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포르시안 [노동과건강 연속기고⑤]

일터 건강관리, 노동자가 경험하는 현실로부터 출발해야

최영철(노동건강연대 회원,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특임교수)

 

 

 

소음이 심한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청력보호구(귀마개, 귀덮개 등)를 착용하지 않겠다며 거절하는 이유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직접 들어본 이유로는 “없어서”, “바빠서”, “자꾸 빠져서”, “아파서”, “답답해서”, “잃어 버려서”, “동료와 대화를 해야 해서”, “기계 소리를 들어야 해서”, “이미 난청이 생겨서”, “나아지지 않는다고 해서”, “더 나빠져야 장해 등급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등의 이유들이 있고 비슷한 표현 안에도 조금씩 다른 버전들이 있다. 경험 많은 상담자들이라면 아마 훨씬 더 긴 이유의 목록을 알고 있으리라. 대부분의 건강상담자는 단호하고 자신 있게 당신의 권고를 따르지 않겠다며 정당한 이유를 주장하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지 난감해 한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손쉽고 흔한 반응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본인이 안 끼겠다는데 어쩌겠어요.”일 것이다. 이 손쉬운 반응에의 유혹을 이기고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보려고 마음을 먹는 상담자는 많은 시간과 노력, 공부와 정서적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 위에 열거한 거절 이유들로 표출된 이면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사업주와 노동자가 일터에서 경험하는 현실로부터 출발하는 긴 호흡의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업장 방문 상담경험에서 얻은 나름의 기준과 노하우가 있다면 우선 당사자의 저항과 충돌하면 안된다는 것, 당사자들의 부정과 거절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주장의 진실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말은 나도 인정할 수 없고 대화는 평행선을 달리기 때문이다. 서로를 말이 통하는 대화상대로 인정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대화와 작업장 순회 속에서 얻은 단서들을 이어 붙여 가면서 더 큰 맥락을 구성하는 과정이 기다린다.

 

작업 공정과 동선, 작업속도, 주변 환경, 동료작업자와의 상호작용을 이해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 있는 작업자의 시점에서 상황을 떠올려 본다. 해야 할 작업의 양과 범위, 문제와 해결방법을 어렴풋하게나마 공유하면 작업자의 시점에서 보호구를 착용한다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를 공유할 수 있게 되고 위에 열거한 여러 이유들이 좀더 현실감 있게 수긍될 수 있다.

 

상호인정하고 시점을 공유하면 이제 신뢰도 쌓이고 정보도 공유되었으니 함께 출발선에 설 수 있다. 이제부터는 보호구 착용의 경험이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 쉽게 답이 나오는 경우도 간혹 있다. 재질이 불량하고 차음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제품을 지급 받은 경우나 혹은 다양한 귀마개와 귀덮개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경우는 여러 제품을 써 본 후 착용과 관리가 편하고 차음효과가 뒤지지 않는 제품을 선택하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다. 착용방법이 익숙하지 않아 자꾸 빠지거나 차음효과가 저하되는 것이 문제라면 별도의 시간을 할애해서 사업장 특성에 맞는 청력보존프로그램을 진행해 보자고 제안하고 설득한다. 그 안에서 여러 종류의 귀마개와 귀덮개를 경험하고 착용방법을 함께 실습해볼 수 있으며, 밀착도검사도 해볼 수 있다. 작업공정의 특수성 때문에 지속해서 착용하기 어려운 것이 이유라면 주어진 한계 내에서 노출을 최소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타협안을 작업자 스스로가 제안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갖고 설득하고 협상해야 한다.

 

손쉬운 대응을 넘어서 변화를 유발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여해야 하며 세심한 협상과 설득의 기법까지 익혀야 한다. 제법 관리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있는 소음성난청이 이 정도라면 다른 수많은 업무상 질병들은 더 많은 노고를 필요로 할 것이다. 선의를 가진 성실한 상담자라 할지라도 체계적인 지원도 없고 어렵사리 일구어 낸 작은 변화가 성과로 인정받기 어려운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개인의 의지를 밀고 나가기 어렵다. 지금도 많은 건강상담이 이 지점에서 멈춘 채 진척 없이 반복되기도 하고 때로는 상담자 스스로 지레 벽을 치며 점점 소극적이 되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이미 건강을 주제로 사업장과 직접 접촉하며 지원하고 협력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들이 상당수 마련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직업과 관련된 질병 예방과 건강관리의 주요한 제도인 작업환경측정과 근로자특수건강진단이 있으며, 이에 더해 건강진단 결과 기준치를 넘어서는 유소견자와 요관찰자에 대한 특수건강진단사후관리 제도가 있다. 50인 이상 사업장에는 보건관리자를 선임하거나 보건관리대행 기관에 위탁을 하고 있으며 보건관리자선임의무가 없는 50인 미만 사업장에는 보건관리기술지원 국고대행사업도 노동자의 건강관리와 작업환경관리를 통해 사업장과 연결된다. 전국에 산재한 근로자건강센터에서도 의료인과 산업위생전문가들의 무료 서비스를 통해 사업장을 지원하고 있다.

 

이 제도들은 일터에서 노동자가 경험하는 건강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내고, 문제가 생기는 조건과 경로를 파악하여 각 사업장에 맞는 개선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는 기회들이다. 사업주와 보건관리자, 의료인과 산업위생전문가가 문제해결을 함께 모색하는 동반자 역할을 맺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감독이나 규제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조력하는 동반자로서 개개 사업장의 독특한 상황을 세세히 파악할 수 있고 그게 맞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 소중한 제도적 장치들이 기계적인 사업으로 퇴행하지 않으려면, 이 사업을 움직여 나가는 사람들이 더 적극적으로 변화를 꿈꿀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으려면, 그리고 일터의 사람들이 소극적 피상담자에서 변화의 중심이 될 수 있으려면 일터의 구체적 경험에서 출발해야 한다. 해결의 실마리도, 그 실마리를 쥐고 풀어나갈 사람들도 현장의 구체적인 상황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도 비전도 맥락도 없는 건수 실적 채우기로 사업장 건강관리 사업의 성과를 가늠하는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흔히들 사업장과 일하는 사람들의 안전보건 문화와 행태를 바꿔야 한다고들 한다. 그것이 목표라면 먼저 그 과업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의 행태가 바뀌어야 하고, 이를 추진하는 기관들의 행태가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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