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우리는 산업폐기물이 아니다!” / 장원섭
어제의 산업역군 진폐증 환자
재가환자들은 장해판정 못받아
병마와 생활고에 힘겨운 삶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가
진폐증은 먼지가 많은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죽음의 산업재해 직업병이다. 진폐증이 많이 발생하는 사업장은 광산과 석면을 취급하는 사업장, 연탄공장, 채석장, 용접 관련 조선소, 주물공장 등이다. 이런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숨을 쉴 때마다 탄가루·석면·돌가루·쇳가루가 쉬지 않고 코와 기관지를 통해 노동자들의 폐에 들어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노동자들의 폐는 점점 굳어져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먼지는 끝내 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간다. 한국에서 진폐증에 걸린 노동자들의 70% 이상이 과거 탄광에서 일했던 광부들이다.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7만4천여 광부들이 탄광을 떠났다. 탄광을 등진 수많은 광부들이 지금 진폐증에 걸려 집과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다.
진폐증에 걸린 과거의 광부들은 요양승인을 받은 환자와 아직 요양승인을 받지 못한 재가 환자로 나뉜다. 장해가 있으면, 이들은 진폐장해 급수에 따라 장해 보상금을 받는다. 하지만 지급받은 보상금은 옛날에 생활비로 소진되었다. 요양판정을 받은 진폐환자들은 국가로부터 요양비와 휴업급여 등 각종 보호혜택을 받고 있다. 하지만 재가 진폐환자들은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다. 생활비조차 지원받지 못하는 재가 진폐환자들이 요양승인을 받으려면 9가지 합병증과 고도의 심폐기능 장애가 있어야 한다. 9가지 합병증 중에서 비정형 미코박테리아 감염으로 요양승인을 받은 사례는 지금까지 단 한 건도 없었다. 재가 진폐환자들은 폐렴을 합병증에 포함시켜 달라고 요구하지만, 노동부는 들어주지 않고 있다. 이런 불합리한 진폐법으로 노동부는 과거의 산업역군들을 무시하고 있다. 일본은 지역 의사가 진폐증을 판정하지만, 한국은 주치의의 결정권이 전혀 없다. 일본과 독일은 모든 진폐환자들에게 연금을 주지만, 한국은 재가 진폐환자들에게 약속한 생활비조차 주지 않는다. 노동부는 2001년 9월15일에 ‘진폐환자 보호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진폐합병증 인정범위 확대, 진폐환자 생활보호 대책 등이었다. 하지만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재가 진폐환자의 생활보호 대책은 전혀 없다.
진폐환자들이 요양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남은 삶은 운명적으로 달라진다. 요양을 받으면 휴업급여로 생활비가 해결된다. 하지만 요양을 받지 못한 재가 진폐환자들은 생활비가 없어 이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 현재 이들의 평균 생활비는 최저 생활비에도 미치지 못한다.
진폐증에 걸렸으나, 합병증이 없어 요양을 받지 못하는 재가 진폐환자 900여명이 지난 9월19일 태백에서 열린 정책토론회에 모였다. 이들은 피맺힌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우리는 산업폐기물이 아니다!”
“오늘날 경제발전은 우리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다!”
“약속한 생활비를 지원하라!”
“죽으면 받는 유족 보상비를 살아있을 때 달라!”
“우리는 못 배워서 두더지처럼 막장에서 탄을 캤다. 우리는 이미 늙었으니 많이 배운 젊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고통을 해결하라!”
그날 토론회장에 온 젊은 사람들은 토론자와 방송사 기자 몇 명뿐이었다. 과거의 산업역군들은 잊혀졌다. 이들은 나라와 국민에게 버림받았다. 이들은 산업폐기물처럼 버려졌다. 겨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어두운 얼굴을 쳐다보면,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이들의 얼굴은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몇몇 단체만이 아직도 이들의 절규를 듣고, 이들의 죽어가는 얼굴을 마주보고, 이들의 차가운 손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죽어가는 과거의 광부들은 산업화 시대에 인생 막장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탄을 캤다. 이들이 캔 탄은 발전소에서 전기를 만들고 연탄이 되었다. 그 전기로 기업들은 상품을 만들어 발전했고, 서민들은 연탄으로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이들이 탄을 캤기에 국가의 산림이 푸르러졌다. 한강의 기적은 이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나라와 국민을 위해 피땀을 바쳤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와 국민은 이들의 피맺힌 목소리에 응답하고, 이들의 얼굴을 바라볼 책임이 있다. 이들은 어두운 조국을 밝히던 빛이었다. 그 누구도 이들의 고통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의 과거를 위해 피와 땀을 흘렸던 산업역군들이 지금 고통받으며 죽어가고 있다. 그들의 얼굴을 마주보며, 그들의 울부짖는 목소리를 듣지 않겠는가.
장원섭/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산재사목 봉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