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탄올 피해 노동자 전정훈씨 인터뷰가 작은책 2017년 11월 호에 실렸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신호등이 안 보였다. 

정인열 / 기자

인터뷰 : 전정훈

 토요일 아침, 일어나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눈도 침침했다. 단순한 몸살이라고 생각했다. 어서 출근해야 한다. 남들은 주 5일 근무라고 토요일에 쉰다지만 그에게는 평생 남 얘기였다. 그래도 평소보다 일찍 끝나는 날이니까 몇 시간만 일하고 오면 된다는 생각에 출근을 했다. 점심때가 되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몸살이 심해졌다. 조퇴를 신청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그런데 신호등이 안 보인다. 색깔도, 형체도. 집에 겨우 도착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전정훈 씨. 2016년 1월 16일 토요일, 그렇게 쓰러진 그날 이후로 그는 영영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의사는 시신경염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 시각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휴대폰 문자를 크게 확대하고 눈에 가까이 가져가면 흐릿하게 보인다. 발병 전 그의 시력은 두 눈 모두 1.0이었다. 그는 이제 서른여섯 살이다. 


“의사가 메탄올 중독이 의심된다고, 회사에 전화해서 물어봤대요. 

회사는 사용한 적 없다고 했고요.”


 그러나 회사의 대답과 달리 원인은 메탄올 중독이었다. 메탄올(또는 메틸알코올)은 증기 흡입 및 섭취, 피부 접촉 등 기준치 이상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실명되거나 뇌손상 및 사망에까지 이르는 독성 물질이다. 

 전 씨와 담당 의사가 원인을 알게 된 것은 8개월이 지난 뒤였다. 전 씨의 친척이 언론 보도를 보고 직업병이 의심된다며 노동 상담을 권유했다. 알고 보니 그 말고도 비슷한 작업 환경에서 똑같은 증상으로 실명되고 뇌손상을 입은 사람이 다섯 명이나 더 있었다. 모두 20대 청년들이었다. 이미 언론 보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전 씨는 이조차도 몰랐다.  


“의사가 골든 타임을 놓쳤다고 했어요. 

원인을 알았으면 치료방법도 달랐을 거라고….”


 그는 인천의 남동공단에 있는 ‘BK테크’에서 일했다. 삼성, 엘지 스마트폰 부품을 만드는 3차 하청업체였다. 컴퓨터 수치제어 기계(CNC)가 금속을 깎으면 그 부위를 세척하고 열을 식히기 위해 메탄올이 대량 분사됐다. 그는 하루 12시간 7~10대의 CNC를 동시에 작동시켰고 바로 앞에서 작업을 했다. 부품이 다 절삭되면 에어건으로 메탄올을 말렸다. 메탄올이 바닥나면 커다란 드럼통에 담긴 메탄올을 말통에 옮겨 담아 기계에 넣었다. 그리고 그는 넉 달 만에 실명됐다. 전 씨를 포함한 실명 피해자들의 작업 환경은 모두 같았고, 법정 노출 기준의 최소 5.5~10배 이상에 노출됐다. 회사는 그 액체가 메탄올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유해성과 위험성을 알려 줘야 하는데 지키지 않았고 안전교육도 하지 않았다. 송기마스크를 지급해야 하는데 1회용 마스크를 지급했다. 보호 장갑이 아닌 목장갑을 지급했다. 환기구는 없었고 보안경, 보호복, 보호 장화도 지급하지 않았다. 그것이 법 위반인지 전 씨는 알 길이 없었다. 1차 책임자인 사장을 그는 일하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파견업체와 근로 계약을 맺은 비정규직이다. 생산직은 파견이 금지된 업무다. 이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파견업체와 사장은 말하지 않았다. 그가 불법 파견 비정규직으로 일한 회사는 BK테크가 처음이 아니다. 그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산직으로만 일했다. 그동안 8개의 직장을 다녔고, 직접고용 정규직인 경우는 단 한 번이었으며, 임금을 보전하기 위해 하루 12시간 넘게 일을 했고, 토요일에도 일했다. 

 그는 왜 비정규직과 최저임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을까? 왜 산재까지 당했을까? 이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이었을까? 그가 살아온 삶을 들어 보면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부모는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이혼했다. 어머니는 아무 예고 없이 사라졌다. 


“가장 예민하던 때였어요. 그게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아요. 

딱히 별로 되고 싶은 것도 없었어요.” 


