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적인 더위입니다.
1994년 여름, 서울의 소문난 부촌 평창동에서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부자 동네라고 골목길에 에어컨이 나오거나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된 건 아니더군요. 간간이 창문을 굳게 닫은 승용차만 지나갈 뿐, 인적을 찾을 수 없는 높다란 언덕길을 하염없이 걸어 올라가면서, 사람이 더워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처음 했었습니다. 그나마 저는 명함을 내밀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건설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후배는 그야말로 매일이 탈진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런 더위 속에서 일하는 게 ‘직업’이었던 이들이 그 시기를 어찌 보냈는지, 당시에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올해 더위는 그 때를 넘어서는 것 같습니다. 에어컨을 설치하고, 물건을 배달하고, 건설 현장에서 조선소에서 야외 작업을 하고, 또 비닐하우스에서 양계장에서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부디 큰 피해 없이 이번 여름을 보내기를 기원합니다.
이번호 기획 특집은 ‘우리 곁의 이주노동자’입니다.
2000년대 초중반 서울의 성수동이 지금처럼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기 전, 당시 노동건강연대 사무실 근처에도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단체들과 함께 건강실태조사를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노건연이 기업살인법 제정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이주노동자 지원활동은 줄어들었는데요. 그동안 산업연수생 제도를 거쳐 고용허가제가 도입되었고,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지역이나 분야도 대폭 넓어졌습니다. 이주노조도 합법화가 되었구요. 그런데 작년 국정감사에서 이주노동자의 산재 발생률이 내국인의 6배라는 통계를 보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노건연이 이주노동자들과 한 발짝 떨어져 있었는데,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해졌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그간의 ‘발전(?)’을 짚어보고 앞으로의 과제를 토론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이주노동자의 현황을 정리하고 고용허가제도의 문제점, 이주노동자의 노동안전보건 실태와 의료보장 문제를 살펴본 후, 마지막으로 이주노조 활동가들과의 대담을 정리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는 우다야 이주노조 위원장의 지적에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민주노총 지역본부들이 ‘투투버스’에 보여준 연대에 그나마 고개를 들 수는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이주노동자 이야기는 ‘문송면 30주기 특별대담 – 노동자가 되지 못한 노동자’에서도 이어집니다.
수은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다 열다섯 살에 세상을 떠난 문송면처럼, 아직 노동자가 되지 못한 노동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주노동자, 장애인 노동자, 현장실습 학생들이 오늘날 처한 현실을 들어보고, 이 문제의 타래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함께 고민해보았으면 합니다. 또한 문송면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태어난 노동건강연대 정우준 활동가가 ‘문송면?원진노동자 산재사망 30주기 추모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느낀 소회를 담기도 했습니다.
가습기살균제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독성계란, 발암물질 생리대, 이제는 라돈침대에 이르기까지 환경보건 이슈가 매우 뜨겁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떠한 전략으로 대응해야 할지 노동보건과 환경보건계의 올라운드 플레이어 노동환경연구소 김신범 부소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이 주제의 연장선 상에서, 최근 삼성전자의 작업환경측정 보고서 공개 논란에 즈음하여 열린 산업보건학회 특별세미나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노동자의 알권리’ 발제 부분을 지상중계석에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최근 유독화학물질이 들어간 페인트 제거제를 판매장에서 내보낸 미국의 시민운동 성공 사례를 소개합니다. 노동, 환경, 기업의 책임, 노동자와 시민의 알 권리, 건강권, 정부의 책무성에 대한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글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노건연에 새로 합류한 한지훈 활동가의 영화감상기를 실었습니다. 공학도의 눈으로 바라본 SF 영화는 어떠할지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7월 중순에 발행하려던 ‘노동과 건강’ 여름호가 한 달 넘게 지연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정신없이 가을호 준비를 서둘러야 할 상황입니다. 이렇게 발행이 늦어지는 동안,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노건연이 지난 10년 동안 꾸준하게 요구해왔던 기업살인법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발의한 의원이 바로 그였습니다. 지면을 통해서, 그리고 이미 늦었지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평생 노동자와 인간 해방을 위해 헌신했던 노회찬 의원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김명희 / 노동과건강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