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런 메싱의 강연을 듣고
노동자와 대화하지 않거나, 노동 현장을 관찰하지 않을 때
연구자에게 일어나는 일
: 공감 격차 줄이기
이나단 /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2018년 11월 5일, 11월의 첫 번째 월요일 오후 6시, 퇴근시간 붐비는 사람과 차를 헤치고 서울대 연건캠퍼스에 도착한다. 한적한 교정과 달리 교육관 강당은 사람으로 붐빈다. 행사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들, 들뜬 얼굴로 지인과 대화하는 이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자료집을 읽는 이들이 시야를 채운다. 그 사이로 캐런 메싱 선생의 백발이 빛나고 있다.
<공감 격차 줄이기 : 한국과 태나다의 경험과 과제> 강연회 장소에 직접 오지 못한 이들을 배려해 강연회는 온라인으로 실시간 생중계되고 있었다. 이번 강연회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가능한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려는 주최 단체들의 의지가 느껴졌다.
큰 박수 소리와 함께 메싱 선생이 환하게 웃으며 단상에 올랐다. ‘Thank you very, very, very, very, very much.’ 환영하는 청중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후, 강연을 시작했다. 먼저, ‘보이지 않는 상처(Invisible that hurts)’라는 그룹의 이름을 강의 슬라이드에 띄운다. 본인이 함께 일해 온 특별한 조직으로, 대학, 노동조합, 여성운동이 함께 만든 공식적 파트너십이라고 소개했다. 법학, 인간공학, 커뮤니케이션, 심지어 춤까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협력하고 있다니 흥미로웠다.
본격적 강의에 앞서 거시적 정치 환경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계적으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노동자를 언제든 동원하고 손쉽게 해고하는 현실은 한국이나 캐나다나 매한가지라고 느껴졌다. 메싱 선생은 노동자 한 사람을 생산요소의 한 단위로 여기며 비용최소화를 추구하는 경제학의 논리를 날카롭게 꼬집었다. 모든 것을 숫자로 나타내며 합리적 선택의 결과라고 말하지만, 노동자의 건강과 삶에서 이는 결코 합리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노동자에게 갈수록 가혹해지는 세상에서 특히 여성노동자가 처한 위험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지난 40년에 걸친 연구에 따르면, 여성노동자는 작업속도가 더 빠르고 면밀히 통제되는 근무환경에서 일하며, 자기 자신과 업무를 부끄러워하고 하찮게 여긴다고 한다. 전쟁이 나면, 그 사회의 취약계층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 세계화된 자본 권력이 활개치는 전장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여성 노동자의 얼굴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강연의 본론이 시작되었다. ‘관리자나 연구자가 여성의 노동을 이해하지 못할 때, 노동자들은 고통을 겪는다.’ 제목 아래에 기술자 두 명, 늑대 이미지와 마주한 식당 점원, 마트 계산원의 사진이 보인다. 사진 속 노동자는 모두 서 있고, 대부분 여성이다. 메싱 선생은 여성 노동자가 비가시적인 고통을 받는 경우를 크게 (1) 다른 이와 함께 공동으로 일하는 여성노동자, (2) 업무와 가사를 병행하는 여성노동자, (3) 일하는 내내 서있어야 하는 여성노동자 문제로 구분하여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그때에야 비로소 화면의 그림 세 장이 각각 여성노동자의 고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임을 알아챘다.
첫 번째로 공동작업(teamwork)하는 여성노동자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메싱 선생은 펜으로 까맣게 지웠다가 다시 고쳐 쓴 근무시간표를 보여줬다. 개별 노동자가 신청한 휴가는 무시되고, 거의 매일 변경되는 복잡한 근무 일정에 여성 노동자가 힘들어지는 건 당연하다. 병원 간호사도 마찬가지, 유연한 노동력 분배랍시고 매번 근무스케줄을 변경한다. 실제 연구에 따르면, 같은 근무조에 속했던 간호사 두 명이 다시 만나 함께 일하게 되는 빈도가 한 달에 겨우 한 번이라고 한다. 병원에서 간호사 사이의 협업은 필수적이고 매우 중요하다. 빈번하게 변경되는 스케줄 때문에 환자 정보를 공유하고 기타 업무를 인수인계 하는데 드는 품과 시간이 허비되고 있다. 은행 노동자의 사정도 비슷하다. 매주 새롭게 익혀야 하는 업무 매뉴얼의 양이 방대해서 혼자는 알기 어렵고 여럿이 분담해 공부하고 서로 도와주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근무스케줄을 짜다보니 어떤 날에는 나머지 노동자들이 모두 초보라서 숙련된 선임노동자 홀로 고분군투하는 일도 벌어지게 된다. 이는 노동자 사이의 연대로 볼 수 있지만, 일을 돌아가게 만들기 위한 이런 종류의 ‘보이지 않는 노동’은 연구자에게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다.
