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레이온 직업병, 과거가 아니라 오늘이다
청춘을 바친 일터가 준 직업병으로 보내는 고통의 나날

이현정(nolza21) 기자

지난 4월 28일은 ‘세계산재사망노동자 추모의 날’이었다. 일하다 다치거나, 사망하는 노동자를 추모하며 작업장의 안전과 노동자 생명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날이다. 1988년 문송면(당시 15세)군 직업병 사망에 이은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집단 중독은 우리나라에 산업재해 피해의 심각성을 알려준 계기였다. 4월 28일을 맞아 (우리나라에서 직업병 1호 판정을 받은) 원진레이온 직업병 노동자들이 현재도 겪고 있는 고통과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의 중요성을 나누고자 한다. <기자 주>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원진레이온 직업병 인정투쟁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노동안전보건운동 역사의 한 페이지였던 그 투쟁을 알고 있는 젊은 노동자는 얼마나 될까?

원진레이온. 군부독재정권 박정희 대통령이 공장 기공식에 참여할 정도로 1차 경제개발 역점사업의 하나였던 인조견사 생산 공장 원진레이온(설립 당시 이름은 ‘흥한화학섬유’)은 경기도 미금시 도농동의 19만평 부지에 세워졌다. 두 번의 공장 이름 변경과, 몇 차례의 부도와 법정관리를 받은 원진레이온은 씁쓰레한 공장의 이력만큼 노동자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 곳이었다.

이곳에서 10년, 20년을 일한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이황화탄소 중독’이라는 직업병에 걸린 것이다. 그 문제가 불거진 1988년부터 지금까지 사망이 아니고서는 ‘고통’을 벗어날 수 없는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지금도 이황화탄소 중독과 합병증으로 그들 스스로 표현한 것처럼 삶이 아닌 지옥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는 환자들

실이 나오는 기계를 조립하고 망가진 것을 교체하는 정비과에서 24년을 일한 강한성(69) 환자는 구리 원진 녹색병원에 입원해 있다. 한 수저를 먹어도 다 토하는 증상 때문에 밥을 거의 먹지 못한다. 강씨를 간병하는 간병노동자가 옆에서 “살이 많이 빠졌다”는 말을 보탰다. 등창이 심한데다 팔다리에 마비가 와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한다.

강한성 환자는 “속이 답답하고 눈은 침침하고 귀에서 고름이 나오고 밥을 못 먹었다”며 “시골로 가서 요양도 해봤지만 소용 없었다”고 중독 증세가 나타났던 당시 상황을 힘겹게 이야기했다.

같은 병원 다른 병실에 있는 김평길(67) 환자는 14년째 병원 생활 중이다. 원액을 녹여서 보내는 원액과에서 15년을 일했는데 냄새가 너무 심해 항상 머리가 아팠다고 한다. 지금은 말을 거의 할 수 없는 상태라 옆에서 간호하는 아내가 통역을 하다시피 했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을 못 자 앉아서 산다”며 환자 상태를 설명한 아내 박영림(63)씨는 “주사를 하도 놔 이제는 혈관을 찾을 수가 없고 고통이 심해 계단에 가서 떨어져 죽는다고 하는 것을 ‘아들 장가가는 것 보고 가라’는 말로 달래서 데리고 오는 적도 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환자가 정신을 놓으면 불시에 폭력도 가해지는데 “죽으면 못 때리는데, 살아 계신 것만도 고맙다”며 맞아도 오히려 그것이 다행이라는 아내는 “그래도 내가 인상 쓰면 아저씨가 더 힘들 것”이라며 즐겁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1978년부터 1988년까지 10년을 방사과에서 일한 장석봉(53) 환자는 하루 4번, 6시간마다 복막 투석을 한다. 신장이 안 좋아 요독이 쌓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막 투석을 한 지가 10년 되었고, 그전에는 5년간 혈액 투석을 했다. 장기간 혈액 투석으로 혈관이 비대해져 복막 투석을 하는데, 염증이 생기면 복막염이 될 수 있어 늘 조심에 조심을 기울인다.

군대 제대 후 바로 원진레이온에서 일했는데, 자고 나면 손발이 붓고 나른하고 피곤한 것이 오후는 가야 풀렸다고 한다. 소변에서 거품이 나고 얼굴이 붓고 몸이 너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아무래도 일하면서 얻은 병 같으니 일단 일을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사 말을 듣고 원진레이온을 퇴사했다.

병원에 다니던 중 신문과 방송에서 하는 원진 얘기를 접하고서야 자신이 직업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몸이라도 건강하면 한창 일할 나이인데…”라며 말을 흐리던 장석봉 환자는 “죽고 싶은 마음에 수면제를 모아 놓기도 했다”면서 힘겨운 나날을 들려 주었다.

키도 훤칠하고 미남형인 정재선 환자는 공장에서는 성실한 노동자였고, 집에서는 아내가 다림질을 한 적이 없을 정도로 가정적인 가장이었다. 하지만 이황화탄소 중독은 그의 젊음과 단란했던 가정에서 웃음을 앗아갔다.

간병 때문에 은행도 못 가고 밖에 꽃이 피는지도 모른다는 아내 여춘자(65)씨는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간호를 안 할 수가 없어 못 간다”면서 이야기 내내 눈물을 흘렸다.

아내는 “쓰러지고 나서는 생전 안 하던 욕을 하고 싸움도 해 병원에서 쫓겨나기도 했다”면서 “직업병으로 쓰러진 이후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삶이 지옥에 있는 것 같다”고 간병의 힘겨움을 토해냈다.

환자의 고통, 가족의 절망

원진레이온에서 일했던 노동자 중 직업병이 인정된 노동자는 모두 913명이다. 20년 세월 속에 100여 명이 사망했고, 고칠 수 없는 병을 뜻하는 ‘폐질환자’가 또 100여 명이다. 거동이 가능하더라도 자포자기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분들도 많다는 것이 원진산업재해자협회 관계자의 전언이다.

10년이 넘는 직업병 고통이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을 가져와 자기학대나 자살 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환자를 돌보는 가족도 고통의 나날을 보낸다. 24시간 옆에 붙어 있어야 해 외출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이는 대인관계 단절을 가져와 간병하는 가족이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

10년 전, 20십 년 전부터 시작한 간호로 몸도 마음도 지쳐있다. 실제 만난 환자의 아내들은 가슴에 있는 응어리를 풀어내듯 말을 쏟아냈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직업병 보상금을 주었으니 내 할 일은 다 끝났다는 듯 이들을 외면한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현실을 무시하는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원진레이온 직업병 환자와 그 투쟁은 20년 전 ‘그런 일이 있었다’로 그칠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다. 직업병이 한 인간에게 그리고 가족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사회의 손실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는 ‘지금도 계속되는’ 역사이다.

해마다 4월 28일이면 세계의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고통당하거나 사망한 노동자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가진다. 그것은 산재의 고통을 과거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거울로 삼아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어지도록, 적어도 그 수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려는 ‘현재’의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