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멀다하고 노동자 사망 소식이 들립니다. 그 이면에는 기업의 탐욕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위험을 방치해 사람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기업 말입니다. 매년 사고로만 1천명의 노동자가 죽습니다. 사라지는 생명의 숫자는 쉬이 줄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남겨진 유가족이 있습니다. 자식을 잃고, 형제자매를 잃은 그 분들의 눈에 보이는 현실은 어떨까요?
슬프지만 목도해야하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시간, 위로의 마음을 담아, 유가족이 많아지는 세상을 멈추자는 마음을 담아 함께 해 주세요.
이야기를 나눈 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대표와 함께 그 해법을 모색하는 시간도 있습니다.
* 자료집 :
유가족과 함께 하는 기업처벌법 이야기한마당
: 2월 20일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
오늘 이 자리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연대가 마련한 자리구요, 유가족과 함께 하는 기업처벌법이야기 마당입니다. 다 아시겠지만 김용균 투쟁 이후에 산업안전보건법 전부 개정안이 이 통과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많은 사람이 노동자의 건강과 삶이 생명이 지켜질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 이후로 이 자리에서 산업안전보건법 평가에 대해서는 여러 노동안전 단체가 아직도 부족하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여전히 산업안전법보건법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해야겠지만 동시에 기업이 노동자를 죽이는 건, 시민을 죽인 것 살인이다 원칙 아래에서 기업의 대한 책임과 처벌을 강화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문제의식을 이어받아서 기업살인법, 한국에서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라고 입법발의가 되기도 했는데요, 그 법을 어떻게 해야 우리 사회에서 만들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는 중요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 자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노동재해로 사망한 사람을 잠시 기억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한 해에 2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노동재해로 사망한다고 합니다. 그분들을 기억하고 노동이 안전하고 노동자들의 삶이 존중되는 사회를 꼭 만들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모두 묵상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참여한 사람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앞에 계신 분들을 봤을 것 같습니다. 가족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다른 사람들이 이런 아픔을 겪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뛰어다니고, 진실을 알리고, 진실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던 분들입니다. 소개를 드릴 때마다 따뜻한 박수로 맞아주길 바랍니다. 고 황유미님 아버님 황상기 어르신입니다. 현장실습생으로 이었고, 그 사망이후에 현장실습의 문제를 제대로 드러내면서 싸워 오신 고 이민호 군 아버님 이상영님, 그리고 우리나라 노동자 건강권 투쟁의 길을 열어 오신 분들입니다. 원진레이온 노동자인 원진산업재해자 협회 박민호님, 지금은 한빛미디어센터를 만들어 방송계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고 이한빛 피디의 동생인 이한솔님입니다. 작년 12월 11일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지만 그 이후로 외주화 문제를 드러내고 새로운 싸움을 해 오신 고 김용균님의 어머니 김미숙님을 모십니다.
태안화력의 산재피해자이고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건강권을 위해 싸우고 있는 분, 김법남님이 이 자리에 계십니다. 그리고 앞서 소개드렸던 이민호 군의 어머니, 진천CJ에서 현장실습을 하다가 사망한 김동준님, 그 분의 어머니 강석경님이 이 자리에서 함께 하고 계십니다. 군포고 현장실습이었고 성남 토다이에서 일하다 돌아가신 고 김동균님 아버님 김용만님도 이 자리에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현장실습생 유가족분들은 현장실습생 유가족 모임을 별도로 만들어 현장실습생 제도를 만들고 바꾸어 노동자 권리, 학생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힘을 모으고 계십니다.
어떤 사고로 가족이 목숨을 잃었는지, 그러나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그리고 고용노동부 태도가 어땠는지 이런 내용을 증언해 주실 겁니다. 그것을 통해서 왜 우리 사회에 기업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이 필요한지를 이야기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유미는 2003년에 고3이었습니다. 고3이었을 때 산업보건교육이나 아니면 노동에 대한 교육은 전혀 받지 않은 상태에서 삼성반도체 공장에 취업 했습니다. 2003년 10월부터 2005년 6월 초까지 반도체 공장 3라인 다녔습니다. 여기 다니다가 2005년 6월에 2인 1조 반도체를 화학약품에 담갔다 뺐다 하는 작업을 하다가, 둘이서 작업을 하다가 둘 다 똑같이 급성골수성백혈명이 걸려 사망했습니다. 치료를 받는 도중에 유미에게 물어보니까 반도체를 화학약품에 담갔다 뺐다 하는 일을 반복해서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는 상식이나 지식이 별로 없어서 화학약품에 일하다 백혈병에 걸렸으면 관련이 상당히 있을 것 같아서 삼성직원에게 물었습니다. 반도체를 화학약품에 담갔다 뺐다 하는 작업을 하다가 병에 걸렸으니 산업재해를 인정해 달라고 얘기했습니다. 산재보험에서 치료비와 생활하는 동안에 자금이 일부 나오니까 그걸로 치료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고 말을 했는데 직원이 하는 말은 반도체 공장에서는 화학약품이 쓰지도 않고 취급하지 않았다고 아예 없다고 딱 잘라 얘기했습니다. 유미는 썼다고 얘기하는데 회사는 안쓴다고 얘기하고 참 이상한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사 말은 안 듣고 유미 말을 듣기로 했습니다. 유미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분명히 화학약품에 의해 병이 걸렸을 것 같은데 공장에서 나온 직원은 화학약품을 안 쓴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유미가 죽었습니다. 2007년 3월 6일 유미가 사망을 했고 6월 6일 평택근로복지공간에 가서 산재 신청 했습니다. 6월 30일 근로복지공단 차장이 진술하라고 해서 진술하러 갔습니다. 평택에 있는 근로복지공단에 있는 진술을 하러 갔는데 차장은 이렇게 앉아 있고 저는 이렇게 앉았다. 제가 사는 곳은 속초고 유미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반복해서 일을 하다가 같이 일하는 사람과 똑같이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죽었고 제가 아는 사람만 5명이 있고, 제가 내 동생이 사는데 그 옆에도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죽은 사람이 한 명이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직원이 옆에 있던 사람이 뭉치가 있는데 한 장을 빼서 들어보다가 유미는 다른데서 스티커 일하다 3라인에서 3개월만 일했다고 삼성에서 서류를 올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건 삼성이 거짓말로 올린 거고 실질적으로 유미가 3라인에서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병에 걸릴 때까지 일을 했다고 말을 하니까 근로복지공단 차장이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책상을 팍 치면서 겁을 주는 겁니다. 삼성이라는 대기업에서 백혈병 걸려 몇 사람 죽었다고 해서 거짓말 서류 꾸미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나를 겁을 주었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실제로 2003년 10월초부터 2005년까지 일을 했다고 다 얘기를 했는데도 이 사람이 내말을 듣지 않고 자기 얘기만 했습니다. 아무리 애길 해도 통하지 않는 겁니다. 삼성에서 올려온 쪽지 한 장만 계속 얘기만 하고. 얘기하다 얘기가 되지 않고 집에 왔어요.
