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백혈병 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교수·연구자·전문가 단체 성명서]
삼성은 조정위원회의 권고안을 수용하고 자체 보상위원회를 해체하라!
삼성전자 사업장의 백혈병 등 직업병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지 어느덧 8년이 지났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노동자의 생명 및 안전의 권리가 국내 최고의 글로벌 기업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이 문제에 대하여 아직도 올바른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때 늦긴 했지만 2014년 5월 삼성전자가 이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를 하고 “제3의 중재기구가 제시하는 안을 따르겠다”고 한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었다. 삼성전자와 가족대책위의 제안에 따라 조정위원회가 발족되었고, 동 조정위원회는 2015년 7월 사단법인 형태의 공익법인을 설립하여 보상과 예방대책을 실천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권고안을 제시했다.
삼성은 스스로 제안하여 구성된 조정위원회의 권고안을 수용하지 않고 갑자기 별도 보상위원회를 만들어 개별적 보상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지난 9월 3일에는 김OO 교수(연세대 사회과학대학), 박OO 교수(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박OO 교수(단국대 의과대학), 원OO 교수(연세대 의과대학) 등 4명의 전문가 위원을 포함한 7명으로 보상위원회를 발족했고, 뒤이어 보상위원회가 수립한 기준에 따라 보상 접수를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삼성과 가족대책위의 거듭된 조정 보류 요청으로 연기되었던 조정회의가 권고안 발표 이후 두 달만인 10월 7일 열렸지만 삼성은 조정위원들의 질문에 “모르겠다” “서면으로 답하겠다”는 등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며 또다시 조정위원회의 조정 보류를 요청했다. 삼성은 조정위원회를 무력화시켜 놓은 채 보상위원회를 통해 일방적으로 개별 보상을 추진했고 10월 21일에는 30명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삼성의 이런 행보는 실로 무책임하며 자기 모순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삼성의 이러한 태도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이번 조정위원회는 관련 이해당사자들의 합의하에 구성된 제3 주체로 하여금 삼성 직업병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자는 사회적 약속에 따른 것이었다. 공적 조정과 달리 사적 조정은 당사자들의 동의하에 구성되는 조정위의 권위와 그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당사자 중 일방이 독단적으로 조정 진행을 보류하고 개별적 행동을 취하는 것은 그러한 사회적 신뢰를 뒤집는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해당사자들은 조정위의 조정안에 대해 당연히 이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견은 조정 절차 안에서 밝히고 논의해야 마땅하다. 현재 삼성이 별도로 보상위원회를 구성하고 개별적 보상을 추진하는 것은 백혈병 등 직업병 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기대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신뢰와 자신의 사회적 약속을 저버리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조정의 세 의제인 보상, 사과, 재발방지 이슈를 분리하여, 결국 재발방지는 외면한 채 보상 문제로 의제를 국한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글로벌 초일류기업의 행동으로는 너무 속 좁은 짓이다.
이러한 판단과 평가를 토대로 우리는 아래 세 가지 사항을 촉구하는 바이다.
첫째, 삼성은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보상위원회를 해체하고 보상은 물론 사과, 재발방지책 등 세 가지 의제 모두를 조정위원회에서 논의해야 한다. 조정위원회의 권고안은 삼성 스스로 제안하여 구성된 조정위원회에서 오랜 기간의 합의과정을 통해 도출된 것으로서 삼성 직업병 문제의 해결을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다. 이 안에 대해 임의로 보류를 요청하고 개별적 행동을 하는 것은 자신의 약속을 스스로 파기하는 것이다. 삼성은 피해자들과 시민사회가 신뢰할 수 있는 3인 이상의 옴부즈만에 의한 종합진단 등 재발방지 대책을 제안한 조정위원회의 권고안을 즉각 집행할 것을 거듭 촉구한다.
둘째, 삼성의 보상위원회에 전문가 위원으로 위촉된 네 분의 연구자들은 보상위원 직을 자진 사퇴해야 한다. 우리는 네 분의 연구자들 모두 직업병 피해자에 대한 보상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길 바라는 취지에서 참여했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보상위원회가 구성된 맥락을 보면, 이는 삼성이 조정위원회를 무력화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개별 보상을 추진함으로써 삼성 자신의 사회적 약속을 파기하고 결국 진정한 재발방지책 수립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동원된 수단에 불과하다. 게다가 개별 보상 과정에서 “일체의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합의서와 관련한 모든 사실을 일체 비밀로 유지”한다는 수령확인증 서명을 요구했다는 의혹마저 일고 있다. 따라서 전문가 위원으로 위촉된 연구자 분들은 지금이라도 보상위원회에서 사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 조정위원회는 문제 해결을 위한 강력한 의지와 단호한 행동을 보여 주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사적 조정은 당사자 일방이 약속을 깨고 나가 무책임한 행동을 취하더라도 마땅한 제재수단이 없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삼성 직업병 문제의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의 활동은 사회적 약속에 따른 것이며 전 국민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따라서 삼성에 의한 조정위원회의 무력화는 물론 조정위원회의 침묵 또한 사회적 약속에 대한 배신으로 단죄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정위원회는 하루빨리 국민들에게 교착된 현재 상황을 정확히 알리고 사회적 약속을 파기한 주체들의 책임을 물음으로써 자신의 위상과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2015년 11월 9일(월요일)
삼성의 백혈병 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30개 교수·연구자·전문가 단체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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