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노동자의 알 권리는 도대체 어디에

조기홍 한국노총 안전보건연구소 국장 09-07-29

최근 충무로 인쇄골몰을 돌아다니면서 놀라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놀라운 것은 충무로에 이렇게 많은 인쇄소가 있다는 사실(인쇄소 사장님 말씀에 따르면 수만 개 업체가 있다고 한다)이었고, 부끄러운 사실은 그동안 인쇄노동자의 건강보호를 위해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아마 인쇄소 골목을 다녀 본 사람이라면 화학물질 냄새가 난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인쇄소 골목을 누비다 보니 어느새 머리는 띵해지고 속도 거북해진다. 바로 인쇄소에서 사용하는 잉크와 세척제 등 화학물질이 원인이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화학물질은 10만종에 이른다. 국내에서도 4만종 이상의 화학물질이 사용되고 있다. 또한 매년 400여종의 새로운 화학물질이 국내시장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화학물질의 유통량도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국내 4만종 이상 화학물질 사용돼

인쇄업에서는 다양한 화학물질이 사용된다. 이와 같이 화학물질을 사용할 경우 사업주는 화학물질로부터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작업환경측정과 건강검진을 실시하고 화학물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노동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화학물질로 인한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정부는 96년 7월부터 물질안전보건자료(MSDS)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는 5만여종에 달하는 화학물질에 대한 MSDS와 550여종에 달하는 화학물질정보카드(Chemical Information CardㆍCIC)를 제작해 전산시스템과 유인물의 형태로 제공하고 있다.

사업주는 산업안전보건법 제41조 물질안전보건자료의 작성ㆍ비치 등에 따라 화학물질 또는 화학물질을 함유한 제제를 제조ㆍ수입ㆍ사용ㆍ운반 또는 저장하고자 할 때는 물질안전보건자료를 작성해 취급 노동자가 쉽게 볼 수 있는 장소에 게시 또는 비치해야 한다. 또한 사업주는 화학물질 또는 화학물질을 함유한 제제를 취급하는 노동자의 안전ㆍ보건을 위해 이를 담은 용기ㆍ포장에 경고표시를 하고, 노동자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한다.

노동자에게 화학물질 정보 알려 줘야

그러나 충무로 인쇄골목은 법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다. 다양한 화학물질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대부분 사업장에서 작업환경측정ㆍ건강검진을 실시하지 않고 있다. 화학물질에 대한 물질안전보건자료 또한 전혀 비치돼 있지 않았다. 아니 물질안전보건자료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노동자도 사장님도…. 현실이 이러함에도 노동부의 지도감독은 거의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MSDS 제도가 시행된 후 13년 동안 정부는 화학물질로부터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적지 않은 예산을 투입했다. 그럼에도 충무로 인쇄노동자의 알 권리는 철저히 무시되고 있었다.

인쇄소 사업장을 방문해 인쇄기계 앞에서 작업을 하는 노동자에게 물어봤다.
“지금 사용하는 화학물질이 뭐예요?”
“이거요? 벤졸이에요. 세척할 때 사용해요.”
“벤졸이요?”
난 깜짝 놀랐다.
‘벤졸? 혹시 발암성 물질인 벤젠을 벤졸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벤졸이 무슨 화학물질인지 아세요?”
“아니요. 그냥 말통(18리터 용기)에 있는 거 가져다 사용해요”

그래서 벤졸이라 불리는 말통을 살펴봤다. 다행히(?) 벤젠이 아닌 톨루엔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톨루엔을 벤졸로 알고 사용했던 것이다.

또다시 작업하는 노동자에게 물어봤다. “지금 사용하는 화학물질의 유해성에 대해 사업주에게 교육을 받았거나 물질안전보건자료를 본 적이 있나요?”