집으로 왔는데 유미가 살아 있을 적에 유미가 같이 일했던 애들하고 유미가 전화 통화도 하고 문자도 했는데 유미가 일했던 공장을 다시 고친다, 그 안에 작업을 다시 한다는 그런 얘기를 수도 없이 전해온 거거든요. 유미한테 얘기를 들어보면 그 안에서 너무 더워 마스크 벗어 일하다가 혼난 적이 몇 번 있다고 얘길 해요. 2007년 9월 1일 역학조사를 하러 들어갔고 저는 참관인으로 들어갔습니다. 유미는 칸막이 시설이 없다고 했는데 칸막이시설이 다 되어 있고. 유미는 덥다고 하는데 이렇게 서 있으면 살갗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그런데 서늘하게.. 환기를 아주 잘 해 놓고 역학조사를 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삼성 직원들도 있고 그런데 다 마스크 쓰고 방진복 입고 그래서 누가 누군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소리 높여 싸웠습니다. 칸막이 시설 없다고 얘기했고 환기도 안 해 놓고 덥다고 했는데 칸막이 잘 해 놨고 환기 잘 되게 해 놓고 하면 역학조사가 잘 되겠냐.고 했더니 한 분이 진정을 시키는데 여기서 소리 지르지 말고 자기들이 공문을 보내 칸막이 시설 언제 했는지, 환기 시설 언제 했는지 확인을 해볼테니까 싸우지 말라고 얘기했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얘기했던 것, 근로복지공단에서 3라인에서 석 달만 했다고 일한 얘기한 것은, 삼성에서 왜 그렇게 서류를 올렸냐 하면은 화학약품에 노출된 곳에서 짧은 기간에 일했기 때문에 백혈병 걸릴 일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 3달만 일했다고 올린 것. 역학조사 들어갔을 때 칸막이 시설 만들어 놓고 환기를 서늘하게 만들어 놓고 역학조사를 한 것은 그 안에서 환기가 잘 되고 화학약품에 노출될 가능성이 없고 작기 때문에 병이 안 걸렸다는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 칸막이 시설도 잘 만들어놓고 환기 시설도 잘 만들어놓은 거거든요.
그래서 제가 참관을 하고 바깥에 나오니까 삼성 안전관리자가 저를 불렀습니다. 회의실에 들렀더니 저를 불러 오늘 날씨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더니 사회단체 아는 사람이 없었고 기자 두 명만 알고 있었다. 말(잡지 이름)지, 수원시민신문 기자분 하고 두 분만. 삼성안전관리자가 사회단체 사람들 누구하고도 만나지 말고 기자에게도 누구하고든 얘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 자기가 10억을 해 주겠으니 아무 말 하지 말라고. 그래서 이 사람이 나를 속여 여기서 유미가 일하다 병에 안 걸렸다고 속이려고 그러는구나. 그래서 나와서 수원 민주노총 사무실에 와서 그 때 당시 이종란 노무사를 그 전에 한 번 봤는데 8월초 쯤. 9월 1일 보면서 전부 얘길 했던 것 입니다.
그 얘길 다 하고 나오고, 2007년 11월인가 12월인가 그 때쯤 삼성을 상대로 하는 대책모임을 만들어 기자회견하고 막 쪼았습니다. 그 무렵인데 2007년 12월인지 2008년 1월인지..그 때쯤 근로복지공단에서 역학조사를 두 달 만에 발표를 했습니다. 그걸 할 적에 제가 (다른) 참관인을 참관시켜 달라고 했는데 시켜주지 않았습니다. 참관인은 피해자 유족이긴 하지만 직업병 전문의가 아니어서 잘 모르기 때문에 피해자가 인정하는 노무사나 직업병 전문의를 참가시켜 달라고 했는데 묵살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역학조사 하는 것도 두 달 만에 짧은 기간에 했는데 발표한 내용도 역학조사를 어떻게 했는지, 했으면 어떤 내용물을 가지고 역학조사를 했는지 그것은 영업비밀이라고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삼성에서 발표를 안 한 게 아니라 근로복지공단에서. 근로복지공단하고 산업안전공단하고 화학물질을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감추어 놓고는, 그 안에 반도체 공장과 여성노동자와 백혈병과는 인과관계가 없음을, 그것과 관련이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이게 말이 안 되는…끝까지 발표를 하지 않았다.
발표를 계속하라고 했더니 미국에 있는 인바이론. 이 회사가 어떤 회사냐면 우리나라 군인들이 베트남 전쟁을 할 적에 미국에서 고엽제 살포 군인들이 엄청나게 비 맞듯 맞아. 고엽제 병이 걸린 사람이 엄청 많은데 이걸 부정한 회사입니다. 전 세계 대기업들이 돈을 얼마씩 투자한 회사인데 투자한 회사가 역학조사 만든 것입니다. 대기업이고 역학조사는 밝히기 위해 하는 건데 이 회사는 감추기 위해 역학조사를 해 왔습니다. 이렇게 감추기 위해 역학조사를 하니까 기업은 엄청 좋지만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는 다 죽고 병들고. 그 때서부터 반올림에서 반도체 공장에서 일한 노동자들에게 제보를 받았는데 한 400여명 가까운 사람들이 제보가 왔습니다. 그렇게 일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병 걸려 사망환자가 100명이 훨씬 넘는데 반올림 보상중재 합의했지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삼성은 어떤 형사적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다. 감옥살이 처벌받은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놓곤 1년에 산재보험료를 2016년 당시에 1년에 천억이 넘는 돈을 할인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할인을 받냐면 반도체 공장에서 병 걸린 사람을 산재인정을 안 해주니까 깨끗한 반도체 공장이 되는 겁니다. 보통사람들이 일하는 곳에서는 월급의 1000분의 20을 내는데 학교 선생님들은 교실 안에서 위험성이 작은데서 일하기 때문에 산재보험료를 1000분의 7만 낸다고 말합니다. 반도체공장도 산재인정이 안 되기 때문에 깨끗한 사업장이기 때문에 산재보험료를 천분의 7 부과한다고 합니다. 그 중에도 산재신청을 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또 50%를 감면해서 천분의 3.5%만 부과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인받는 금액이 1년에 천억이 넘을 때도 있고 그 전에는 천억이 안 될 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노동자들이 몇 백 명, 몇 천 명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병들고 가정이 다 망해가고 다 죽어가는데도 깨끗한 사업장이라는 이름을 달아주는 것 자체가 정부도 우스운 정부가 되는 거잖아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거기다 천억을 할인 해준다는 것이 기가 찬 일이잖아요. 그 천억은 삼성전자에 외국인 지분율이 50프로입니다. 천억 중에서 5백억은 외국인에게 주는 거고 5백억 원은 국내 주주에게 주는 건데 국내주주에게 주는 것도 아니고 그 나머지를 가지고 삼성이 그 돈을 어디다 쓰는지, 노동자 목숨 값, 노동자 치료해야 할 돈을 가지고 어느 정권에다가 최 누구에겐가 돈을 수백억 갖다 주고 말 사자고. 정부와 삼성이 하는 행태가 국민을 위한 정부인지, 국민을 위한 기업인지 우리나라 기업인지, 우리 정부인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기업이 노동자가 많은 사람 병들게 하는 죽게 하는 이런 데는 그 기업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처벌을 받는 그런 기업이 꼭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법이 있기 위해서는 정부가 국회가 절대로 만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법은 지속적으로 국민과 노동자, 사회단체가 나서 이 끝까지 만들려고 노력할 적에 만들어 질거라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민호는 1999년 11월 23일생. 고 3 때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 구좌읍 한동리 소재에 있는 제이크레이션이라는 생수공장에 현장실습을 나갔습니다. 현장실습 도중에 적재기라는 기계에 눌려 삶을 마감했습니다. 열흘 동안 중환자실에 있었고 중환자실에서 두 번의 심정지가 왔습니다. 두 번째 심정지에서 결국은 돌아오지 못한 길을 가버렸고. 원래 저희 민호가 실습현장을 제이크레이션 갈 수 있는 전공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거기 갈 수 있는 전공은 자동차, 자동차 기계과 쪽이 갈 수 있었는데 저희 얘는 원예과여서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요. 1학기 말 무렵 지게차 면허를 따서 회사에서는 그 면허를 가진 실습생 필요하다고 해서. 그래서 거기에 해당되어서 갔는데. 민호가 그 회사에 현장실습을 나갈 때 여름 방학 시작되기 전에 제가 공장을 데려다주었습니다. 일주일 만에 괜찮냐고 물었을 때 애가 와서 하는 말이, 아빠가 데려다주고 뒷날 기숙사에서 공장을 들어갔더니 지게차 면허 있는 애들 불러냈다. 5명 갔는데 면허 있는 사람은 민호 포함 3명, 지게차 면허 테스트 해보더니 둘은 안 되고 민호에게 지게차를 담당하라고 해서 지게차를 줬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조금 있으니가 적재기 포장라인에 있던 고참이 민호를 부르더니 공장장이 너랑 같이 일을 시키라고 했다며 나 따라 다녀라고 해서 금요일 까지 일하고 제가 금요일 저녁에 데리러 갔는데 재밌다 일할 만하다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 다음 일요일에 데려다 주고 다시 금요일에 데리러 갔더니 하는 말이, 월요일 아침에 출근해보니 같이 일하던 선임근무자가 없더라, 그만두고 가버렸다고 했습니다. 나한테 5일 동안 기계 손보는 것, 응급조치하는 이런 것만 알려주고 소리 소문 없이 가버렸다고. 그래서 혼자서 했냐, 어떻게 하느냐고 혼자서 해야지. 그런 상태가 되다 보니 저도 사회생활하면서 그런 걸 알았어야 했는데 단순했습니다. 이런 일을 학생에게 시켜도 되는 건가 의문점은 있었지만 질문을 못해봤어요. 그러다보니 시간이 지나고 첫 번째 사고가 나 액정이 부서졌고 두 번째 사고가 났을 때 갈비뼈 충격을 입어가지고 병원에 실려 왔는데 그 때 119구급대에 실려 왔으면 애가 세 번째 사고까지는 안 당했을 텐데, 회사에서는 공상 처리를 하려고 회사 직원차로 병원에 데려다주고, 제가 갔을 때 인수인계하고 가버렸습니다. 영수증 제시하면 나중에 병원비 주겠다고. 그 때까지만 해도 애를 지키려 했으면 제가 부모로서 생각이 있는 사람 같았으면 이걸 항의를 하고 어디 가서 물어보기로라도 했을 텐데 그런 걸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게 애를 못 지킨 부모의 잘못 입니다.
