알려줘도 산업재해라고 인정을 안 해서 그 노동자가 억울하다고 법원에다 소송을 해요. 행정법원에서는 산업재해가 맞다고 판결을 해줬어요. 그럼 근로복지공단은 수용했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억울하다고 근로복지공단이 항소를 했어요.
그래서 2심을 간 거예요. 2심으로 가면서 삼성에 보조참가인으로 적극적으로 참가하라고 공문을 보냈어요. 근로복지공단이 삼성에게. 그러니까 근로복지공단 설립 취지에 반하는 행동을 한 거예요. 그래서 삼성에서 대형 로펌을 통해서 6명의 변호사를 참가시켰어요. 그런데도 법원에서는 산업재해가 맞다고 판단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근로복지공단은 그 이름에 걸맞게 거기서 그만 둬야 되는 것이거든요. 더 하면 안 되는 것이지요. 만약 여기서 또 행정소송을 해갖고 상고를 한다면 근로복지공단이라는 이름을 떼고 ‘삼성복지공단’이라고 이름 다는 게 맞는 것이지요.”
노동자들의 복지 위해 있는 근로복지공단인데…
일반적으로 대다수 노동자들은 산재신청을 하면 회사에 불이익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묻습니다. 불이익이 있다면 그것이 곧 자신에게 인사상 불이익으로 돌아올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크게 다치거나 극단적으로 사망하는 경우에라야 산재신청이 당연하지, 그 이외의 산재신청은 상상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질병의 경우, 상담을 하게 되면 꼭 한번은 짚고 넘어가는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근로복지공단이 산재인정을 잘 해주지 않으면 소송까지 가게 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 말을 하게 될 때면, 사실 노무사로서 굉장히 부끄럽습니다.
보통 상담 내용을 들어보면 질병의 원인에 있어 일이 촉매제가 되거나, 결정적으로 일 때문인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그 개인은 병원비와 일을 쉬는 동안의 일부 임금을 보호받기 위해 소송이라는 높은 문턱을 넘어야 합니다. 그 과정은 설명하지 않아도 두렵고, 선뜻 내키지 않을 경험임이 분명합니다.
회사에 죄를 짓는 것인양 생각되고, 법을 몰라 변호사 비용을 부담해야 하며,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어려운 말을 늘어놓기 십상이니까요. 황상기 어르신은 정부로부터 딸의 직업병을 인정받는데 7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법원 혹은 근로복지공단에 계류 중인 산재사건은 너무도 많습니다.
ⓒ 안전보건공단 |
근골격계(무리한 힘의 사용, 반복적인 동작, 부적절한 작업자세, 날카로운 면과의 신체접촉, 진동 및 온도 등의 요인으로 인해 근육과 신경, 힘줄, 인대, 관절 등의 조직이 손상되어 신체에 나타나는 건강장해를 총칭)라고 불리는 병이 있습니다.
어떤 직종의 노동자에게도 쉽게 생길 수 있는 흔한 질병입니다. 보통은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거나, 이 정도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할 정도로 가볍게 여기는 병이기도 하죠. 그러나 이런 질병에는 분명 ‘하는 일’이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일하다 이런 병을 얻었을 경우, 진료비를 보험료로 처리하고, 심할 경우 쉬는 동안의 임금도 지급해야 합니다. 이 근골격계질환이 수월하게 근로복지공단의 산업재해 항목으로 인정받기까지는 정말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금속노조에선 몇 차례에 걸쳐 집단으로 산재신청을 함으로써 사회적 이슈로 만들었고, 이에 많은 노동조합들이 동참해 ‘이 정도 질병’도 인정해주지 않는 근로복지공단을 규탄해왔습니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는 4대보험(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중 하나인 산재보험에서 당연한 직업성 질병마저도 인정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였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다양한 지침을 만들어냈고, 이전보다는 좀 더 수월하게 산재보험 승인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면, 사고는 맥락이 조금 다릅니다. 주로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조선소나 제철소, 건설, 플랜트 노동자들의 산업재해는 은폐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산업재해 보고가 들어가는 순간, 회사에 발생하는 불이익이 너무 크다고 업계도, 노동자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린 종종 언론에서 대기업의 산재 은폐 뉴스를 접합니다. 또 피해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산재보험 처리보다 공상 처리(산재법상 받을 수 있는 각종 보상금을 회사측이 대신 지급하고 산재법을 적용받지 않는 것)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게 일상이 돼버렸습니다. 진짜 그런 건지 근로복지공단에 묻고 싶습니다. 노동자들이 일을 하다가 다쳐도 산재신청도 못하는 이 제도를 왜 지켜만 보고 있는 건지 말입니다.
