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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화 이후 더 많은, 더 좋은 탈핵을 이야기하기
김현우 /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부소장
1. 공론화 결과의 의미 해석
문재인 정부가 집권 초반부터 ‘탈핵과 탈석탄’을 중심으로 하는 에너지 정책을 들고 나오면서 많은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진정성 또는 에너지전환의 수준에 대한 의구심도 존재하지만, 이는 70년대 이래 산업화와 함께 이를 뒷받침할 ‘저렴한 에너지의 안정적인 공급’을 기조로 해 온 한국의 에너지 정책에 전례 없는 변화를 의미하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 변화는 그동안 탈핵을 외쳐온 사회운동뿐 아니라 관련 산업계, 언론, 정치권 모두에 상당한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이 탈핵의 전부도 아니고 공론화도 하나의 부분적 수단일 뿐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진행된 공론화 과정은 탈핵의 도정에서 큰 기회와 함께 도전을 제기했다. 조기대선 기간에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백지화와 함께 공정률이 90%를 넘은 신고리 4호기, 신울진 1,2호기의 완공 여부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결정하자고 했던 후보 시절의 발언에 비추어 볼 때,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 후퇴한 것이 분명하고 정부의 정치적 부담을 시민에게 떠넘기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공론화위원회가 주관하는 3개월의 과정 동안 신고리 5,6호기 건설 문제뿐 아니라 핵발전과 관련한 전반적인 쟁점들, 나아가서 온갖 에너지 이슈들이 다루어지는 것 자체가 한국 에너지정치에서는 매우 큰 계기였다. 하지만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는 시작부터 몇 가지 우려도 존재했다. 무엇보다 탈핵 의제가 신고리 5,6호기 찬반으로만 좁혀지는 프레임 효과가 있으며, 충분하지 않은 시간과 ‘숙의’를 보장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공론조사의 결과에 따른 시비와 해석 논란이 찬반 양측 모두에서 제기되었다.
어쨌든 471명 시민참여단의 최종 의견조사에서 장기적 탈원전에는 53%가 찬성하지만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에 59.5%가 찬성(건설중단은 40.5%)한다는 결과는 탈핵진영에게 참패로 다가왔고 내부적으로 큰 상처를 남겼다. 이는 정부의 정책을 탈핵운동 진영이 대리하여 정당성을 방어해야 하는 기묘한 구도에서 비롯한 문제도 있지만, 찬핵과 탈핵 진영 사이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운운하기에는 탈핵 진영의 전반적 역량과 전략이 미흡했던 점을 직시해야 한다.
앞으로도 에너지정책의 수립과 집행에서 더 좋은 구성과 방식의, 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이루어지는, 그리고 열려 있는 논의와 결론을 요청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최선의 공론화를 통하더라도 그 자체로 탈핵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역으로, 대통령 개인의 의지나 국회의 의결이나 법안이나 정당의 활약이나 수만 명의 집회 시위를 통해서만 탈핵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닐 터다. 이번 공론화 과정과 결과는 대체로 시민사회의 탈핵–에너지정치 현재 역량을 일정하게 반영하는 것이며, 찬핵과 탈핵 진영 모두의 윤곽과 실력을 드러내었다는 점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에너지전환은 어떻게 오는가?
‘탈핵’은 에너지전환의 일부이며, 에너지전환은 에너지 공급원(에너지믹스)의 변화 뿐 아니라 에너지 이용 방식의 변화 그리고 이와 관련한 물리적 기반시설과 제도의 변화, 나아가서는 에너지와 관련된 경제와 주체의 변화까지를 포함한다. 지금 정부가 언급하는 에너지전환은 우선 에너지원에서 화석에너지와 핵에너지 비중을 단계적으로 줄이거나 퇴출시키고 재생가능에너지로 대체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 물론 그 퇴출 또는 대체의 속도 또는 비율은 다양할 수 있다.
오래 전부터 에너지전환 운동을 주창해 온 이필렬 교수에 따르면, 에너지전환의 성패를 좌우할 요소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는 정부의 의지와 구상,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에너지전환 절차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수십 년 이상이 걸리는 에너지전환을 보장할 수 없고, 중간에 탈핵 경로를 이탈하거나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나라들도 여럿 있었다. 때문에 둘째, 전력수요 자체의 감소 또는 정체, 그리고 셋째, 재생가능에너지 보급의 급격한 증가가 함께 달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통해 에너지전환이 물리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기정사실화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넷째, 에너지전환에 대한 높은 국민적 공감대와 이러한 인식의 세대 전승도 필요하다.
한국의 경우에 문재인 정부의 탈핵 의지는 분명해 보이지만, 핵발전 총량의 절대적 감소와 탈핵의 페이스 또는 시점은 열린 문제로 남아 있다. 노후 핵발전소들을 서둘러 폐쇄한다고 해도 현 정부 내에 핵발전의 총 설비용량은 되려 크게 늘어날 것이고, 신고리 5,6호기까지 완공되면 최신 핵발전소의 설계수명을 60년으로 단순하게 계산할 경우 한국의 탈핵 시점은 최대한 2082년까지 연기될 수 있다. 탈핵 정책을 보완할 로드맵과 전력요금 제도와 조세제도, 전력산업 구조 개편 같은 과제들도 산적해 있다.
에너지 수요 감소나 조절의 측면에서 보면, 한국은 산업 부문을 포함하여 전력수요 증가세가 이미 둔화되고 있으며, 당분간 전력예비율에 여유가 있을 뿐 아니라 발전설비의 총용량 보다 계절별 시간대별 피크 관리가 더 중요하다는 점에서 에너지전환에 더없이 좋은 기회다. 물론 LNG 발전의 비중 확대와 전기요금 인상의 필요성에 대해서 부인만 할 게 아니라, 이 역시 적정 수준과 방식의 설계와 함께 설득과 공감 형성의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
재생가능에너지의 보급 확대는 기술 개발과 경제성만을 놓고 보면 단지 시간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풍력과 태양광 발전 입지에 따르는 사회적 갈등을 예방하고 지혜롭게 해결하는 과제도 중요하며, 공기업과 민간 부문 그리고 시민 영역의 적절한 역할 배분과 협력도 필수적이다. 에너지믹스의 변화가 여전히 국가 독점의 중앙집중형 체제에 머물거나 대기업들이 이윤과 성장 위주로 에너지 시장을 분점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면 에너지전환의 의의는 반감될 것이다.
한편 에너지전환에는 시민(사회), 정치(사회), 경제적 조직, 여론, 시장 상황 등이 모두 개입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전환의 당위성과 주체 형성의 당위성만을 주로 언급해 온 것이 사실이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과정과 결과를 놓고 보면서, 이제는 에너지 전환의 주체 전략을 매우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당위론과 도덕론을 넘어서, 에너지 민주주의의 주체 측면에서 각 집단의 입장 차이와 연대의 물질적 근거와 조직 및 행동을 논의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제까지 정부–시장–시민사회라는 삼각 구도로 단순화했던 것을, 좀 더 세분화하여 입장과 기반을 파악할 필요도 있다. 이에 따라 각 집단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드러나며, 이를 기반으로 전환의 주체적 정치 전략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매우 자의적인 그림으로 예시한 ‘탈핵–에너지정치의 지도’의 주체들은 그 위치와 외연을 특정하지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