결국은 세 번째 사고가 적재기에 눌러 119에 실려 오고 응급실에 왔을 때는 이미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런 상태의 애를 봤고, 열흘 동안 응급실에 있었는데 첫 번째 심정지가 와서 한 시간 30분 만에 맥박이 뛰었고, 심지어는 한 시간 40분 정도 흉부 압박하다가 담당 과정님이 그만하는 게 어떻겠냐고 애한테 너무 무리를 주는 것 같다고 했을 때 제가 과장님에게 그랬습니다. 집사람도 그랬고, 식물인간이라도 좋으니까 호흡만 하고 살려만 주십시오. 그래서 한 시간 반 만에 호흡이 돌아왔습니다.
호흡이 들어온 뒷날 제가 안 되겠다 싶어 공장을 직접 방문 했어요. 내부를 처음 들어가 봤습니다. 처음 들어가 봤을 때 저는 기계에 대해 문외한 이지만 아, 이 소리 밖에 안 나왔어요. 왜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공장이구나, 기계 자체가. 보면서 사진 촬영하고 공장장에게 물어보니 컨베이어 이런 것에 사람들이 끌려 들어가고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면 안전펜스를 쳐야 하는 거 아니냐? 하니 공장장이 하는 소리가 의무사항이 아니라 권고사항이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어 안했다고 했다. 했습니다. 이상하다. 의무사항 아닌가 싶었어요. 애가 눌린 기계를 봤을 때 상하작용을 하는 기계는 제가 곤도라를 제가 만져봤기 때문에 제가 그 얘기를 물어봤어요. 상하작용 하는 일에서 이물질이 들어갔을 때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는 센서가 달려야 하는데 왜 안달렸냐. 그것도 의무사항이 아니라 권고사항이라고 했습니다다. 황당했다. 그러고 나서 애가 열흘 만에 죽고 장례식장에 옮겨 놓고 기나긴 싸움이, 20일 동안의 싸움이 시작된 겁니다.
단 한 번도 영장사진 조문 안 대표, 미안하다는 말도 없고. 심지어 사장하고 처음 앉았을 때 한다는 소리가 합의서에 도장을 찍으면 공장 가동하고 잘 해드리겠다. 애는 죽었는데 뭘 잘 해주겠다는 것이야. 그랬더니 아무 말도 안 해요. 그냥 잘해드리겠습니다, 잘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할 얘기 없으니까 말 안한다고 하고 저는 나왔고. 2차로 앉았을 때 저희 처제가 갔는데 처제에게 한 말이 8천만 원 줄 테니 합의서에 도장 찍어달라고. 3차 자리에 갔을 때 처제가 그런 소리를 해요. 내가 8천만도 아니고 1억 5천을 줄테니 당신 자식을 그 기계 앞에 데려다 놓으라고. 그렇게 전하라고. 그 얘기는 전달은 안 되었지만 심정이 그랬습니다.
사실 사고 나서 우리나라 관공서라는데 산업안전공단이라든지, 노동부라든지 하는 행태를 보면 노동자 편이 절대 아닙니다. 회사 검증을 하는데 세상에 회사 관계자를 데리고 가는 현장 검증은 없습니다. (그런 현장검증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는 뜻) 살인사건 현장에 범인을 데리고 가서 사건 조사하는 게 있습니까? 대한민국이 노동부는 살인사건 현장에, 살인사건이나 다름 없지 않습니까? 그 현장에 회사 관계자를 데리고 다녀요. 그게 무슨 현장조사입니까? 기계에 깔려 죽은 애를 결과가 뭘로 나왔는지 아십니까? 빠레트 때문에, 플라스틱 빠레트 때문에 노후된 빠레트로 인해 기계가 오작동을 일으키고 그래서 애가 손보러 가서 그렇게 됐다. 말이 되는 얘기를 해야죠. 이게 노동부 발표에요. 세상에 이치에 맞지 않은 짓거리를 하는 게 노동부란 말입니다.
제가 이 과정을 1년을 넘어가고 느꼈던 게 정부도 믿지 못하는 나라였어요. 나라가 아니에요. 이미 어떤 현장이던지 노동부가 다 잘 알고 있어요. 사고 나면 먼저 가요. 저희 애들이 사고난 기계가 5년 동안 안전검증이 안 된 상태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노동부는 단 한 방문도 안했어요. 왜 방문을 안 했느냐, 당신들이 방문했으면 이 사고가 났겠느냐? 하니 하는 소리가 죄송합니다만 일손이 달려서 가지도 못하고 또 저희가 방문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이게 노동부의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화가 나가지고 뭐하러 이곳에 왔느냐 했더니 사람이 죽었으니까 왔죠. 죽었기 때문에 조사를 하는 거고 외양간 튼튼하게 잘 고치러 왔습니다. 외양간 잘 고칠 것도 없습니다. 그 공장은. 그게 노동부가 하는 짓이에요.
그러고 나서 근기법 위반이라고 해서 육백 몇 가지에 과징금 2억 가까이. 벌금도 아니에요. 벌금은 그래도 전과 흔적이 남죠. 과징금은 흔적도 남지 않아요. 1년에 2500명 이상의 노동자가 죽는데. 한 사람 죽었을 때 과징금 2억씩만 때리면 우리나라 국고에 5천 억 정도가 들어갑니다. 노동자는 죽어서 뼈 값으로 나라에 돈을 바치는 꼴이에요. 이게 대한민국. 산압법 통과되었을 때 박수칠 일이 아니었어요. 저는 그 뉴스 보면서 이 개새끼들 쌍욕이 튀어나왔습니다. 오로지 국회와 정부는 기업 편이에요. 노동자 편드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습니다. 노동자는 노동자끼리 뭉쳐야 하는데 노동자끼리 뭉쳐지지도 못하고. 제가 기자들에게 원망을 많이 했어요. 1년 넘도록. 저희가 똑같은 생각을 현장실습생 부모들, 가족들 맘 똑같다. 사고 나서 옥신각신 했을 때는 기사거리 내달라고 쫓아다니다 끝나고 나면 그 일이 어떻게 해결되고 있는가, 단 한마디의 한 줄의 기사도 나오지 않아요. 가족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 질문 던지는 전화 통화도 없다.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국민의 눈과 귀가 되어 주어야 할 기자들이 단 한 줄의 기사도 안 써주는 게. 왜 그래야 하는지, 왜 대한민국이 그래야 하는지. 제가 현장실습생 유가족 모임을 만든 이유가 그거 하나에요. 안 써줘도 좋습니다. 내가 싸워야지. 내가 나서서 싸워야지. 시민단체에 맡겨 놓으면 국가에서, 정부에서 쟤네는 맨날 하는 소리가 저소리라 하면서 안 듣잖아요. 자한당 놈들은 빨갱이라 얘기하고 빨갱이들이 저짓거리 하는 거야 그렇게 얘기하고. 유가족들은 어디 가서 누구한테 하소연합니까.