산재 환자를 위한 전용 헬기, 부럽습니다
언제나처럼 장시간 노동을 하던 A(사무직일 노동자일 수도, 공장 노동자일 수도 있다)씨가 갑자기 쓰러졌다. 급하게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하지만, 대도시가 아니라 119가 와도 마땅히 살릴 수가 없다. 그러나 30분 이내에 헬기가 도착했고, 인근 큰 병원으로 옮겨 그는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 베를린 산재병원 전경. 한국의 대학병원보다 좋은 시설과 넉넉한 의료진을 보았습니다. 산재보험 재정으로 운용되고 만족도도 매우 높습니다. | |
ⓒ 노동건강연대 |
꿈같은 이야기일까요? 2013년 제가 직접 방문했던 독일 베를린 산재병원 옥상엔, 헬기가 대기 중이었습니다. 권역별로 있다는 헬기는 산재환자들만을 위해 사용되었고, 하루에 서너 차례 운행했습니다.
헬기장에 올라갔을 때 마침 이륙 준비 중인 헬기를 볼 수 있었는데 건설현장에서 추락한 노동자를 데리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헬기 운전 노동자는 언제나 헬기에 앉아 출동 대기 상태로 있다고 합니다.
그 헬기는 급성심근경색, 뇌졸중, 혹은 추락 등 급하게 이송해야 할 상황에는 언제든 출동했고, 비용은 산재보험에서 지급됩니다. 산재를 입은 노동자가 내는 돈은 전혀 없답니다.
이런 제도를 우리도 만들 수 있을까요? 단순하게 앞에서 살펴본 사례들만 보더라도 단번에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한국의 산재보험 제도가 수준 이하라는 점입니다. 접근조차 힘든 상황. OECD에 가입한 선진국인데, 우리는 언제까지 유럽 국가의 제도들을 부러워만 해야 할까요?
너무 큰일이 많아 자꾸 잊게 되지만, 지난 대선의 최대 이슈는 복지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대다수인 한국 땅에서 복지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일을 하다가 아플 때 제대로 쉬면서 마음 놓고 치료받을 수 있는 권리입니다.
이미 일하는 모든 이들은 4대 보험료를 내고(회사에게 걷지만, 순수하게 회사가 내는 것인지 생각해보자)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산재보험 혜택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없습니다'(단호해서 죄송합니다).
그래서 불안한 국민들은 민간보험에 다시 가입하고, 입원시 일당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챙겨주는 보험을 선호하게 됩니다. 일을 하던 사람이 불가피하게 다치거나 아파서 일을 쉬게 되면 가장 걱정되는 게 생활비이기 때문이죠. 결국 국가에 보험료만 낼 뿐, 사보험에 돈을 더 내고 이용하고 있는 형국이 되어버렸습니다(산재보험제도 50년인 올해 근로복지공단의 누적 흑자는 9조 원에 달합니다). 반면 산업재해 신청이 없는 회사를 중심으로 산재보험료를 깎아주어, 주로 위험이 집중되는 중소영세하청 회사들의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산재보험제도 50년, 7년간의 싸움같은 건 없길
사고를 제대로 수습하는 과정에서 더 큰 사고를 예방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은폐를 방조하는 정책이 아니라, 사고를 드러내고 용기있게 수습할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 이상의 참사를 피할 수 있습니다. 최근 고용노동부가 ‘산재보험 할인제도’를 발표했는데, 그 역시도 산재를 은폐하고 일 때문에 아프게 된 사람에게 죄책감을 덧씌우는 제도라 안타깝습니다(관련기사 : “사람이 떨어져도 수건으로 피 닦고 일해요”).
마지막으로, 이야기 하나. 몇 달 전, 산재보험 OX 퀴즈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문제가 되는 질문이 하나 있는데, 바로 ‘산재보험 신청서에 사업주 확인란이 있다’가 맞냐, 틀리냐는 것이었습니다. 정답은 O.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그건 몰랐다며 놀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현실에서 산재보험 신청서를 받아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느끼는 첫 번째 벽, 사업주의 확인 도장입니다.
우리 사회보장제도의 하나의 큰 축인 산재보험은 아직 사람들이 제대로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산재신청제도에서 ‘사업주 날인’만 없어져도, 산재신청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아니던가요. 7년을 싸워오신 고 황유미씨의 아버님 황상기 어르신의 일을 계기로, 그리고 산재보험 50주년을 계기로, 산재보험이 노동자 가까이에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