역시나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물질안전보건자료가 무엇인지조차 알고 있지 못했다. 또한 잉크ㆍ세척제 등 다양한 화학물질을 사용하고 있었음에도 유해화학물질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환기시설도 없었고, 심지어 보호구도 착용하지 않고 있었다. 정말이지 인쇄노동자의 건강이 상당히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그동안 인쇄노동자의 경우 자신이 사용하는 화학물질의 유해성조차 모른 채 수년 또는 수십 년 동안 지속적으로 노출됐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화학물질 유해성 모르고 쓰는 인쇄노동자들

법에 사업주의 예방의무를 부과하고 있지만 과연 어느 정도나 실효성 있게 지켜지고 있을까. 사업주가 예방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노동부는 지도감독을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소규모 영세사업장의 경우 현실적으로 이를 기대하기란 매우 어렵다. 누군가는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노동자에게 알려 줘야 한다. 정부 또는 노동계ㆍ전문가들이 나서 적극적으로 화학물질의 유해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자신이 사용하는 화학물질이 무엇인지, 건강상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예방을 위해서는 어떠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등등….

최소한 이런 내용이라도 알아야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요구를 할 것이 아닌가? 또는 나중에 건강에 이상이 나타났을 때 보상이라도 요구해야 할 것 아닌가?

최근 화학물질에 의한 직업병 발생사례를 살펴보자. 2005년 1월 태국 여성노동자 8명에게 이른바 ‘앉은뱅이병’이 발병했던 것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노말헥산에 중독돼 팔다리가 마비되면서 걷지 못하는 ‘말초신경병증’ 진단을 받았다.

이들 태국 여성노동자들은 하루 4리터 이상의 노말헥산을 이용해 5천개 정도의 프레임을 닦고 또 닦았다. 그러나 매일 만지는 액체가 무엇인지 몰랐다. 마스크나 보안경 등 개인보호구도 지급되지 않았다.

또 다른 사례인 김성무(28ㆍ가명)씨의 경우 일한 지 4개월 만에 ‘화학물질에 의한 독성 간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2000년 7월 인조가죽을 만드는 회사에 입사했다. 이 회사에서는 인조가죽을 만들면서 가죽의 표면처리를 위해 디메틸포름아미드(DMFㆍdimethylformamide)라는 유기용제를 사용했다. DMF는 인조가죽을 만들기 위해 원재료를 배합ㆍ코팅ㆍ접착하는 과정에 사용된다.

공장 안에는 늘 암모니아 같은 시큼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호흡용 보호구를 착용하고 일하는 노동자는 없었다. 유기용제용 장갑도 사용하지 않았다. 직원들은 면장갑을 끼고 일했다. DMF가 호흡기와 젖은 면장갑을 통해 피부로 스며들었다.

위와 같은 사례를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는 사용하는 화학물질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유해화학물질을 취급함에도 보호구를 착용하지 않고 일했다는 것이다. 결국 직업병에 걸렸고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인쇄노동자의 경우 이러한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니 이전에 이러한 일이 발생했더라도 전혀 정보를 몰랐기 때문에 모르고 지나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정말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법과 제도적으로는 유해화학물질에 대한 정보전달체계를 갖춰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나 실제 유해화학물질을 취급하는 노동자에게는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거나 형식적으로 또는 문서적으로만 수행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법ㆍ제도는 있지만 노동자는 몰라

현재와 같이 공급자 위주의 화학물질 정보전달 체계로는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유해화학물질로 인한 산업재해를 예방하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공급자 중심이 아닌 수요자 중심, 즉 노동자 입장에서 정보전달이 이뤄져야 한다. 정보가 효율적이고 실질적으로 제공될 수 있도록 제도개선 등 다양한 대책이 마련돼야 산업재해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유해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소규모ㆍ영세사업장의 경우 이러한 정보전달 체계가 더욱 취약하다. 소규모 영세사업장은 사업주의 무관심과 정보전달의 접근성 부족, 그리고 화학물질 정보에 대한 이해부족 등으로 인해 화학물질에 의한 산업재해 발생 가능성이 높은 실정이다. 따라서 소규모ㆍ영세사업장 노동자의 화학물질 정보전달을 위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한 것으로 판단된다.

사업주의 책임강화도 필요하지만 정부ㆍ노동계ㆍ전문가 모두 나서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사용하는 화학물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피해를 당하는 노동자가 발생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공급자 중심 정보전달 탈피해야

한국노총 안전보건연구소는 올해 인쇄사업장을 대상으로 노동자의 알 권리를 강화하고 유해화학물질로부터 인쇄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화학물질 관리실태를 조사해 개선하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이번 사업을 바탕으로 향후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되는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의 건강보호를 위한 정책 및 제도개선을 추진하고 노동자의 알 권리 강화를 위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갈 것이다.

노동자의 알 권리는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권리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