내 자식 잡아먹고 벌금 과징금 국고에 챙겨 넣고 부모들은 죽든지 말든지 우리는 할 거 다했다, 과징금 때리고 했으니까. 1심 재판에 징역 2년에 집유 3년을 때렸어요. 모든 아픔은 부모 책임. 모든 잘못은 부모 책임. 이게 무슨 나라입니까. 그런 기업을 없애려면 방법은 하나 밖에 없어요. 사고가 났을 때 두 번 다시 회사가 기사회생하지 못하도록 벌금을 때리든지, 집어넣어서 최소한 5년 이상 살리게끔, 형 정지 없이 보석도 없이 5년이면 5년 동안 철창 속에 잡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해요. 가진 자들이 느끼는 게 뭔 줄 아세요? 가진 놈들이 우리는 들어가면 1년 6개월이면 무조건 나온다고 생각해요. 6개월에서 1년 6개월 사이에 나온다고 생각해요. 돈으로 다 때우니까. 그런 걸 못 나오게 막아야 안전한 공장을 만들고 안전한 기업을 만드는 거에요. 유독 특히 뭔 줄 아세요. 나만 아니면 돼요. 내 자식은 그런데 안 가. 남의 새끼 가는데, 남의 새끼 가서 뒤지든지 말든지 난 신경 안 써. 오로지 돈만 벌면 돼. 똑같이 서민들도 나보다 힘없고 나보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의 자식은 자식이 아니야. 이런 인식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대한민국 영원히 그대로 갑니다. 나만 아니면 돼가 아니고 나도 그럴 수 있어, 나도 당할 수 있어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앞에서 두 분 말씀 하신 것 들었는데 제가 말할게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 일찍 보낸 분들이 마음에서 얘길 하니까 굉장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이런 문제가 생기네요. 지금 보면 말씀하시는 게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떻게 보면 그 때가 해결이 더 쉬웠다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너무 어렵고. 정부의 거짓말과 정부의 무능 탓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진 문제 잠깐 말씀드리면 한 회사에서 이황화탄소라고, 그게 뭐냐면 2차 대전 때 한 나치가 유대인을 죽일 때 쓰던 독가스거든요. 거기에 중독이 된 직원이 915명이 한꺼번에 중독이 됐어요. 그래서 나와서 치료를 받다가 지금 680명이 남아 있고 나머지 분이 사망한 사건입니다 전말을 보자면 우리가 일본에서 한일청구권으로 기계를 들여왔는데 일본에서는 폐기를 하려고 했던 거에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가진 자들, 내지는 정권에 있는 사람들이 모른 척하고 가져 들어왔거든요. 그리고 모른 척 하고 일반 노동자를 거기에 넣어 일을 시켰어요. 그러다보니 노동자들은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자기가 가스에 중독되어 몸이 피폐 되는 줄도 몰랐죠. 그게 급성중독과 만성중독이 있는데 급성중독은 2시간만 심하게 맡아도 직업병 중독이 되는 가스. 얼마나 심하냐 하면 이황화탄소를 생산하는 곳에는 연돌이 있는데 가스가 빠지는 곳이에요. 거기에서 새가 날아가다가 가스를 맞으면 새가 떨어질 정도의 가스인데, 그걸 생산해서 직접 진행을 시켰죠. 10년 정도 지나니 노동자들이 쓰러지기 시작했어요.
맨 처음에는 어떻게 했느냐면 노동자들이 중풍이니 뭐니 밀어붙이고 안해 주고. 회사에서 직 업 배치해서 다른 부서로 보내고. 심지어 여자를 밝혀서 그런다고 거짓말을 하고 이렇게 하면서 노동자들을 탄압했어요. 작업전환도 한계가 있으니 돈을 몇 푼 주고 퇴사를 시키는 거에요. 강제퇴사.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면 이걸 다시 몰수하겠다 했죠. 81년 최초 직업병 환자가 발생했다. 법적으로. 그 때는 이황화탄소 중독이 아니고 아황산가스 중독으로 판정받아요.
그러고 있다가 87년에 연결되는 게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민주화운동, 노동자대투쟁으로 연결되면서 노동운동과 함께… 87년도 저희 4명이 직업병 판정을 다시 받게 되요. 몸이 아프니까 청와대, 노동부에 질시, 탄원서를 내서 현장검증을 해 달라 했어요. 고대에서 나와서 작업환경측정을 해서 4명이 최초로 직업병 판정을 받았고. 국가나 노동부나 회사가 어떻게 정리를 했냐면 그냥 판정을 하긴 해줬는데 종료를 시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다시 직업병이라는 게 낫지를 않는 병인데 종료를 시켜 가지고 결국은 더 치료를 못 받게 된 거에요. 그게 88년으로 넘어가는데. 그 때 큰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88년, 15살 문송면 군이 수은중독이 되어 매스컴에 많이 보도가 되고,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지는 운동권, 노동운동, 그 때 서울지역의 대학생 운동권들은 원진투쟁에 안 와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호응을 하고…87년 판정받은 사람이 몸이 더 아파 노동부 재요양 신청을 냈어요. 종결되었다고 재요양을 안 받아줬죠. 이 사람들이 할 수가 없으니까 구리 노동상담소 찾아갔어요. 거기서 문송면 그쪽 비대위와 협력해 원진 대책위가 만들어 졌어요. 88년 투쟁이 시작. 정부와 싸워서 어쨌든 판정조건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판정을 받았어요. 그 때 받은 이유는 뭐냐면 88년 올림픽이 있었는데 성화 올림픽로 차단하겠다는 것과 투쟁 속에서 밝혀진 게 뭐냐면 25,000시간 무재해 기록증이 사장실에서 나와서 결국 이 두 가지고를 가지고 노동부하고 해서 판정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는데, 그래서 1차 투쟁이 끝이 납니다.
2차 투쟁은 91년도에 김봉환 동지가 돌아가셨는데 이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가 직업병 신청을 해야 하는데 이 분이 근무한 원예과라는 이유로 거기는 유해부서가 아니라 비유해부서다 그래서 직업병 승인을 안 해줬어요. 2차 투쟁에 돌입, 정부와 심하게 다퉜죠, 정부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1차에서 끝났는데 뭘 더 해주겠느냐. 그래서 137일 시신투쟁에 돌입. 그분이 1월 달인가 1월 5일인가 돌아가셨는데 정문 앞에 비닐텐트를 치고 137일간의 시신투쟁을 해서 결국엔 유해부서 비유해부서 (이런 기준이) 없어지는 걸을 만들었구요. 투쟁을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한 것이 뭐가 있냐면 앞에서 제가 그 때가 더 쉬었다고 했는데 그게 뭐냐면, 우리가 투쟁 하면서 산업의학과가 대학에 생겨. 원진투쟁으로 산업의학과가 생겼고 그 다음에 산업환경보건연구원이 생겼고. 이런 것을 만들어냈고 97년 투쟁에 들어가 우리가 서울녹색병원, 구리 녹색병원, 건강연구소 일과 건강 이런 것을 만들어 어쨌든 건강한 일터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에 다시 겪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88년도 시작을 해서 2018년도가 30주년 되는 해였습니다. 그래서 민주노총과 어쨌든 30주년 기념행사를 하는 도중에 김용균 동지 사고소식을 듣고 합류를 하게 되었는데, 앞에서 말씀하신 것 보면 30년 전 더 투쟁보다 더 힘든 투쟁을 하는 거 아닌가. 경제는 엄청 발전해서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노동자들의 목숨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고. 그 때도 연 2,000명 정도 사망을 했는데 지금도 연 2,000명 이상 사망을 하고 달라진 게 없는 너무나 없는 현실, 이게 가장 가슴 아픈 현실이구요.