 아버지가 그와 남동생을 양육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집안 살림을 했다. 넉넉치 않은 집안 사정에 돈을 버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학교에서 용접과 배관 기술을 배웠지만 막상 그 기술로는 취업할 곳이 없었다. 초보자는 받아 주지 않는 현실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수입만으로는 집안 경제가 빠듯했다. 특별한 기술 없이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생산직 일자리밖에 없었다. 고교 졸업 후 대우냉장고 압축기를 만드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군대에 다녀온 후에는 조금 규모가 큰 자동차 부품회사에 들어갔다. 쇠파이프를 밴딩 기계에 넣어서 구부리는 일이었다. 파견 비정규직이었고 3~4년을 근무했지만 회사가 부도나서 그만두어야 했다. 그리고 친구 소개로 선박 엔진 공장에 들어갔다. 엔진을 닦고 페인트를 칠하는 일이었다. 여전히 최저임금이었지만 정규직이었고 4대 보험도 가입됐다. 1~2년 일했지만 회사가 먼 곳으로 이전해서 출퇴근이 불가능했다. 다시 파견업체를 통해 휴대폰 부품 생산업체로 이직했다. 9개월을 일하다 사람 관계가 힘들어 통신 케이블 제조 공장으로 옮겼다. 역시 파견 비정규직이었다. 

 2013년경에는 화장품 포장업체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후 ‘대성컴퍼니’라는 파견업체를 통해 핸드폰 염료 공장을 들어갔다. 핸드폰 케이스를 염색통에 넣었다 빼는 작업이었다. 일한 지 7~8개월 즈음 회사는 일이 없다며 잔업부터 없대더니 결국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2015년 가을, 구직 중이던 그에게 대성컴퍼니에서 ‘괜찮은’ 일자리가 나왔다며 연락이 왔다. 그의 시력을 앗아간 ‘BK테크’였다. 

 산업재해도 대물림되는 것일까. 그의 아버지 역시 남동공단 노동자였다. 철근 공장에서 일하던 그의 아버진느 10년 전 산업재해로 사망했다. 옷이 절단기에 말려 들어가면서 팔목이 잘렸고 경추도 부러졌다. 그러나 응급조치를 제대로 받지 못해 사고 두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대에서 산재가 끝날 줄 알았죠. 

그게 저한테 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얼굴도 몰랐던 사장은 그의 동생을 만나 합의를 종용했다.


“산재보험도 가입이 안 되어 있으니 합의금밖에 없다고, 

자기도 피해자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350만 원에 합의했다. 다행히 이후 노동건강연대를 만나 도움을 받아 산재 승인은 받았다. 피해자들은 사장을 파견법 위반으로 고소했지만 사장은 벌금 100만 원 처벌에 그쳤다. 법정 구속도 없었다. 사장은 아직도 그에게 공식적인 사과와 진심을 담은 사죄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왜 다른 직업을 알아보거나 직업 훈련을 받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러면 실명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최저임금이 지금처럼 많이 올랐더라면, 

뭔가 다른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받은 최저임금으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잠자고 나면 출근해야 하니까. 계속 일해야 했으니까.” 


 그렇다면 학교에서 교육을 제대로 했다면 어땠을까. 학교는 어떤 것을 가르쳐 주었고 어떤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나. 


“오로지 실습만 가르쳤어요. 

파견업체니, 비정규직이니, 산업재해니 아무 교육이 없었죠.”


 산업안전보건법도, 산업재해와 체불임금 대처법도, 사회보험 가입 의무도 그에게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정보가 없던 그는 아는 한도 내에서 스스로 판단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의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생산직, 비정규직, 최저임금, 장시간 노동, 사회보험 미가입. 그는 여가 생활도 없이 최선을 다해 일만 하며 살았다. 일요일이 되어서야 밀린 잠을 잤다. 그가 실명 전 마지마으로 영화를 본 게 2004년이다. 

 시력을 잃은 후 그가 가장 견딜 수 없는 상황은 바로 신호등 앞에서다.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것 같아요. 

실제로 쳐다보는지 알 수는 없어요. 

그런데 초록불일 때도 제가 그대로 서 있으면 쳐다보겠죠. 

그냥 못 본 척했으면 좋겠는데…” 


 그는 이번이 마지막 인터뷰라고 했다. 인천지법 판견을 보고 언론에 나가 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제빵사가 되고 싶었어요. 

공장 그만두고 나면 제빵 기술을 배우려고 했는데… 

이제다 소요없는 일이죠.” 


 이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일까, 한 번 더 되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