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서 합병증 진단에도 “정상”
복지공단 엉터리 심사에 “분통”

지난 12일 저녁 강원 태백시 상장동의 낡은 연립주택. 2층 구석에 자리한 김광옥(81)씨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쇳소리를 내면서 울려 나오는 기침소리가 집안을 찢어놓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 거동에 지장이 없었으나 현재는 몸 상태가 나빠져 걷기조차 어려운 김씨가 방 한 구석에 누워 있었다. 김씨는 10년 가까이 태백지역 탄광에서 석탄을 캐다가 1985년 퇴직했다. 그는 지난해 8월 병원에서 입원 요양 대상인 폐기종 진단을 받았지만, 최종 심사 기관인 근로복지공단은 ‘정상’으로 판정했다. 바싹 마른 체구에 걷기도 힘든 형편이지만 김씨는 공단의 입원 요양 판정을 못 받았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아무런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호적상 아들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권자에서도 제외돼 현재는 끼니조차 잇기 힘들다. 김씨는 “주변에서 브로커를 통해 입원을 하게 됐다는 소리를 들으면 돈 없고 빽 없는 내 자신에 더 화가 치민다”고 말했다.
10여년 동안 탄광에서 일해 온 최만철(71)씨도 비슷한 경우다. 최씨는 지난해 여름 병원에서 입원 요양 대상인 기관지확장증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공단은 ‘정상’으로 판정했다. 역시 정부로부터 의료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최씨는 돈이 없어 병원에도 못가는 실정이다. 최씨는 “몇 번이고 재심을 신청해도 늘 ‘정상’ 판정이 나왔다”며 “도대체 심사관들이 무얼 보고 판정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오랜 탄광생활 끝에 진폐증을 앓으면서도 입원 요양 판정을 받지 못해 집에서 요양을 하는 이른바 재가 진폐환자들이 의료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한국진폐재해자협회는 재가 진폐환자들이 전국적으로 2만7천여명에 이른다고 말한다.

재가 진폐환자가 받는 혜택은 장애 등급을 받은 경우 급수에 따라 일시금으로 장애 보상금을 받는 것과 보건소에서 약을 타먹는 정도다. 아무리 상태가 나빠져도 입원이 안되면 그 이상의 헤택을 못받는다. 원응호 태백자활후견기관 관장은 “대부분의 재가 진폐환자들은 집에 머물면서 죽을 때까지 요양 기회를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주응환 한국진폐재해자협회 회장은 “이들 대부분은 육체적 고통과 사회에서 버림받았다는 상실감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실제 재가 진폐환자 2명 가운데 1명은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주영수 한림대 교수(산업의학과)가 태백지역 재가 진폐재해자 81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몸이 아파도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재가 진폐환자들이 426명(52%)에 이르렀다.

보다 못한 재가 진폐환자들은 생존권 확보를 위해 상경투쟁에 나섰다. 이들은 16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재가 진폐환자 생존권확보 결의대회’를 열고 △근로복지공단의 공정한 장애 판정 △재가 진폐환자 생활보조비 지급 △입원 환자와 동일한 휴업급여 지급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성희직 한국진폐재해자협회 후원회장은 이 자리에서 “정부가 ‘엿장수 마음대로’식의 엉터리 판정을 일삼아 진폐환자 사이에서 불신이 높다”며 근로복지공단에 공정한 장애 심사를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