국가가 책임을 지지 않아요. 다 안 하고 있잖아요. 쉽게 얘기해서 음. 1년에 2000명이 죽으면 10년이면 2만, 40년이면 8만 정도 대략 10만 정도로 사망하는데 그렇게 사망하고 있음에도 뭐냐면 국가에서 어떤 행사를 할 때에도 산재 사망 노동자에 대한 예우를 표시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산재 사망 노동자가 그렇게 희생을 하면서 나라를 일으켜 놨는데 그 혜택은 다 보면서 산재사망 노동자에 대한 예우는 하나도 찾을 수 없어요. 이런 거는 산재사망 노동자가 함께 하고 있지 못한 것도 있지만 시민사회단체도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요.
심지어는 4월 28일이 산재노동자의 날인데 외국에서 국가기념일 지정한 나라가 많이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행사조차 없고. 결국 노동자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아닌가. 이렇게 볼 수 있지 않는가. 추진을 해야 하고. 우리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는데, 이미 지나간 거니까. 그런데 앞으로 가야 할 것은 가장 중요한 건 산안법 재개정도 해야 하고, 수정이든 개정이든 해야 하고. 또 하나는 젊은 친구들이 죽지 않게 해야 하지 않나요. 아이들이 아침에 출근할 때 잘 다녀 오겠습니다 그러면 그래 조심하게 다녀와라. 그런데 1년에 2천명 죽는 현장으로 가고 있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은 그걸 부모에게 얘기하지 못하잖아요. 결국은 우리 기존 세력들이 너무 안주하지 않았는가 그런 반성을 하게 되요. 또 한 가지는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안전에 대해 배워야 하는데 국가에서 전혀 안하잖아요. 교과서에 실어서 산재사망에 대해서 싣고 우리가 경제대국인데 10대 대국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하기 위해서 매년 2000명 이상씩 죽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됐으면 앞으로 죽지 않는 노동을 하기 위해서 교과서에서 가르쳐야죠. 그런 건 하나도 힘쓰지 않는 것. 이런 건 종합적으로 묶어서 판단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한빛미디어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이한솔이라고 합니다. 사실 제가 처음에 발제를 제안 받았을 때는 기업처벌법이나 결이 다른 사건이기도 했고 저희 형 사건이, 그리고 부모님이 계신데 자식 떠나 보내는 것과는 제가 다른 층위여서 제가 얘기할 수 있을까 방금 전까지도 고민을 했는데 그래도 필요한 얘기가 있을 것 같아서 간단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쨌든 그런 질문을 받았어요. 저희가 한빛센타 만들어 활동을 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활동을 이어가느냐. 다른 분이 잘 설명해주실 것 같기는 한데 유가족이라는 어떤 특성, 똑같은 사건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나름의 상처들이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가령 당연히 가족이 떠나는 슬픔과 더불어 저희는 CJENM과 싸우는 과정이 있었다 보니까 부모님께서는 6개월 동안 공식적으로는 싸울 수 없고 사전조사라는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이땐 자식이 나약하게 떠난 사람으로 기억될까봐 어디 가서 제대로 이야기도 못하고 어쨌든 조사가 끝나기 전에 어디 가서 한마디도 못했던 기간을 봐오기도 했고, 저는 군복무 중이었는데 기무사 압박하고 그런 기억들이 사실은 너무 기억들이 많이 있는데. 누군가는 반복하거나 그런 거대한 대기업 앞에서 저희야 운이 좋았지만 누군가는 똑같은 상대 앞에서 제대로 상대하지도 못하고 떠내보내는 일들이 반복될까봐 그런 소식들을 들을 때마다 섬짓섬짓하고, 그런 일이 반복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활동들을 이어가고 있어요.
기업처벌법은 저희와 딱 일치되는 건 아니지만 노동이란 관점이 확정되었으면 좋겠어요. 2016년 10월이었으니까 2년 반 정도 지났는데. 오늘 세 건 제보가 들어왔는데 주당 120시간 드라마 찍는다고. 저희가 아직 사건조사가 완료되지 않아 실명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아스날연대기’라는 드라마에서조차 120시간의 노동문제가 제기되고 있어요. 같은 방송국인 TVN ‘화유기’ 드라마 찍을 때 크게 다친 일이 있었고 SBS ‘서른이지만 열흘 곱’ 아니면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서도 사망사건이 있었어요. 제가 그 얘기 들을 때마다 섬뜩한 지점은 어쨌든 CJ하고 6개월 조사하고 두 달 싸우고 두 달 만에 종결이 됐었는데. 그 이유는 CJ가 사과를 했어요. 글에도 있지만 상황이 너무 복잡해서 그렇다고 메인 PD를 처벌할 수도 없는 입장이어서 CJ뿐 아니라 모든 방송국의 문제기 때문에 재발방지대책을 CJ가 선도적으로 마련하면, 그거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형이 유지로 남겼던, 바라는 바 일거라고 기대를 해서 협상을 했는데 어쨌든 도장을 찍으면서도 내심 불안한 게 있었어요. 많은 방송종사자들이 지지해주었고 시민들이 싸워주셨고 형 앞에서 떳떳한 결과를 남겨야 하는데 어쨌든 너무 빨리 도장을 찍으면 CJ에 약간 면죄부를 주는 일이 될 것 같은데. 어쨌든 그쪽에서도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과정에서, 제가 힘들기도 했나 봐요. 지치기도 하고 그래서 조금 빨리 도장을 찍었는데 6개월 동안 재발방지를 위한 개선 기간 마련하고 6개월 후에 약속을 잡은 날이 있었는데 2주 전에 ‘화유기’ 사건이 터져요. 사실 내가 어떤 짓을 한 건가, 무슨 도장을 찍은 건가 이런 약간 그런 감정에 휩싸여 있던 시기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 사고가 터져요.
그런 상황에서 저도 그런 기업들이 있었기 때문에 기업처벌법에 대해서 저희가 충분히 함께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던 대기업이라는 걸 상대하는 게, 삼성이나 그런 큰 기업과 상대한 분들이 있어 제가 얘기하기 그렇기도 하지만 어쨌든 기업을 상대하는 과정이 6개월간 그 누구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혹은 기업에서 와서 니네 형이 나약해 죽은건데 왜 우리한테 책임전가 하느냐 이런 얘기 하고, 저한테 직접 협상 하는 과정에서.