두 번째 주제로, 직장 생활과 가족 돌봄을 병행하는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메싱 선생은 출근 시간이 매일 달라지는 콜센터 노동자 예를 들었다. 콜센터에서는 출근 당일부터 모레까지의 교대근무 일정만 공지된다. 그 이후의 출근 시간은 알 수 없다. 그러다보니 어린 자녀가 있는 여성노동자는 갑작스레 동료와 근무 일정을 바꾸거나 베이비시터와 약속시간을 조정하는 일이 많다. 노동자 30명을 조사했더니, 근무 조정 시도 횟수가 일주일 평균 180회가 넘었다고 한다. 엄청난 숫자이다. 이러한 조정이 잦아질수록 베이비시터의 일정도 복잡하게 바뀌고, 베이비시터는 물론 이들이 돌보는 아동까지 연쇄적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이처럼 콜센터 노동자, 베이비시터, 노동자의 자녀 등이 힘들어하는 상황은 일정 조정에 실패한 노동자 가운데 누군가 지각 또는 결근을 해야 비로소 드러난다. 이 때 관리자는 지각과 결근의 원인을 여성노동자의 고용주를 위한 비가시적 노동에서 찾기보다, 그들의 개인적 자질 혹은 불성실한 태도를 탓한다. 이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과 죄의식을 느끼는 여성노동자가 많고, 연구 참여자들 중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도 있었다고 했다. 공감격차로 사람이 죽고 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메싱 선생은 노동자의 절망적인 상황만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운송설비를 청소하는 노동자들의 사례를 들으니 위로가 되었다. 청소노동자들 역시 근무 일정 조정을 위해 여러 동료들과 연락하는 노동, 즉 비가시적 노동으로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 독특한 대응 방식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바로, 연결망 안에서 활약하는 몇몇 ‘중심’ 노동자였다. 여러 동료들의 변경 요청을 받아 이를 전체적으로 조율하는 중심 노동자의 모습이 ‘연대의 지도 그리기(mapping solidarity)’를 통해 드러났다. 이들은 공식적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개발해낸 노하우를 바탕으로 동료노동자의 수고를 덜어주고 있었다. 메싱님은 이들의 노하우를 정리하여 안내서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노동조합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가 노동조합과 노동자를 돕는 연구자에게 유용한 방법론 중 하나임을 강조했다.
다른 사례를 더 들려주었다. 주인공은 발달장애 자녀를 둔 싱글맘이고, 낮에는 아이의 치료 스케줄이 많아서 야간에 근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그나마 함께 사는 여동생이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는 아이를 돌보아 준다. 하지만 퇴근한 이후에도 좀처럼 잠을 잘 만한 시간이 없다는 것이 그녀의 큰 문제였다.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직장 동료들이 조금씩 양보해서 이 여성노동자가 틈틈이 잘 수 있도록 일정을 조정해주었다. 노동자의 연대를 통해서 근무환경이 조금 나아지고 고용주 또한 이런 문제를 인지하게 되었다. 행복한 결말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사례를 분석하여 논문으로 투고했는데, 학술지 편집자가 언어 수준이 낮다며 노동자의 인터뷰 발언을 문제 삼은 것이다. 메싱 선생은 끔찍한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저임금, 미숙련 노동자를 만날 기회가 적은 연구자가 흔히 가질 수 있는 공감격차라 생각되었다.
세 번째 주제는 서서 일하기에 관한 것이다. 메싱 선생은 서서 일하는 것의 의미를 먼저 짚었다. 가만히 고정된 자세로 서 있기부터 걷기, 뛰기, 나르기, 기대기 등 서서 일하는 형태는 다양하고, 캐나다 퀘벡에서 시행한 연구에 따르면 서서 일하는 노동자의 경우 남녀 모두 근골격계 질환 유병률이 더 높았다. 메싱 선생은 남성보다 여성이 서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강조했다. 식당 서빙, 조리사, 계산원, 판매원, 간호조무사 등이 대표적인 직종이다. 함께 ‘서서’ 노동자의 모습을 관찰하며, 이들이 얼마나 자주 벽에 기대는지 허리나 무릎을 몇 번이나 주무르는지 자세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노동자들 중에는 자신이 부지런히 일하는 중이고 언제든 서비스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힘들어도 서서 일한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주류 학계의 관점은 다르다. 학계에서는 ‘앉아서 일하는 것은 흡연만큼 건강에 해롭다, 입식 추천, 의자를 주의하라’는 등의 목소리가 크다고 한다. 큰 책상 앞에 서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사진 하나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몸에 꽉 조이는 정장을 입은 이 여성은 환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 유럽의 한 인간공학 학술지에 실린 것으로 서서 일하기를 권장하는 내용이다. 메싱 선생은 저명한 인간공학자와 나눈 대화도 소개해주었다. 그 학자가 서 있는 노동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길래 오랜 시간 박물관에서 천천히 걸어 다니면 허리가 아프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제서야 공감하면서 개와 동행하는 박물관 걷기(museum walking)의 효과를 연구해보면 좋겠다고 답했다고 했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연구를 하거나 사무를 보는 이들에게는 서서 일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제조업이나 서비스 제공 현장에서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이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그 인간공학자에게는 자기에게 요리를 가져다주는 식당 노동자의 서있는 노동은 전혀 관심사가 아니었다. 서서 일하는 노동자의 고통보다 개와 함께 걷는 연구를 먼저 떠올리는 작태는 그 인간공학자가 유난히 이상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서서 일하는 노동자와 직접 대화하지 않거나 직접 노동 현장을 관찰하지 않을 때, 연구자에게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공감격차라 했다.
마지막으로 메싱 선생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긍정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소송을 통해서 마트, 은행, 서점 등에서 앉아서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도 하고, 근무 일정을 조정해주는 소프트웨어도 개발되었다고 한다. 한편 메싱 선생은 최근의 미투 운동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자기 자신, 그리고 스스로의 노동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기보다 용감하게 목소리를 내고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연은 순차 통역으로 진행되었다. 메싱 선생이 두세 문장 발언한 후 곧이어 시민건강연구소 김명희 선생이 한국어로 통역해주는 방식이었다. 그래도 메싱 선생이 영어로 재밌는 이야기를 하면 통역하기도 전에 많은 이들이 웃고는 했지만, 나는 한국어 통역을 듣고서야 농담의 뉘앙스나 강연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아쉬움이 들기도 했지만, 여성 노동자가 겪는 문제에 대한 나의 지식과 정체성에서 오는 공감격차가 더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감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공부와 반성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공부와 반성은 여성 노동자와 소통하며 공감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