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건강연대활동가 해미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지금 노동자이거나, 노동자였거나, 미래에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혹시 주변에 일하다 다치고 아픈 사람을 본적 있는가? 죽은 사람은?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뉴스 기사 같은 곳에서 종종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 그런 소식들을 유심히 살펴봤다면 무언가 독특한 문화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바로 ‘노동자 탓하기’ 문화이다. 노동자 탓하기는 과로사와 과로자살의 경우에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다. 어느 직장에서나 요구하는 ‘빨리빨리, 열정페이, 절대복종!’ 따위를 견디지 못 한 그가 유약한 인간이란 판단.

지난 9월 4일, 과로사와 과로자살 문제로 싸워온 유가족과 동료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이 노동자 탓하기 문화가 사라져야 함을 이야기했다. 특히나 자리를 함께 한 참석자 중 많은 사람이 피해 당사자의 ‘자살’이 표면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정신질환으로 인한 것이라는 이유로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기 더욱 힘들었음을 토로하며, 그 어려움의 근원이 되는 노동자의 자살에 대한 인식개선을 요구했다. 

일단 자살이라는 사고가 당사자의 선택을 거쳤다는 사실은 우리가 통상 아는 사고처럼 우연의 성격을 띠지 않는다는 점에서 업무상 재해 인정의 쟁점이 된다. 업무와 재해 사이에 있는 개인의 ‘자유의지’가 그 둘의 상관관계를 흐려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이 ‘사고’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당사자가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정신질환 내역이 필요하고, 그 다음으로는 그 정신질환이 업무로 인해 발생했음을 밝히거나, 기존의 정신질환이 업무를 통해 심화되었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고인은 죽어 말이 없기에,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기 위한 모든 입증책임은 고인의 가족에게 있다. 그리고 유족이 필요로 하는 모든 기록, 곧 당사자가 어떤 업무를, 어느 정도 하였고, 업무 환경이 어땠길래 과로하였는지의 자료는 모두 회사에 있다. 그러나 노동자에 대한 책임을 적극적으로 회피하기 위해, 회사는 자료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선 되려 당사자가 원래 앓고 있던 지병을 들먹거리거나, 이 정도 일은 누구나 하는데 버티지 못한 것이라며 개인을 탓한다. 故 박선욱 간호사의 죽음 이후 버젓이 ‘유리멘탈 탈출하기’ 교육을 실시한 아산병원을 보라.

회사만 나쁜 놈으로 몰기는 쉽다. 하지만 회사가 이렇게 공공연하게 뻔뻔한 이유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통상적으로 우리 모두가 자살을 쉬이 개인의 의지 문제로 해석해오지 않았는가. 이에 <혼술남녀> 조연출 故 이한빛 pd의 아버지, 이용관 씨는 과로‘자살’이라는 용어 대신 사회적 참사, 사회적 죽음이라는 의미의 용어를 새로 만들어 썼으면 하는 바람을 표했고, 많은 유족들이 이에 공감했다. 그의 말대로 여전히 자살을 선택한 개인의 ‘자유의사’는 그저 모두가 겪는 사회생활을 감내하지 못 한 나약함의 지표라는 인식이 강하다. 

우리는 지금 과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과로할 수밖에 없고, 또 과로를 통해 나의 열정을 증명하라고 요구받는다. 우리는 이미 과로 자체가 위험하다는 감각조차 무뎌져있을 정도로 과로를 일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밀려나지 않기 위해 죽도록 일하다가, 정말로 죽고 만다.

CJ제일제당의 현장실습생 故 김동준의 어머니는 그때 그냥 그만두고 나오라는 말 대신 세상 사는 게 다 그렇게 힘든 거라고 말한 것이 후회가 된다고 하셨다. 하지만 과로로 인한 죽음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강구해내지 않은 이상, 김동준 씨가 일을 그만둔다고 하더래도 그는 또 다른 직장에서 똑같은 어려움을 겪었거나, 김동준 씨가 떠난 그 빈자리에 또 다른 김동준 씨가 계속 들어오지는 않았을까. 

이때 노동자의 죽음의 책임은 정말 누구에게 있는가? 고작 그 정도를 버티지 못한, 혹은 회사를 미련하게도 떠나지 못한 노동자에게 있는가? 아니면 노동자를 기계 부품처럼 굴려 과로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여 노동자의 고통을 방관한 정부와 회사에 있는가? 이제는 노동자를 탓하는 독특한 관습을 우리 스스로 깰 수 있는 시대가 오지 않았을까 기대한다. 다시는 그들의 죽음이 억울하게 해석되지 않고, 우리의 소중한 삶이 세상에 의해 방치되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