어쨌든 법안이 디테일하게 만들어질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덜 고생하고 덜 힘든 그런게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한빛센터로서 얘기한다면 저희가 조사기간 6개월 끝나고 처음 기자회견을 했을 때 고용노동부에서 연락이 와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거죠. 드라마 업계는 턴키계약이라든지 근로계약을 하지 않으니까 근기법을 적용할 수 있는 어떤 근거 자체 없이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 주당 120시간씩 노동이 가능한 거고. 드라마 현장만 그럴까. 특히 신규로 확장되고 있는 예체능 영역의 많은 변화, 4차 산업, 게임업계, 아이티업계 등 여기서 일종의 변종계약이 나오면서 근기법이 포괄할 수 없는 노동자들이 너무 많이 늘어났어요. 그렇다면 이 사람들에게 피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은 너무 책임 회피하기가 쉽고 이 사람들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정부는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 되는가? 저희 사건 중심으로 다루어보자면 아직까지 부족하다는 것. 법으로 포괄할 수도 없고 고용노동부가 다루거나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는 수준이 너무 낮기 때문에 만약에 나중에 이 법이 잘 제정되거나 나중에 산재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잘 확장된다면 그런 근기법이 포괄하지 못하는 노동자를 같이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예시를 들자면 저희가 어쨌든 처벌에 대해서 얘기가 나왔는데 메인피디를 처벌하지 않겠다고 부모님과 얘길 하고 책임소재를 논의하는데 편성권이 방송국이 TVN이었고 모기업은 CJENM이었고 여기는 드라마국으로 스튜디오(?)라는 거대 제작사. 어디로 가야 하는지 TVN 본부장대표에게 가야 하는지 CJENM 대표에게 가야 하는지 혹은 스튜디오 대표에게 가야 하는지 모릅니다. 혹은 고용관계상 촬영팀 감독이 자영업자 회사인 경우도 있는데 팀원이 피해를 당하면 자영업자 감독에게 가야하는지. 이런 측면에서 산재가 처벌하거나 포괄할 수 있는 범주가 적어도 방송업계에선 이미 어려워 졌다라는 부분을 사례로 들 수 있습니다. 근기법을 어떤 식으로 적용하고 위반사항을 어떻게 처벌하고, 산재에서 어떻게 다룰지. 예를 들어 ‘화유기’ 사건이 터졌을 때 세트장 관리자와 KBS 세트 다루는 팀이 있고 방송국은 CJ, TVN이었고 이런 복잡한 관계들에서 정부나 이런 곳에서 확실하게 파악을 해야 하는데 지금 관련된 실태 파악한 것도 없기 때문에 사실 법안이 마련되어도 많은 노동자는 사각지대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우려들이 있어서 지금 현장에서도 오늘 세 건이 들어오면서 사실 마음이 편치 않은데, 그런 얘기 듣고 해결해 나갈 때마다 어쨌든 저희도 이후에 계속 이런 방송종사자들이 노동자로서 인정받고 법안의 테두리에 포함될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입니다. 관심 부탁드리고 법안 만드는데 있어서도 이런 사각지대 노동자들도 같이 함께 할 수 있는 영역들을 고려해 주었으면 한다.
제 아들은 죽은 지 70일이 조금 넘었습니다. 정말 감당하기 힘들고, 정말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12월 11일 아침에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들이 맞는지 확인해 달라고. 그래서 부랴부랴 태안으로 갔는데 가다가 전화가 와서 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그쪽으로 갔는데 거기 안내하는 사람에게 우리 아들 이런 사람 왔냐고 하니 모르겠다고 얘기했습니다. 분명히 경찰서 여기로 가라고 했는데 왜 없지? 그래서 애 아빠하고 얘기하다가 갑자기 영안실이 생각이 나서 혹시 영안실에 이런 사람 왔냐고 하니까 이름은 모르겠고 한 사람 들어온 사람이 있다고 얘길 해서 가서 확인 했습니다. 우리 아들이 맞았습니다. 영안실에 있는데 얼굴이 까맣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다른 곳을 못 건드리게 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애 상태가 부모가 보면 안 될 것 같아서 막고 있다고 했다. 말로라도 해 달라고 하니까 애가 머리가 분리되어 있다고, 다른 곳은 어떠냐고 물어보니까 등이 갈려서 타 있는 상태라고 했습니다. (울음) 너무 처참하고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습니다. (울음) 그래서 한참을 울다가 이층으로 올라왔는데 거기서 서부발전 하청 관리직이 와서 저한테 하는 소리가 우리 아들 용균이가 가지 말라는 곳을 갔고 하지 말라는 일을 했으니 보험 들어놓은 게 있으니 그거 받으라 애기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봤습니다. 그럴 때는 용균이가 기다리는 곳이 있다고 했는데 그곳에서 이상신호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든 현장에 가지 말고 어떤 행동도 하면 안 된다고 얘기 들었습니다. 그래서 몰래 같이 일했던 동료에게 물어봤더니 무조건 가서 일을 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고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관리자들) 저를 위해서, 저에게 좋게 해주는 사람들이 아니구나 판단이 들어서 옆에 시민대책위가 있어서 그분들에게 얘기했습니다. 저 사람들 제 근처에 오지 못하도록 해 달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후부터 그 사람들하고 얘기 안하고 대책위 분들하고 얘기해서 그 분들하고 아침저녁으로 회의를 하고 몇날 며칠 그렇게 하다 정말 (그분들이) 깨끗하게 보여져서 믿고 일을 같이 하게 됐습니다.
정말 저는 아직도 너무 힘듭니다. 그 다음날 거기 현장을 가보고 싶었습니다. 우리 애가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 동료들하고 현장을 갔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그게 아파트 15층이랬나 그 정도 높이를 올라가서 일을 해야 하고 가는 곳마다 탄가루가 많이 널려져 있고 분진가루 휘날리고 있고 무덤처럼 쌓여 있고. 내리막이 있어서 바닥을 가는데 옆을 잡으려고 하니까 평소에는 회전체가 돌고 있어서 옆을 잡지 못한다 그래서 거기를 못 잡으면 그냥 미끄러질 상황이고. 우리 아이들이 일했던 곳은 9~10호기인데 1~8호기는 노출되어 있습니다. 회전체가. 넘어지면 큰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들 일한 곳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철재로 쌓여져 있습니다. 그 안에는 많이 협소해서, 문이 있는데, 성인이 겨우 들어갈 만한 문이 많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야간에 불이 하나도 없습니다.
불이 없는 상태에서 헤드랜턴도 지급받지 못하고 손전등도 없어 동료들에게 빌리다가 사고 난 날 맨날 빌리기도 힘들었는지 휴대폰으로 불빛을 밝히고, 거기서 일을 하면서 한손으로 폰을 보고 한손으로 삽질을 하고, 이상이 발생할 때는 거기 점검을 해야 하고 불빛으로 점검하고 회전체에 가까이 가서 폰으로 찍어서 상부에게 보고해야 하는 상황이고, 귀를 기울여 소음이 엄청 큰데 회전체 이상한 소리를 들으려면 귀를 가까이 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회전체가 너무 빨리 돌아가는 상태고 컨베이어 벨트도 속도가 빠른 상태고. 탄을 싣는 컨베이어. 벨트가 엄청나게 위력이 세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사람이 빨려 들어가면 아작이 날 정도. 그래서 용균이가 처참하게 일을 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거기를 일하는데 한 사람이 일하는 곳이 거리가 2키로가 넘어요. 밤새 혼자서 일을 해야 되고 그 안에는 화장실도 없어서 원래 들어가기 전으로 나와서 볼일을 보고 들어가고. 밤새 혼자 일하다 끼니를 놓치면 컵라면을 먹고. 정말 저는 그 현장을 보고 아이가 너무 험하게 다치고 죽고, 그 현장을 보면. 너무 상상할 수 없습니다. 생각할 때 마다 너무 기가 막히고 참을 수가 없습니다. (울음)
아이가 일했던 맨 마지막 사고 난 곳을 가봤습니다. 그곳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습니다. 다른 그냥 보통사고 같으면 흔적이라도 있었을텐데. 컨베이어벨트에 살점이 다 뜯겨 나가고. 흔적이 없었습니다. (울음) 너무 억울했습니다. 그 안에서 짐승처럼 울어댔습니다. 악을 쓰면서 이렇게 어떻게 처참할 수가 있는지(울음)
나라 공기업이라는 데를 믿고 저는 믿고 보냈습니다. 아무리 열악해도 공기업이니까 괜찮겠지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국가기밀이라고 포장이 씌여져 있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그렇게 열악해도 보령지청, 대전청 그 사람들 한 번 도 왔다 간 적이 없었습니다. 용균이 죽기 전 한 달 전 검사를 했는데 다 합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가보지도 않고 그냥 합격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태까지 8년 동안 12명이나 죽었는데 계속 그렇게 해 왔다고 보여집니다. 그 때 11명 죽었을 때 진짜 제대로 했다면 우리 아들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노동부 보령지청이나 대전청은 찾아갈 때마다 자기들은 모른다, 너희가 책임져라 서로 서로 떠맡기고. 유가족이 찾아갔을 때 철창이 내려지고. 우리가 들어가려고 하니까. 옆문으로 들어가게 해서.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옆문으로 들어가게 하냐고. 들어갔더니 다시 셔터문을 내리고. 그것도 평일 대낮에. 그리고 우리보고 점거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고를 당했는데, 그들은 우리 입장에서 해결해 주지 않고 정부 입장만 얘기하는지. 아예 처음부터 귀를 닫고, 그냥 너네는 떠들어라, 우리는 못해주겠다 이거였습니다.
