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
[기고] 하이텍 투쟁 2000일 문화제를 진행하며
로자(이윤보다인간을) / 2007년10월16일 13시20분
지난 10월 11일은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지회의 싸움이 꼭 2000일 되는 날이었다. 2000일. 순간 2000이라는 숫자에 무감각해진다. 따뜻한 봄기운,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해야할 2002년 4월, 100만 원도 안되는 임금을 올려달라며 시작한 싸움이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 5명은 2000일간 해고싸움을 해오고 있다. 여성 조합원들로만 이루어진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지회는 투쟁 2000일을 맞아 아침부터 분주하다. 저녁 투쟁문화제와 뒷풀이 준비를 위해 조합원들과 공대위 식구들은 쓰러지기 직전인 천막을 치우고, 공장 입구 바닥에 그림도 완성하고, 음식준비를 한다. 순간 잔치를 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하이텍 지회 조합원들은 전을 부치고 있는 순간에도 여러 생각과 감정들이 교차했을 것이다. 요즘은 기본 투쟁기간이 1년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치더라도 하이텍 지회의 싸움은 벌써 6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2000일 동안 투쟁이 끝나지 않았음에 가슴아파해야 할지, 2000일 동안 지치지 않고 끈질기게 남아 투쟁하고 있음에 격려하고 기뻐해야 할지 순간 판단이 서지 않는다. 아마 하이텍 투쟁 2000일 문화제에 온 모든 동지들이 그러했을 것이고 지회 조합원들의 생각과 감정은 더욱 복잡했으리라.
오후 7시, 눈부신 조명과 함께 하이텍 부지회장의 사회로 문화제가 시작된다. 다양한 단위에서 참으로 많은 이들이 와주셨다. 그간 쉽게 볼 수 없었던 문예활동가들도 이곳에서 다 만나볼 수 있었다. 하이텍 투쟁과 함께해온 문예활동가들은 2000일 동안의 추억이라 하기에는 힘들었을, 그럼에도 지금까지 변치않고 힘차게 싸우고 있는 하이텍 지회 동지들을 격려했다. 가장 감동을 안겨준 동지들은 10여 년 동안 하이텍 지회와 연대해온 이화여대 동지들이었다. 10여 년 동안의 연대는 이제 노동자와 학생이 아닌 노동자와 노동자로 재회하고 있었고, 당당하게 투쟁기금도 전달하고 있었다. 가진 것 없는 노동자들이지만 그때의 감격은 수백, 수천의 금은보화와 맞바꿀 수 없으리라. 또한 자본가들의 돈을 향한 맹목적이고 끝없는 추격이 추잡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것은 19년 전이라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투쟁은 구로공장이 아닌 2년 전 근로복지공단에서의 투쟁이다. 공단 앞 농성은 맑은 날보다 궂은 날이 더 많았다. 공권력에 의해 뜯기고 다시 만들어진 농성장은 비가 올때면 자다가도 일어나 지붕의 물을 장대로 내려보내야 하는 수고를 반복해야만 했다. 500인 단식을 하는 날에도 어김없이 비가 왔다. 모든 사람들이 우비를 입고 형형색색의 만장을 들고 공단을 에워쌌던 투쟁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벅찬 기억이다. 그럼에도 ‘작업장 감시로 인한 정신질환’에 대해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과 신뢰라는 근로복지공단은 끝내 산재불승인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하이텍 지회를 중심으로 한 2005년의 노동자 건강권 투쟁은 과거 한 사업장의 산재 승인을 요구하는 투쟁을 넘어 노동자의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알려내었고, 그렇게 하이텍 지회의 싸움은 노동자 건강권 투쟁의 역사를 만들기도 했다.
문화제 막바지. ‘2000일’이라는 말이 그 기간을 일부 함께하고 경험했을 사람들에게 미약한 감각을 전해오고 있었다. 이 자극은 이 땅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한다. 분명한 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신념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자본’이라는 가치가 ‘인간’이라는 가치보다 더 중요한 요즈음에는 더더욱… 노동자들의 일할 권리와 생존권, 사업장의 민주주의는 너무도 당연한 빼앗길 수 없는 인간의 권리임에도 자본주의 사회는 가진 것 없는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양보와 숨죽임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당하고 인간답게 일할 권리를 구걸하지 않고 실천하기 위해 하이텍 지회를 비롯한 지금 이 순간에도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신념을 믿고 동지를 믿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용기있는 노동자이다. 이렇게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 신념과, 동지에 대한 신뢰, 신념을 실천하기 위한 용기, 무엇보다 ‘자본’에 맞서 ‘인간다움’이라는 가치들을 만들고 쟁취해나가는 것일거다.
임박해 있는 대선 때문에 언론에서는 대선주자들의 추악한 정치놀음을 중계하기 바쁘다. 그러나 국민들의 삶을 위해 자신만이 대안이라고 우기는 이들의 모습은 노름판의 패를 잡기 위한 권모술수에 가깝다. 진정한 정치는 2000일간 하이텍 지회 노동자들의, 이랜드 노동자들의, 코스콤 노동자들의, 당당하고 인간답게 일할 권리라는 신념을 실천해나가는 노동자로 살아가기 위한 투쟁이 진짜 정치이다. 법인분리에 이은 공장폐쇄라는 수순밟기에 맞서, 생존권 쟁취를 위해, 해고자 원직복직을 위해, 노동자들의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위해,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 하이텍 지회 노동자들의 당당하게 노동자로 살아가기 위한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지금 하이텍 자본에 맞서 싸우고 있는 요구들이 쟁취된다고 하이텍 투쟁이 끝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당당하고 인간답게 일할 권리는 계속 모든 사업장에서 구성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며 이를 위해 하이텍 지회 노동자들은 멈추지 않는 전진을 계속할 것이다.
2000일 문화제는 그 동안 쉽지만은 않았을 하이텍 지회 노동자들을 어루만지기도 했으며, 연대온 동지들이 2000일간 투쟁해온 하이텍 지회 노동자들의 투쟁에 자신들의 의지를 다시 한번 견고히 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노동자로 살아가자는 하나됨을 만들고 있었다.