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한 소녀가 백혈병에 걸립니다. 그녀는 2007년에 사망했고, 2006년, 같은 일을 했던 동료 노동자도 백혈병으로 사망합니다. 우리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백혈병이 직업병인가요? 아닌가요? 이 연속되는 사망은 우연인가요? 그 질문은 산재보험의 벽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산재보험은 사회보험입니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게 힘이 부칠 정도로 곤경에 처했을 때, 나락으로 떨어지지 말라고 만들어 놓은 최소한의 비빌 언덕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산재보험은, 산재신청하면 해고되지 않느냐, 회사에 해가 되지 않느냐, 신청하면 되긴 되는거냐는 질문을 동반합니다. 산재보험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게 진정한 사회보험일까요? 산재보험의 높은 벽과 문턱 그 자체가 산재보험의 근간을 흔드는 것은 아닐까요?
그 높은 벽 중 하나를, 삼성 백혈병 싸움에서 적나라하게 보았습니다. 산재보험은, 노동자가 온전히 치료받고 건강하게 사회에 복귀해 이 사회를 지탱하도록 하는 취지를 담아, 노동자의 실수를 묻지 않는 무과실책임의 원칙을 취합니다. 그런데, 직업병에 대해서는 이상한 기준이 적용 됩니다. 일 때문에 병이 걸렸음을, 노동자에게 입증하라고 합니다. 만약, 회사에서 어떤 약품을 사용하는지, 일하는 공간이 노동자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우리 사회가, 혹은 노동자 스스로가 안다면, 그건 별 문제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업의 영업비밀을 보호한다는 강력한 이유로,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싸움의 8년 동안, 일을 했던 당사자들이, 전문가들이, 그 영업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고군분투 했습니다.
그 사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기업은 무조건 아니라고 잡아뗍니다. 그리고 그 일방적 주장이, 현재 직업병 불인정에 주요한 근거로 작동합니다. 묻습니다. 이렇게 어렵기만 한 산재보험은 사회보험이 맞습니까?
이번 조정위원회의 권고안은, 현행 산재보험의 이런 문제점을 짚어내고 있습니다. 삼성의 주장도 적극 수용해, 공익법인을 통한 적절한 조절을 제안했습니다. 이런 치명적인 제도적 결함으로 인해 피해본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며, 노동건강연대는, 삼성이 조정위원회의 권고안을 즉각 수용할 것을 촉구합니다. 삼성은 이 사회의 한 구성원이자 주요한 조직으로써, 그 사회적 책무를 다 해야 합니다.
더불어, 제도 시행 50년이 넘은 지금까지, 산재보험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는 정부도, 의미있는 사회적 토론을 통해, 이 땅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아픔을 끌어 안기를 바랍니다.
_삼성 직업병 문제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 노동건강연대 발언
(2015. 7. 30. 11시. 삼성전자 본관 앞)
삼성전자 직업병 조정 권고안에 대한 입장
삼성은 조정위 권고안을 수용하고,
직업병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라!
8년여 시간을 끌어 온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가 지난 7월 23일 조정위원회의 조정권고안 발표로 새로운 계기를 맞고 있다. 조정권고안은 그간 삼성이 고집하던 ‘선 보상, 후 대책’ 에 머물지 않고 직업병 문제 해결에 필수적인 세 가지 핵심 의제인 ‘사과, 보상, 재발방지대책’을 동시에 다루고 있어 다행스럽다. 그러면서도 몇 가지 아쉬운 부분은 있다.
먼저 조정위가 삼성에 권고한 공익재단 설립기금 1000억 원은 얼핏 많아 보이지만 사실상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반올림에 제보해 온 피해자만 200여 명에 달하고 제보하지 않은 피해자는 훨씬 더 많을 텐데, 한정된 기금에 억지로 맞추기 위해 일부 피해자들을 배제하거나 보상수준을 낮추는 것은 옳지 않을뿐더러 더 큰 문제를 증폭시킬 수 있다. 게다가 이 기금으로 재발방지를 위한 각종 대책 사업까지 수행해야 한다. 따라서 진지한 검토를 통해 안정적인 수준의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
권고안 중 사과 부분은 삼성의 책임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그 내용이 구체적이지는 못하다. 권고안이 기부를 통한 공익재단 형식으로 삼성의 직접적 책임을 상당히 덜어주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과’ 부분에서라도 분명하게 책임을 언급할 필요가 있었다.
재발방지대책에서 공익법인을 통해 유해화학물질에 대한 노동자 및 지역사회의 알 권리를 담고 있는 점이나 ‘옴부즈만 제도’를 도입해 삼성 내부의 자체적인 재해관리시스템을 점검하도록 한 점은 의미 있다. 그러나 이런 대책들이 온전히 실행되려면 삼성이 정보를 통제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공개해야 하는데, 이를 강제할 방안은 부족해 보인다. 삼성을 강제할 방안이 없는 한 옴부즈만 제도를 통한 시정 권고 역시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권고안의 옴부즈만 제도는 3인의 전문가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애초 반올림이 요구했던 노동자와 지역사회의 참여가 완전히 배제된 점은 큰 문제다. 유해물질에 의한 노출과 직업병은 항상적인 위험요인이므로 상시적인 현장감시가 이루어져야한다. 제3자에 의한 현장 감시 감독의 기능강화와 현장노동자의 참여가 가능한 기구 등을 구성하고 공익법인이 감사하는 형식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하며, 이는 향후 조정과정에서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할 사항이다.
이밖에도 여러 아쉬움이 남지만, 조정위가 삼성과 한국반도체산업협회의 기부 형식으로 공익법인을 설립하게 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비록 시민사회에서 그동안 요구해온 수준만큼 삼성에게 직접적인 책임을 지우지는 못하지만 직업병 보상과 재발방지대책이 삼성에 좌지우지되지 못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익법인이므로 그 사업의 성과가 삼성전자 노동자들에서 더 나아가 다른 반도체 LCD 노동자들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조정위가 제시한 안은 최소한의 기준일 뿐이다. 따라서 기본적인 취지에 대해서는 3자의 합의로 이번 권고안을 받아들이되, 동시에 부족한 부분을 개선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해야 한다.
‘반올림’은 7월 24일 성명을 통해 조정권고안에 대한 아쉬운 점을 지적하면서도 큰 틀에서 합의를 위해 노력하자는 입장을 먼저 밝혔다. 그런데 오히려 가해자인 삼성전자는 이번 조정권고안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만을 넌지시 내비칠 뿐, 책임 있는 태도는 찾아볼 수 없어 대단히 실망스럽다.
재계와 일부 언론은 이번 조정권고안이 ‘산재보험의 근간을 흔든다’, ‘경영권 침해 독소조항이 들어있다’는 식으로 매도하고 있다. 이는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만일 이것이 삼성의 언론플레이라면 무책임하고 비열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삼성은 조정위를 통해서 신속하게 직업병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한 사회적 약속을 지켜야 한다. 언제까지 피해자와 가족들의 고통을 연장할 것인가. 언제까지 재발방지대책을 미룰 것인가. 삼성전자는 사회적 책임과 국민들과의 약속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15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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