공기업인데 그리고 대전청이나 보령지청 다 우리를 위해서 일해야 될 사람들인데 어떻게 서민들 입장을 배제하고 나라만 생각하는지. 그래서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기업과 정부, 정치인 합세해서 비정규직 만들고 최소한 임금 주고 최대한 이윤 뽑았던 것 두 달 만에, 겨우 두 달 만에 큰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라가 이렇게 험하게 돌아가는지, 두 달 전에는 정말 서민들이 나라에 의해서 편하게 살고 있구나. 적어도 안전하게 살고 있구나 생각했는데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두 달 동안 너무 어두운 곳, 어두운 곳을 알게 되었고, (저에게) 편지를 쓰는 사람들, 여러 사람이 이런 곳도 있다. 안 좋은 곳 많다고 얘길 많이 해주었습니다. 건설업, 조선소 등에서 특히 사람이 안전하지 않아서 죽는다는 얘기를 듣고 정말 우리나라 사회가 전반적으로 비정규직으로 많이 죽고 다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산재사망률 1위고, 빈부차이도 1위고 안 좋은 건 다 1위입니다. 정말 창피하고 나라가 정말, 이민호 아버님이 말씀하셨지만 나라가 나라 같지 않습니다. 공산국가 같습니다. 민주주의라고 생각하고 여태까지 산 제가 부끄럽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아이가 뭘 원하고 있었는지, 피켓을 들은 이유를 제가 알게 되었고 앞으로도 저도 아이가 원했던 것 무엇인지 찾고 그걸 행하려고 합니다. 나라를 바꾸어야 합니다. 나라는 그냥 바꿔지지 않습니다. 서민들과 유가족들과 이 언론들 모두 다 힘을 합쳐야 바꿔야 지 바꿀 수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사회> 오늘 다섯 분의 얘기를 들으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이 자리를 처음 만들었을 때는 사고가 어떤 사고였는지, 정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제대로 처벌은 됐는지 여쭈어봤습니다. 기업처벌이 안 되고 있다는 게 너무 당연한 얘기여서 자료를 보시면 될 것 같고, 오늘 얘기하면서 느끼는 건 단지 기업이 처벌이 안 되는 것뿐만 아니라 정부기관의 문제(?). 근로복지공단이나 정부기관들, 고용노동부 이런 노동자의 죽음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우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또 고민하게 되었어요. 피해자들에게 권리가 하나 없었구나. 다 보상금 얘기하고 거짓말하고. 피해자들의 권리는 어떻게 보장되어야 하는지 고민이 됩니다. 많이 듣고 싶은 게 있을 거다. 질문을 해 주셨으면 한다. 같이 얘기 나누고 싶은 게 있으면. 이민호 아버님 보니까 제주도 삼다수에서 또 희생자가 나왔을 때 너무 맘이 아팠다고 얘길 하시는데 여기 계시는 분들이 다 똑같은 생각을 한다고 그러신다. 유사 사고 발생 시 내가 또 잘못했나. 민호 아버님 다른 분이 사망했을 때 어떤 느낌. 그 때 결심을 많이 하셨다는 얘기도 들어서 어떤 결심이었는지도.
이민호 아버님>
사실 삼다수 사고는 뉴스로 접한 것도 아니고, 새벽에 잠깐 잠 들어서 깼는데 카톡이 울리더라. 누가 이른 새벽에 보내나 싶어서 봤더니 모르는 번호에서 카톡이 왔다. 뭐지 그러고 열어서 보는데 삼다수 공장에서 30대 사망 뜨는 거고 뭐지 그러는 순간 전화 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았더니 청와대 행정관이 전화를 했다. 청와대 행전관이 416 행사 때 만난 분인데 전화를 했다. 삼다수 사고가 민호 사고 하고 비슷할 것 같은데 들었냐고 해서 처음 듣는 거라고. 사고 유형은 정확히 모르지만 보고가 올라온 건 민호 사고 비슷한 것 같다고 보고가 올라왔다고 해서 그러냐고, 저도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런 얘기를 했다. 근로감독이 나가게 되면 어떻게 했으면 하냐고 해서 제가 그분에게 부탁한 건 그거에요. 특별근로감독 내려오면 광주나 제주지청 사람들 쓰지 말아라. 왜 그러세요? 내가 제주도에서 사고 조사를 노동부 근로감독관들이 하는 걸 보면서 걸 보면서 사측하고 뭔가 연결 고리가 있다고 느껴지더라. 아예 광주지청이나 제주도 소속이 아닌 본청에서 직접 사람을 내려 보내라. 그렇게 하면 사고조사는 될거다. 그런데 엉뚱하게 삼다수는 과학수사대에서 왔다. 특별근로감독 들어가지 않고 근로감독 들어가고. 저희 애 사고 때는 과학수사대가 참가하지 않았다. 잘못된 거다.
그 사고를 처음 접했을 때 30대라고 들어서 저는 바라는 건 단 하나였다. 부양가족이 없는 사람이길. 그러면서 김경희 국장하고 통화하면서 물어봤어요. 혹시 그분 혼자세요? 결혼 안했대요? 그건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나중에 알아보니까 100일된 딸이 있다고 들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라구요. 아직 아빠 얼굴도 모르고 아빠라는 소리를 단 한 번도 못하고 그 애는 평생을 살아요.
그걸 알고 난 이후부터는 내가 좀 더 강하게 노동부를 쫓아다니고 사고조사를 철저히 해 달라고 했으면 이 사고가 안 나지 않았을까, 미연에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많이 했다. 솔직히. 아무리 얘기해도 안 듣는 노동부라 자포자기 되는 심정으로 얘길 더 이상 안 했죠. 해봐야 먹혀 들지가 않으니까. (휴..) 그러다가 삼다수 사고가 어느 정도 아물 무렵 용균이 사고가 난 거에요. (울먹) 용균이 사고를 접하는 순간, 이제는 아니다, 이게 무슨 나라냐? 시민단체냐 민주노총에 맡겨 둘 게 아니고 유가족들이 앞장서 정부와 싸워야 하겠구나. 그래서 유가족 모임을 만들자고 얘길 했고 오늘 모임이 어느 정도 결성이 되고 싸울 힘이 생기고. 저는 이 행동을 하는 게 딱 하나에요.. 민호가 열흘 동안 중환자실에 있으면서 버텨주고, 그 버틴 이유가 뭘까, 이미 119구급대 소방대원들은 저 애는 죽은 사람입니다,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저 애는,. 불과 이삼일이면 끝날 건데, 열흘을 버틴 이유가 뭘까, 저에게 준 숙제였어요. 두 번 다시 자기와 같은 노동자가 나오지 않고, 그런 학생이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아빠가 하시라고. 그런 숙제를 내준 것 같은 마음이 들고. 저희 애 같은 사고, 노동자가 죽는 사고가 없는, 그런 나라를 만들 때까지 저는 싸울 겁니다. 그리고요 이 한마디만 할게요. 내일 서울에서 현장실습 특목고·특성화고 교장 선생님들, 현장실습생들 내보는 선생님들이 서울에서 상공회의소 사무실에서 설명회를 해요. 애들 또 보내달라고. 그 현장에 현장실습 유가족들이 가요. 기자분들 많이 와 주세요. 공론화 좀 시키게. 부탁드립니다.
사회> 말씀하신 것처럼 유가족들의 발언이 다 그런 것 같아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싸우고, 이런 자리를 함께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너무 먹먹해서 질문을 못 하시는 것 같은데. 박민호 위원장님 혹시 이제 원진레이온 분들이 오래 싸우면서 제도도 많이 만들고 피해자나 유가족에게 꼭 이런 권리가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한 게 있는지. 오래 싸우면서
답> 박민호
글쎄요. 권리를 당연히 가져야 하는데 권리를 가진 자들이 가지니까. 유가족이 가질 수 없는 것들이겠죠. 사실상 노동부에 산업안전부국장(?) 교체를 하려고 굉장히 노력을 했는데 결국은 못했어요. 어짜피 사람이 바뀌어야 하거든요. 기존 생각이 다른 사람이 앉아가지고 법을 만들거나 하면 잘못되는 법으로 가고 잘못되니까 결국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자리에 앉아서 노동자 권익 보호를 해야 하구요. 산재 사고가 좀 나면 해야 할 게 있는데 하는 사람이 없어요. 아는 게 없어서. 결국 정리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민주노총이 산업보건 쪽이나 안전보건 쪽에 강화가 돼서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자식이 사고가 나면 어머니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데 그럴 때 손잡고 확대할 수 있었으면. 그리고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가족협의회가 확대해서 언제든 함께 해서 함께 갈 수 있는 게 결국은 노동자의 권리를 찾는 길이겠죠. 개인적으로 권리를 찾기에는 저희 투쟁을 보더라도 마찬가지에요. 전국에서 대학생이라면 다 와서 함께 했던 거니까 원진 투쟁이 가능했던 거거든요. 지금은 위원장을 맡고 있으면서 원진 투쟁을 원진 혼자만의 투쟁이라고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 때 당시에 사실상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문익환, 이소선, 대학생 사회적인 운동으로 승리를 만들어 왔거든요. 지금도 그때나 똑같은 것인데 어짜피 당사자들이 만들어 단체를 만들어 가고 또 사회단체에서 관심을 갖고 이렇게 가면서 뻗어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회> 기업살인법,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만들어야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처벌을 강화하는 것 중심으로 다루고 있긴 한 대요, 그래도 아무래도 이 안에 꼭 담겨야 할 게 있는 것 같다. 아까 이한솔님은 책임의 주체나 사각지대 문제를 얘기하셨고 정부가 제대로 못하는 걸 얘기했는데 황상기 아버님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만들어지면 반드시 들어가야 할 게 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답> 황상기 아버님
아까도 얘기했지만 얼마큼 되는 사람들이 병에 걸렸을지 모르고 사망자만 확인된 게 반올림이 파악한 것만 해도 백 명이 훨씬 넘는데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아까 얘기했지만 삼성은 잘했다는 상만 받았거든요. 이게 처벌이 없거나 약해서 그런건데요. 어떻게 해야 강한 처벌인지 저는 잘 모르겠고 아까 전문 이런 문제를 다루는 단체나 변호사님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연구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사망자나 상당히 여러 명의 병자가 나왔을 때는 좌우지간 그 기업에서 감당하기가 어려워야 한다. 감당하기가 쉬우면 잘 안 고치려 합니다. 돈으로다가 얼마 내고, 얼마 모상 보상하고 말려 하지, 딱 얼마의 벌금 예를 들어 한명 죽으면 100원, 200백 원 이런 벌금이 아니고 제가 생각하기에는 운영하는 이익의 몇%를 내는 식이든가, 아니면 기업 총 책임자가 법정 구속을, 그 구속도 짧은 구속이 아니라 뉘우칠만한 시간이 필요한 구속, 이렇게 엄한 처벌이 있어야 잘 안 고쳐진다고 봐요. 이런 목소리를 구체적으로 어느 구석에 찔러야 하는지를 구체적인 얘기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회>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기업자체를, 기업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걸 강조해 주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두 분에게 마지막으로 말씀을 여쭙고 이 순서를 마치려 한다. 사실 정부가 제대로 대응을 못하는 것에 굉장히 화도 나고 그러는데 이한솔님은 특히 정부가 이런 산재를 막기 위해서 어떤 역할을 좀 더 강하게 해야 하는지 의견을 주십시오. 김용균님 어머니는 여기도 함께 해 주신 분이 있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만들기 위해 함께 하고 계신데 이런 것 꼭 하자 제안해 주실 게 있으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이한솔
정부의 역할을 제가 속한 단체로서 말씀 드리면, 예시를 든다면 특별근로감독이나 근로감독 청원을 할 수가 있을 것 같다. 기업에 문제가 있을 때 진행을 하는데. 그러면 보통 드라마를 예시로 되면 접수처리가 되고 3, 4주 지나서 고발에 대응이 있거나 파견이 결정되어 2, 3주뒤에 들어가면 그 드라마가 끝나 있어요. 뭐랄까 처벌하거나 제재할 수단이 안 들어가 있는 부분들을 보면서 단순히 여기에만 적용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경직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계속적으로 예를 들어 세트장 부실하면 그런 것이 확장적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다른 곳들도 같이 점검하고 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하나의 사건이 터지면 그것만 대응하거나 이게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쪽으로 정부기관들이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아쉽고 똑같이 반복되는 산재나 사건을 보면 아예 종목이 직종이 같지는 않는데 대개 유사한 사례 반복되는 걸 보면 어쨌든 정부기관이 너무 경직되게 제 역할을 못한 부분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고. 혹은 어쨌든 현장의 얘기를 제대로 잘 듣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저희가 처음에 사건 대응하기 시작했을 때 떠올려보면 CJ와 잘 안 되면서 자체적으로 조사를 했었고 전문기관에 손을 안 뻗친 건 아닌데, 뭐랄까 직접적으로 산재에 딱 해당되지 않는 이상 관리자가 안타까워 한 부분을 어떻게 우리가 다루냐 이렇게 얘기한다.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지만 직접적으로 피해자는 아니었지만 안타까움을 느껴서 제 형 사고가 일어난 것이지만 그런 사건이 일어났으면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다룰 수도 있었을텐데, 사건 하나에 매달려 대응하니까 비븟한 문제,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그런 태도들이 반복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런 부분이 바뀌었으면 한다.
사회> 광주(?) 교통방송 기자의 질문. 김미숙님이 대통령을 만나셨는데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답> 김미숙
제가 대통령에게 말씀드린 건 진상규명에 대해서 대통령께서 저희하고 꼼꼼하게 점검을 해서고 현장에 반영되도록 함께 봐줬으면 한다고 얘기했다. 그래서 대통령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이 차별 없이 일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고 얘기하셨습니다.
(중간에 이태의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이 발언. 어머니께서 얘기 안 하신 게 있는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만들어 달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이 법을 빠르게 속도내서 만들어야) 맞습니다. 제가 기억을 못했습니다.
사회> 말씀하신 것과 더불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그리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만들려고 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지
답> 김미숙
우리 사회는 안전장치 하는 것보다 사람 목숨 값이 아주 쌉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평균 500만원 내면 기업들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돈만 조금 내고 그냥 지나갑니다. 정말 이상한 나라입니다. 영국에는 사람이 죽었을 때 형량을 4년, 5년 이상 주고 그리고 이익의 10분의 1 이상을 벌금을 내리는데 그래서 거기에는 안전사고가 많이 방지가 되었다고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기업처벌법을 만들어서 꼭 그렇게 안전하지 않아서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많이 줄었으면 좋겠습니다.
속기 : 노동해방 투쟁연대(준) 이용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